박종진의 개성답사기(4, 마지막회)

BoardLang.text_date 2006.09.10 작성자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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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통 골 가는 길

11월 21일 답사 마지막 날이다. 어제 밤 숙소에 너무 불을 많이 때서 모두 자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오늘도 맑은 날씨다. 오늘은 영통사를 가는 날이다. 본래 일정은 박연폭포와 대흥산성을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도로사정으로 그곳 일정을 취소하고 영통사를 가게 되었다. 대흥산성에 가서 천마산과 성거산을 비롯한 그곳 산세를 보려던 기대가 무너져 아쉬웠지만 영통사와 그 뒤에 버티고 있을 오관산을 보는 것도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9시 30분 자남산 여관을 출발한 차는 큰 길에서 수신호를 받고 동쪽으로 향한다. 혹시 동쪽 문이었던 숭인문터를 통과하여 영통사로 가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잠시 해본다. 그러면 개성시 동쪽을 볼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기대를 저버린 차는 곧 북쪽으로 향한다. 성균관을 가는 길이다.


성균관 오른쪽으로 난 탄현문 가는 길

성균관까지 간 차는 성균관 오른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올라간다. 곧 나성문을 지날 터이다. 나성의 동북문인 탄현문 자리를 통과한다. 성문자리인 고개를 넘자 바로 송악산 뒤쪽이다. 오른쪽으로 저수지(수고)가 보인다. 그 저수지 안에는 고려 광종 때 세웠던 불일사 터가 잠겨있다 한다. 불일사탑은 현재 박물관 뜰에 옮겨져 있으며, 탑 안에서 나온 조그만 금동탑 역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차는 저수지 왼쪽으로 난 구불구불 하게 난 산길을 따라 계속 간다. 송악산 뒤쪽의 풍광은 개성시와 그 앞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높지는 않지만 첩첩산중이고 산에 바위도 제법 많다. 그렇지만 역시 나무는 많지 않다. 그 산길에 사람들이 지난다. 무슨 일로 이곳을 다니는지 궁금하다. 길옆으로 큰 봉분의 무덤이 방치되다시피 서있다. 관리는 되지 않았지만 왕릉급의 무덤임에 틀림없다. 그러고도 한참을 달린 버스가 고개를 넘자 앞쪽에 최근 복원한 영통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관산과 영통사

(2) 왕건의 선조들이 처음 자리 잡았던 오관산 마하갑

영통사는 성균관에서 8킬로 떨어져 있다. 영통사는 남쪽 천태종의 재정도움으로 복원하여 최근 낙성식을 하였다. 시멘트로 건물을 지었는데 온통 붉은색 단청이다. 내 편협한 생각엔 복원하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닌 듯 했다.

여기서 개성 북쪽의 산세와 절터를 간단히 살펴보자. 임진북예성남정맥의 끝자락인 송악산 북쪽으로 천마산과 성거산이 이어진다. 대흥산성은 천마산과 성거산록을 이어 쌓은 10.1km의 포곡식 산성이며, 박연폭포로 유명한 박연은 대흥산성의 북쪽 수구문이다. 성거산의 주맥은 동북쪽으로 국사봉으로 이어진다. 한편 천마산의 남쪽으로 빠져나온 산줄기가 오관산이며, 그 동북쪽의 산이 영취산이다. 대흥산성 안에는 관음사와 대흥사가 있으며, 국사봉 남쪽에는 원통사가, 오관산 남쪽에는 영통사가, 영취산 남쪽에는 현화사가 있었다.



영통사 앞 계곡의 바위. 오관산 영통동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정학수 선생 사진)

설명하는 분이 영통사 뒤쪽의 크고 작은 다섯 봉우리를 가리키면서 오관산이라고 하는데, 그 서북쪽에 또 하나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아마 천마산의 남쪽 끝 봉우리가 아닐까?

[고려세계]에 전하는 김관의의 [편년통록]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선조들의 행적이 설화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성골장군 호경의 아들 강충이 살던 곳이 오관산 마하갑이었다. 바로 영통사가 자리 잡은 곳이 아닐까? 당시 강충은 부소군을 (송악)산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하는 자가 나올 것이라는 신라 풍수가 팔원의 말을 믿고 거처를 이곳 영통골에서 송악산 남쪽으로 옮겼다. 결과적으로 송악산 남쪽은 한 국가의 도읍이 되었고, 이곳에는 명찰이 들어섰으니 각각 타고난 자리가 있나 보다.

이곳 영통골은 조선후기 강세황의 그림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절 앞 입구에 새로 세운 다리 근처 계곡에는 옛 다리 흔적이 보였다. 나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 아래에는 오관산, 영통동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사진98 영통사 앞으로 난 길. 왼쪽으로 가면 용흥동이다. (정학수 선생 사진)

(3) 영통사의 문화재

영통사에는 중요한 문화재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대각국사 의천의 탑비이다. 비문은 김부식이 지었는데, 비문을 통하여 화엄승려로 활동한 대각국사 의천의 행적을 살필 수 있다. 대각국사비는 절 앞에 머리를 서쪽으로 향한 귀부 위에 서 있다. 본래 대각국사비가 이 자리에 있었는지 잠시 생각해 본다. 그 서쪽에는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영통사지 당간지주가 서있다. 얼마 전 강릉에서 굴산사지 당간지주를 보아서 인지 영통사 당간지주는 가늘고 약해 보인다.



