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의 사회사]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

BoardLang.text_date 2007.07.16 작성자 심재우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


심재우(중세사 2분과)


  1. 영화 ‘살인의 추억’과 조선시대 연쇄살인

  2003년에 개봉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일어난 경기도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모두 열 차례에 걸쳐 발생한 이 사건은 1988년 9월에 있었던 여덟 번째 사건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미해결 살인 사건이다. 당시 이들 사건이 잔인한 범행 수법, 희대의 연쇄 살인으로 인해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던 사실을 당시 대학생이었던 필자도 기억하고 있다.

  화성 사건 자체는 비극이지만, 아무튼 영화 ‘살인의 추억’은 2003년 한 해 동안 5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같은 해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였다. 영화의 이같은 성공에는 탄탄한 구성도 한 몫 했겠지만, 살인, 수사, 추리극에 대한 사람들의 원초적인 호기심도 흥행에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834e10ed22ef03ee22bc178cfebb459e_1698397
<도판 1> 영화 ‘살인의 추억’ 포스터

  호기심을 좀 더 넓혀서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영화 ‘살인의 추억’을 닮은 사건이 조선시대에도 있었을까?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화성 사건과 같은 연쇄 강간 살인 사건은 없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드물긴 해도 연쇄 살인이나 엽기적인 집단 살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영조의 재위 10년인 1734년 5월 5일자 실록 기사에 따르면 경기도 광주에 사는 노 영만(永萬)이란 자가 자신의 주인과 동료 노비를 포함하여 무려 30여 명을 집단으로 연쇄 살인한 사건이 있었다. 한 명도 아닌 수십 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영만은 결국 그에 의해 부모를 잃은 동료 세적(世迪)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잔인한 연쇄 살인의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도대체 영만이 왜 살인을 시도했는가? 어떻게 수십 명을 죽일 수 있었을까? 필자 또한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에 대해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실록 기록이 소략하여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쉽게도 파악할 수 없다.

51432cd6ea1d43476140a1cc6bad8da3_1698397
<도판 2> 조선시대 살인 사건 발생시 사망자 검시 때 활용했던 검시 지침서 『신주무원록』. 조선후기에는 수정본, 언해본도 나왔다.

주지하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살인은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극단적인 일탈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형법상 살인자를 법정 최고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문제는 엄중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살인 사건이 늘 상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범죄통계학자들에 따르면 살인 사건은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왕 살인에 대해 이야기한 이상, 아래에서는 과거의 살인 사건 가운데 서로 너무나 잘 아는 가까운 사이인 부부간에 발생한 살인 사건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2.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

  속담에 ‘양주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이 있다. 언뜻 어렵게 들리겠지만 여기서 ‘양주’는 한자로 ‘兩主’, 즉 부부(바깥주인과 안주인)를 말한다. 결국 부부 싸움은 쉽게 봉합된다는 이야기인데, 항상 그랬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과거의 사건들이 증명해 준다.

  조선 정조 임금 때를 예로 들어 보자. 『심리록』에 따르면 부부 싸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배우자를 살인한 사건이 70건이나 집계되었다. 『심리록』은 정조 임금 재위 약 25년간 국왕이 직접 심리한 중죄수에 대한 판결 기록 1,112건을 모은 일종의 형사판례집에 해당하는 책자인데, 그 가운데 살인 사건은 가장 많은 964건이었다.

  18세기 후반에 발생한 배우자 살인 사건은 전체 살인 사건의 7.3%에 달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적지 않은 수의 살인이 한 집에서 생활하는 부부간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시기 다른 범죄 사례와 마찬가지로 평민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70건 사례 모두 가해자 남편에 의해 처, 첩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이다.

1502697ce91bcc0c244620c54d6ca828_1698397
<도판 3> 정조 때 중죄인 심리, 판결 기록을 모은 책자 『심리록』. 사진은 1778년 한성부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부분이다.

  남편의 부인 살해 이유는 다양했지만 가정불화가 주원인이었다.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농사일을 소홀히 하거나 첩과 반목한다는 이유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고, 재수 없으면 1799년 전라도 전주의 분매(分梅)라는 여성처럼 술주정 잘못했다가 남편에게 얻어맞아 3일 만에 죽기도 했다.

