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역사 이야기] 해방 전 소련에서의 김일성그룹

BoardLang.text_date 2007.09.07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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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 소련에서의 김일성그룹


기광서(현대사 분과)


 

  1930년대 만주에서 조ㆍ중 유격대(동북항일연군)에 의한 반일 무장투쟁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의 유격대 토벌 작전은 한층 강화되었다.

  일본군의 드높은 공세에 조ㆍ중 유격대의 역량은 감소를 거듭하였는데, 1938년 3만여 명에 이르던 항일연군 병력은 1940년에 이르러서는 1,4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동북항일연군은 일찍부터 물적 원조를 받아온 이웃 형제 국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으로의 이동

  1939년부터 동북항일연군은 소련령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제2방면군을 이끌고 있던 김일성 부대는 일제의 토벌작전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을 거쳐 1940년 10월 23일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소련으로 들어갔다. 소련에 들어온 전체 조선인 유격대원 수는 200명 내외였다.

  동북항군연군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1940년 겨울부터 하바롭스크 근방 비야츠코예 나 아무르(Вятское-на-Амур) 마을에 A야영(일명 북야영)과 보로실로프(현 우수리스크) 근처에 B야영(일명 남야영)을 설치하였다. A야영에는 중국인 주보중이 지휘하는 제2로군과, 제3로군이 들어갔으며, B야영은 제1로군 제2, 3방면군과 제2로군 일부 병력들로 채워졌다.

  동북항일연군 지도부는 부대를 정돈하고 장비가 보충되면 다시 만주로 돌아갈 것을 예정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1941년 4월 13일 소련과 일본은 상호간에 영토적 순수성과 불가침성을 강조한 중립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군 당국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항일연군이 동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일시적으로 중지하도록 하였다.

  항일연군 대원들은 두 야영에서 일련의 교육과정과 전투준비 훈련을 거쳤고, 일부 대원들은 소련군 정찰기관의 지시에 따라 이미 국경지역에서의 정찰활동을 하였다. 소련군 지휘부는 항일연군 출신들의 간부 훈련에 각별한 신경을 썼는데, 빨치산 대원 가운데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들이 선발되어 하바롭스크 보병학교에서 단기과정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김일성과 그 외 간부급 대원들은 이 학교에서 교육과정을 마치고 모두 소련군 장교로 임관되었다.

88독립보병여단의 결성

1941년 6월 중순 소련 정부는 항일연군이 주축이 된 여단 창설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였고, 이듬해 7월 21일 A야영이 소재한 비야츠코예 나 아무르 마을에서 극동전선군 산하 88독립보병여단이 창설되었다. 88여단 창설의 주된 배경은 조ㆍ중빨치산들이 만주 주둔 일본군의 동향을 탐지해내는데 적합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단은 러시아인, 중국인, 조선인, 모르드바인 등을 15개 이상의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88여단을 국제연합군으로 부르고 있고, 반면 중국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의 연장선의 의미를 부여하여 동북항일연군교도려로 칭하고 있다.

  88여단은 극동전선군 군사회의에 의해 직접 지도를 받았고 참모부 정찰부가 관할하였지만, 주보중이 이끄는 88여단 지휘부는 중국 공산당적을 유지하는 등 상당한 독자성을 보장 받았다. 88여단의 편제는 참모부, 정치부, 후방부, 군 검찰부, 4개의 보병대대, 통신중대, 포병중대로 이루어졌다.

  88여단 전체 규모는 시기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이는 러시아 군인들이 증강되거나 감소되기 때문이기도 한데 전체적으로 최저 900명에서 최고 1500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조선인은 100명 정도였다. 나머지 조선인들은 다른 소련군 부대로 차출되거나 집단농장(콜호즈) 등에 배치되었다.

  제1대대는 항일연군 1로군 출신 조선인들을 기본 단위로 구성되었으며, 김일성은 대위 계급을 달고 대대장으로 배치되었다. 여기에는 최현, 김광협, 강건 등 그의 부하들도 포함되었다. 88여단 부대대장 급으로는 소련군 장교들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조ㆍ중 대원들에 대해 주로 군사교육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았다.

  88여단의 조선과 중국인 대원들은 중국공산당적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소련군제에 편입되어 소련군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련 역시 반일 전선을 유지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소련과 조ㆍ중 유격대 간의 이해관계는 일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88여단의 활동과 김일성의 입지

  88여단 대원들은 대열연습, 총검술, 폭탄 투척, 수영, 실탄사격, 스키훈련, 야외훈련(추위를 견디는 능력 배양) 등 체계적인 전투ㆍ기술훈련을 받았다. 또한 소련측이 제공한 프로그램에 따라 정치사상교육이 실시되었는데, 여기에는 반일 교육과 소련공산당사를 비롯한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건설성과 등에 관한 정치학습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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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소련령의 동북항일연군 부대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김일성.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흑룡강성당사자료> 10집에 수록. (출처 : 한겨레신문)



  김일성은 상부의 지시를 받아 훈련 및 교육임무를 집행하였고 이밖에도 조선해방에 관한 토론과 교육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훈련 이외에 운동과 고기잡이 등으로 여가를 즐기기도 하였다.

  소ㆍ만 국경에서의 정찰 임무는 88여단 활동의 주된 목적이었다. 소련군 당국은 1942년 8월에 이미 군사작전의 개시와 더불어 88여단의 활용 계획을 확정하였다. 88여단의 최종 과업으로는 조ㆍ중 지역 주민들로 소규모 빨치산 부대들을 창설하고 그 활동을 지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조ㆍ중 유격대 출신들의 만주 파견 활동은 1941년 초부터 300명 내외의 대원들이 참가하였다. 조선인 가운데는 강건, 안길, 박덕산, 최현 등이 자신의 소부대를 이끌고 각종 공작을 지휘하였다.

  김일성 자신도 여단 창설 이전인 1941년 4월 동남만 일대에 남아 있던 소부대들과 연계를 맺고자 밀영을 떠났다가 활동을 마치고 8월에 기지로 돌아왔으며, 9월 중순경에는 재차 소부대를 이끌고 만주와 국내로 나갔다. 그는 1943년 7월 중순에도 지하공작을 위해 만주로 진출하였다.

  김일성의 회고록에 따르면, 소련군의 대일전(對日戰) 참전을 위한 나진, 웅기, 청진 등 북조선 항구에 대한 상륙작전 계획은 오백룡 부대가 수집한 자료에 기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88여단 조선인 대원들은 정찰활동 과정에서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으며, 그들 가운데는 김혁철, 손태춘, 김학송, 김홍수, 지봉손 등이 목숨을 잃었다.

  만주에 흩어져서 활동한 조선인 빨치산 지도자들이 88여단으로 합류하면서 이들 사이의 지위와 역할이 자연스럽게 해결을 보게 되었다. 김일성은 선배 빨치산인 최용건이나 김책 등과의 관계에서 별다른 무리 없이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김일성이 조선인 가운데 최고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조선인 주력 부대를 이끌었다는 점, 조선 국내에 보다 널리 알려진 점, 소련과 중국 지도부의 신망이 다른 이들보다 두터웠던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에서 일제 시기 김일성 부대의 활동을 객관적이고 총체적으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1940년 대 전반 소련 체류에 대한 평가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부대가 1930년대 초부터 조선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기치하에 대일 항전을 지속했고, 이데올로기를 떠나 그 목표에 상당한 일관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