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정여립 역모의 후폭풍, 기축옥사

BoardLang.text_date 2007.11.28 작성자 신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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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역모의 후폭풍, 기축옥사


신병주(중세사 2분과)


  정여립 사건이 단순한 개인의 역모사건에 끝나지 않고 사림사회를 폭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끄는 기축옥사로 확산된 것은 동인과 서인의 힘겨루기가 절정에 달했던 시점이라는 시대적 조건도 한 몫을 했다.

  1575년 동인과 서인이 분열하면서 양 당파간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1589년 정여립에 대한 역모 사건이 터지면서 이러한 대립은 피크를 맞이하게 된다. 사건 직후 정여립의 자살로 주모자가 제거되었지만 사건의 파장이 오히려 커지게 된 것은 이 사건이 철저하게 당쟁과 연결되었기 때문이었다.

    1. 조작과 수사의 달인, 정철과 송익필

  사건의 확대는 자살한 주범 정여립을 반역자로 낙인을 찍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전혀 반론할 여지가 없는 자살한 인물에 대해 반역의 낙인을 확실히 찍고 사건 연루자를 대거 끌어들이면서 정여립의 역모사건은 조선중기 사림 사회를 뒤흔드는 정치적 참극, 즉 기축옥사로 확산되는 과정을 겪는다.

  1589년 11월 2일 생원 양천회의 상소는 대사건의 첫 출발이었다. 양천회는 상소를 올려 조정에 있는 이발ㆍ이길ㆍ백유양ㆍ정언신ㆍ정언지 등이 정여립과 결탁된 인물이므로 죄를 줄 것을 청하였다. 이들은 모두가 동인이었다.

  11월 8일 서인의 강경파 정치인 정철이 정언신을 대신하여 우의정에 임명되어 위관(委官:수사 책임자)을 맡는다. 단순 역모 사건에서 사림사회 전체를 흔드는 사건으로 확산되는 단초였다.

  정언신은 정여립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에서 위관직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고 역모 수사의 주체는 서인 중에서도 강경파를 대표하는 정철이 맡게 되었다. 송익필은 정철의 집에 머물면서 동인 타도를 지휘했고 수사는 걷잡을 수 없이 강경해졌다. 역모를 구체화하는 진술들이 줄줄이 터져 나왔고 동인들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12월 12일 낙안향교 유생 선홍복은 초사(招辭)에서 이발ㆍ이길ㆍ백유양 등이 연루되었음을 자백하였고, 12월 14일 전라도 유생 정암수는 상소문을 올려 한효순ㆍ정개청ㆍ정언신 등 조정의 대신들이 이 사건에 상당히 연루되었음을 주장한다.

  당시 역모 혐의로 상소문이나 공사(供辭)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거론되던 인물은 대부분 동인. 점차 서인들은 사건을 정국 전환을 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게 되었다.

  기축옥사를 조작한 혐의를 받으며, 동인 공격의 선봉에 선 인물은 ‘살아있는 제갈공명’이란 평을 받았던 송익필이었다. 그는 이이와 성혼의 친구이며, 김장생ㆍ김집의 스승으로서 서인의 학문적 연원이 되는 인물이다.

  송익필에게는 할머니가 천첩 소생이라는 신분적 콤플렉스가 따라다녔는데, 이발 등의 동인은 송익필의 이러한 아킬레스건을 파고들었다. 수모 속에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송익필에게 정여립의 대동계 소식은 좋은 빌미가 되었다.

  동인측의 입장에서 서술된 당쟁서에는 ‘송익필이 황해도에서 복술가로 가장하여 전라도의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천명을 받았으니 그에게로 달려가면 부귀와 공명을 누릴 수 있다고 하여 정여립의 휘하에 반역하는 무리들이 몰렸다’라고 기록하여 이 사건이 송익필에 의해 철저히 계획된 사건임을 암시하였다. 또 송익필이 활동하던 황해도에서 정여립의 역모 혐의가 처음 고발된 것 또한 이 사건이 그와 깊이 관여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정국에서 수세에 몰려있던 서인들이 이 사건을 동인의 공격에 적극 이용하면서 옥사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동인의 강경파이자 서경덕의 문인이었던 이발ㆍ이길 형제가 처형된 것을 비롯하여 곤장을 맞아 죽은 사람과 벼슬을 삭탈 당하고 구속당한 사람이 수백여명에 달하였다. 또한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로서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는 자들은 수감됨으로써 정국은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나아가 남명학파의 핵심인물인 최영경이 길삼봉(吉三峰)으로 지목을 받아 옥중에서 사망하면서 남명학파의 학자들 또한 큰 탄압을 받았다. 길삼봉은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무술과 신통력이 뛰어나 민간에도 그 신비함이 회자되었으며 정여립 역모의 주동자로 인식되었다.