  처의 간통 또한 남편으로서는 극단적인 살인도 불사할 중대한 사안이었던 것 같다. 처의 외간 남자와의 간통을 참지 못해 일어난 살인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1787년 평안도 영유의 박재숙(朴載淑)이란 인물은 부인 함 여인이 바람을 피운다고 묶어 놓고 주리를 틀어 죽게 하였으며, 심지어 1785년 전라도 무안의 정금불(鄭金不)이란 자는 부인 김 여인의 간통에 이성을 잃고 부인의 코를 베고 팔뚝을 잘라 11일 만에 죽게 하는 잔혹성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한편, 『심리록』의 기록에는 아내의 남편 살인 사건이 하나도 보고된 바가 없지만 그렇다고 조선시대 내내 아내의 남편 살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는 간혹 실록에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실리고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는데, 다만 조선시대에 동일한 배우자 살인이라고 해도 남편의 아내 살인과 달리 아내의 남편 살인은 차원이 다른 훨씬 중대한 사안으로 간주되었다.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적 덕목이 사회 깊숙이 내면화되어가던 조선시대에 부인의 남편에 대한 관계는, 신하의 군주에 대한 관계 및 노비의 주인에 대한 관계와 동일하게 간주되었다. 이에 따라 부인이 남편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할 경우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 관리들이 합동으로 죄인을 심문할 정도로 큰 변고로 여겼으며, 살인한 여성을 사형에 처함은 물론 가족과 고을 수령까지 연좌시키는 것을 법전에 명문화하였다. 이는 앞서 『심리록』에 실린 부인을 살해한 가해자인 남편의 경우 재판 과정에서 여러 가지 사정이 참작되어 실제로 사형에 처해진 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3. 일제하 남편 살해 여성들

  앞서 정조 때의 살인 사건 기록인 『심리록』에 부인의 남편 살해 사건은 한 건도 확인되지 않은 반면, 남편의 부인 살해 사건은 70건에 달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거창하게 가부장제의 질곡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조선후기 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취약한 지위를 웅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근대 이후의 부부 갈등 양상은 어떠했을까? 한말, 일제하 배우자 살인 사건 데이터를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즉 배우자 살인 사건에서 여성의 남편 살해의 비중이 조선후기, 한말, 일제시대로 내려오면서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말의 검안(檢案) 자료를 분석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당시 전체 살인 사건 483건 가운데 배우자를 살인한 사건이 30건을 차지한다. 이 30건 가운데 남편의 부인 살인이 23건이지만, 부인의 남편 살인 사례도 7건이나 차지하고 있어 한말에는 앞선 시기와 달리 부인의 남편 살인 사건이 적지 않게 발생하였음을 알려준다.

  이같은 부인의 남편 살해 범죄가 증가하는 추세는 일제시대에 오면서 확연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일제시대 초기인 1911년부터 1915년까지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처형된 여성이 전국적으로 128명에 달하여 매년 이같은 범죄가 평균 25건 내외가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아울러 또 다른 통계에 따르면 1929년 현재 감옥에 수감된 여성 살인범 106명 가운데 63%에 달하는 67명이 남편을 살해한 부인들이었다.

3220b584a1f0061df3cdc5dd45fe07e9_1698397
<도판 4> 『동아일보』 1925년 10월 23일자 기사에 실린 남편 살해범 김정필에 대한 기사의 일부. 김정필은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함경도 시골마을의 한 아낙으로, 어린 나이에 병든 남편에게 시집 와 호된 시집살이을 견디다 못해 나이 어린 남편을 살해하였다.

  여성학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조혼(早婚)이나 축첩(蓄妾), 종래의 전통적 가부장제의 온존 등이 일제시대 여성의 남편 살해 범죄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음은 충분히 추정 가능하다. 그렇지만 배우자 살인 사건 중 여성의 남편 살해 사건의 비중이 왜 이전 시기에 비해 증가하였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되기엔 아직 부족해 보인다.

  아무튼 남편의 부인 살해든, 부인의 남편 살해든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사소한 부부 갈등이 얼마든지 이런 일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 아닐까? 속담과 달리 부부 싸움은 때때로 칼로 물 베기로 끝나지 않고 파국적 종말을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에 유의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