대각국사비



영통사 당간지주

새로 복원한 보광원 앞뜰에 3기의 석탑이 서있다. 이전부터 영통사지를 지키고 있던 석탑이다. 가운데는 5층탑이 서 있고, 좌우에 3층탑이 삼각형 대형으로 서있는 모습이 예전 사진과는 다른 모습이다. 아울러 동서탑의 자리도 바뀐 듯하다.



영통사 석탑

본 절 북쪽 언덕에 있는 경선원 앞에는 의천의 것으로 알려진 승탑이 서있는데, 일부는 최근에 꿰어 맞춘 것이다. 또 경선원 회랑에는 영통사를 발굴하고 복원할 때 나온 여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경선원 서쪽 언덕에는 커다란 바위가 서있는데, 왕건의 선조 호경이 칼로 두 동강이를 낸 것이라 한다. 경선원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내려와 절 앞에서 다시 의천의 탑비를 본 후 일단 영통사와 작별을 하고 차에 오른다.



호경바위

차를 타고 절 바로 앞 전망대에 올라서 오관산과 그 아래 펼쳐진 영통사 전경을 바라본다. 푸른 하늘 속에 우뚝 우뚝 솟은 오관산의 모습이 아름답다. 역시 그곳에 올라 주변의 산세를 보고 싶다.

(4) 자남산 여관에서의 석별

영통사를 서둘러 떠난 버스는 왔던 길을 되집어 간다. 올 때보다 금방 간다. 처음 갈 때와 다시 돌아올 때면 느끼는 시간은 이렇게 항상 다르다. 그만큼 길이 익숙하고 편해졌기 때문인가 보다. 이제 자남산 식당에서 마지막 점심 식사만 남겨놓고 있다. 점심식사 때 북측학자들께 가지고 갔던 [고려의 황도 개경]을 주었다. 고맙게 받았다. 잘못된 것도 적지 않고 남쪽에서 크게 인기를 끌지 못한 책이지만 이곳에서만은 인기가 좋다. 점심식사 후 자남산 여관 앞에서 마지막 기념촬영을 한다.



자남산 여관에서 한 기념촬영

4일간 정이 들었던 북측학자들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여기저기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헤어지기 전 홍영의 선생이 가지고 갔던 생활사박물관 고려편 3질을 리 선생께 전달하였다. 리선생은 책을 가져다주어서 고맙다고 하면서 나에게 좋은 글 많이 쓰라고 한다. 가슴이 찡한다.

이제 버스가 출발한다. 자남산 여관 뜰에서 북측 학자들이 손을 흔든다. 곧 만나겠지 한다. 선죽교, 자남산, 남대문, 오천가를 차례로 지나, 다리를 건너고 철길을 넘어 봉동으로 들어온다. 그동안 정이 들었던 곳이다. 정말 언제 다시 볼 것인가? 그 날이 의외로 빨리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어느덧 차는 봉동을 지나 현대아산 숙소로 들어온다. 숙소에 들러 가방만 챙겨서 나오다가 숙소 앞에서 한 방을 썼던 안병우, 이영학, 홍순민 선생과 숙소인 콘테이너를 배경으로 사진을 1장 찍었다. 진봉산을 배경으로 1장 더 찍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든다.

현대아산사업소에 들러 개성공단 현황을 듣고 본 후 그 건물 옥상에 올라서 주변 사진을 찍었다. 아쉽게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날이 좋지 않다. 시커먼 안개가 끼어서 송악산도 대성동 마을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번 답사의 행운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5) 다시 서울로

4시쯤 월경심사를 마치고 버스를 탔지만 차는 쉽게 떠날 생각을 않는다. 30분 이상 기다린 후인 4시 45분 경 출발한 버스는 잠시 후 도라산 남쪽 사무소에 섰다. 입경 심사를 마치자 곧 휴대폰을 돌려준다. 이제 4일 간의 꿈같은 개경 답사가 끝난 것이다. 주차장에 선 차 위로 해가 넘어가고 있다.

차는 임진강을 건너 한강을 따라 난 자유로를 달린다. 오두산 전망대 근처 한강변에서 열을 지어 북으로 가는 철새를 만났다. 자유로이 나는 철새가 부럽다.



북으로 가는 철새

이번 개성답사는 지금까지의 어떤 답사보다도 가치 있고 뜻있는 최고의 답사였다.

가장 가고 싶은 답사였고, 또 사전준비를 가장 오래한 답사였으니까...

* 지난 해 개성답사를 다녀와서 답사기간의 감격과 기억을 조금이라도 남겨보려고 처음으로 답사기라는 것을 썼다. 남에게 보이려고 쓴 것은 아니지만 이 글이 개성답사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개성과 개성의 문화유산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답사기를 몇 차례에 나누어 웹진에 싣는다. 필자 개인 사정으로 이제야 마무리하게 되어 송구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