  최영경이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진주의 옥에 갇혔을 때, 당시로서는 대다수라 할 수 있는 천여 명의 선비들이 옥문 밖에 모여들어 최영경의 결백함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기축옥사가 정치적으로 조작된 흔적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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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최영경의 문집인 『수우당집』

  2. 남인과 북인의 분당

  기축옥사를 계기로 동인 내에서는 남인과 북인의 분립이 가속화되었다. 이 사건은 동인 중 일부 급진세력이 관여된 것이지만, 서인측이 정치적으로 우위에 서려는 입장에서 강경한 처벌을 가함으로써 동인세력 중 특히 남명과 화담학파의 피해가 특히 컸다. 」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동인의 한 축을 이루었던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는 북인으로, 퇴계학파는 남인으로 갈라지면서 붕당정치의 한 분수령을 이루게 된다.

  ‘기축옥사에서 북인이 많이 죽은 것은 정여립이 북인계열이었기 때문이다’라는 『연려실기술』의 지적처럼 정여립은 북인으로 파악되었으며, 북인의 모집단을 형성한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는 그만큼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 이산해ㆍ정인홍ㆍ정개청 등 정여립과 친분을 유지한 관리들 중에는 남명이나 화담의 제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역모 계획이라는 구체화되지 않은 사건의 고발로 시작되었고 역모의 주창자는 자살하였지만 이는 사건의 시작일 뿐이었다. 정국 전환의 호기로 판단한 서인들이 모사(謀士) 송익필, 공격수 정철을 중심으로 동인측에 대한 적극 공격에 나섬으로써 16세기 후반 사림사회 전체를 뒤흔든 사건으로 확대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라는 측면 이외에 사림(士林)간의 사상적인 차이도 이 사건의 주요한 변수가 되었던 점도 간과할 수가 없다.       

  정여립 역모사건은 정여립 한 사람의 돌출된 사상과 행동으로 발생한 사건은 아니었다. 명분과 신분 차별을 강조하는 주자성리학의 흐름이 대세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이에 반발하는 그룹들의 불만이 정여립이라는 인물로 극대화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주자성리학 중심으로 조선사회를 재편해 나가려는 세력들에게 탈(脫)주자성리학의 입장을 보인 세력들의 사상은 의해서는 극히 불온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이들에 의해 그들이 유지해온 기존의 체제가 변혁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결국 체제유지 세력들은 강한 개성과 카리스마를 지닌 정여립이 무언가 일을 일으키기 전에 차단하여 체제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공동의식을 확산시켜 나갔다. 정여립의 역모 혐의가 고발되자마자 서인측이 일사불란하게 사건 연루된 자들을 대거 체포, 투옥, 처형시킨 것에서 당시 이들 세력들이 느꼈던 위기감이 얼마나 컸던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한편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던 퇴계학파는 같은 동인임에도 불구하고 정여립 사건에 한발짝 물러서는 입장을 취했다. 정여립과 같은 위험스러운 사상의 동반자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호한 입장은 남명학파나 화담학파의 불만을 샀고, 최영경과 이발과 같은 핵심 인물의 처형으로 감정이 악화되면서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는 퇴계학파 세력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파가 엄청난 공격을 당하는데도 수수방관하는 나약한(?) 세력과는 분명히 선을 그었던 것이다.

  이처럼 정여립 역모의 파장은 동인내에서 남인(퇴계학파)과 북인(남명학파와 화담학파)으로 분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남인과 북인은 선조 후반에서 광해군 시대에 걸쳐 치열한 정쟁을 벌이게 된다. 


  3. 정여립, 미완의 혁명가?


  정여립은 사회 혁명을 위해 실제로 역모를 꾸미고 실천했을까? 이 질문은 그의 자살로 영원히 미궁에 빠져 있다. 그러나 그가 보였던 진보적인 사상과 행동가적인 기질은 그 가능성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게 하고 있다.

  정여립의 사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주자성리학에만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이를 적극 실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여립의 이러한 학풍과 사상은 16세기를 대표하는 학파 중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경향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여립만이 완전히 독자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로 파악되지 않는다.

  정여립과 친밀한 교분을 유지했던 최영경, 이발, 정개청 등은 모두 남명이나 화담의 문인들로서, 정개청은 ‘미반(未叛)의 정여립’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이들이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희생된 것은 이 사건이 조선중기 사상사의 전개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정통 주자성리학을 고수하는 퇴계학파나 율곡학파에 비해 주자성리학에 상대적으로 덜 구속적이고 자유로운 사상과 학문을 수용한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사상적 흐름이 정여립의 사상에 내재했고, 이것은 조선의 사상계를 주자성리학 중심으로 이끌어가려는 세력들에게는 매우 불온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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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2) 정개청의 문집인 『곤재우득록』

  특히 역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국왕의 직접 조사를 받은 일부 하층민은 ‘우리는 반역이 아닌 반국(叛國)을 하였습니다. 반국은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한 것입니다’라고 하여 국왕의 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례는 정여립의 사상이 성리학의 이론 보다는 그 구체적인 실천행위 즉 민생문제의 해결에 보다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할 때 공사천인이나 무사들과 같이 신분적으로 하자가 있는 인물들을 적극 수용한 것에서 신분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사들을 직접 통솔한 것에서 보이는 병법과 무예에 대한 자질, 대동계를 결성한 것에서 보이는 조직 장악력, ‘목자는 망하고 전읍은 흥한다(木子亡 奠邑興)’는 동요를 옥판에 새겨서 지리산 석굴에 감추어 놓고 이를 유포시킨 일화가 전해진 사례에서 보여 지는 여론몰이 등을 종합해 볼 때 정여립은 상당히 치밀한 계획 하에 변혁을 꿈꾼 인물임에 틀림이 없었던 것 같다.

  근대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정여립을 가리켜 이미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혁명적인 사상가로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일제하 민족주의를 강조한 신채호가 고려시대의 묘청과 함께 반역자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정여립에 대해 적극적인 평가를 한 점은 주목이 된다. 

  정여립은 신분차별과 명분론, 성리학의 이론 탐구만을 중심 사상으로 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였다. 자신과 같은 능력있는 인재가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세상을 꿈꾼 그에게 보수적인 조선사회는 너무나 큰 장벽으로 다가섰다. 그가 변혁을 도모한 까닭이다.

  군주세습제를 부인하면서, 자신도 천하의 공물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을 만큼 야심가였던 그였지만 그가 활약할 수 있는 정치적, 사상적 공간은 극히 좁았다.

  정여립은 새로운 돌파구를 위해 무사들을 모으고 천인들을 모아 대동계를 조직하였지만 지식인의 활동 범위가 빤히 드러나 보이는 당시 사회에서는 너무나 ‘틔는’ 행동이었다. 특히나 동인과 서인의 붕당정치가 심화되어가는 시기 그의 반대파인 동인들에게는 좋은 공격거리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 주자성리학을 중심으로 명분과 의리가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들면서 체제의 안정적인 유지를 꾀했던 지식인들의 강한 반발을 샀고 마침내 그는 역모의 사슬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기축옥사라는 선비들의 대참사가 이어지면서 그의 죽음은 단순한 역모사건에 그치지 않고 조선중기 사회를 폭풍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조선중기의 풍운아 정여립의 혁신적인 사상과 이어진 대참극 기축옥사. 정여립의 모반 사건은 급진적 성향을 지닌 진보적인 존재할 수 있는 토양이 얼마나 척박했던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척박한 토양은 현재에도 결코 낯설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