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역사의 전환점] 청년 이규보의 꿈과 「동명왕편」

BoardLang.text_date 2007.11.07 작성자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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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규보의 꿈과 「동명왕편」


김인호(중세사 1분과)


  1. 이규보의 꿈과 이름

이규보(李奎報)의 나이 26세, 그는 아직 청년이었다. 이 때 그는 유명한 「동명왕편」을 지었다. 당시 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그의 바램은 세속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벼슬길에 나아가는 일이다. 특히 이규보처럼 지방 출신이 출세하는 길은 당시로는 이것뿐이었다.

  이규보는 1168년(의종 22년)에 태어났다. 태어난 후 2년 뒤에는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후 그는 무신들간의 권력 투쟁과 몽골과의 전쟁을 치루는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그의 첫 이름은 인저(仁底)였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이름을 중간에 바꾸는 경우가 많다. 그 역시 그러했다. 이름을 바꾸게 된 계기는 시험과 관련이 있다. 출세의 첫 관문이 과거 시험 중에 하나인 사마시였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고 불렸던 그에게 사마시 통과는 간단한 일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14세부터 다닌 명문 사립학교에서 그는 모의시험 때마다 매번 일등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시는 만만한 관문이 아니었다. 세 차례나 낙방한 그는 벌써 스물 두 살이었다.

  시험합격에 대한 중압감은 그를 짓눌렀을 것이다. 이 때 꿈에 나타난 것이 규성(奎星)이다. 그가 꿈에 노인들이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술을 마시는 장면을 보았다. 그들은 하늘의 별인 28수(宿)였고, 이규보는 자신의 합격 여부를 물었다.

  그 중 하나가 문장을 담당한다는 규성에게 물어 보라고 했다. 이 때 이규보는 잠이 깨었다. 결과가 궁금했던 이규보는 다시 꿈을 꾸어 보니 장원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름을 고치고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 그 결과는 당연히 장원이었다. 규성에게 보답한다는 이름, 그래서 규보(奎報)라고 했던 것이다. 이규보의 소망과 집착이 이렇게 꿈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2. 젊은 날과 「동명왕편」

  그는 벼슬길에 나아간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선비가 벼슬을 시작하는 것은, 구차하게 자기 한 몸의 영달만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개 배운 것을 정사에 실현하고, 경제시책(經濟施策)을 힘써 만들어 왕실(王室)을 위해 실시해서, 영원히 이름을 전하여 소멸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동국이상국집》 상국 최선에게 올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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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이규보 무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화도 소재)
  그러나 관직을 얻기 전에 그의 앞에 다가온 불행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1191년(명종 21) 8월, 그의 나이 24살 때였다. 이 해는 그에게 불운의 연속이었다. 1월에는 자신을 관직에 추천해 줄 수 있는 이지명(李知命)이 죽었다. 그는 이규보의 예부시를 맡았던 시험관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시험관과 합격자 사이에 특별한 인연이 맺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른바 좌주와 문생이라는, 아버지와 아들같은 사이처럼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지명의 사망은 이규보의 앞 길에 청천벽력이었다.

  여기에 더한 아버지의 죽음, 그에게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는 개경의 송악산 북쪽에 있는 천마산으로 들어갔다. 그리 자신을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말하며 세속과 거리를 두었다. 흰구름처럼 떠돌아 다닌다는 뜻이다.

  그렇게 두 해가 지나가고 그는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봄에 그는 『삼국사』라는 역사책을 얻어보게 된다. 이 책에서 이규보는 고구려의 건국자 주몽에 대한 얘기를 가장 인상 깊게 보았다.

  당시 주몽, 즉 동명왕에 대한 얘기가 민간에 많이 떠돌았다. 그는 이전에는 여기에 관심이 없었다. 유학을 공부했던 그는 공자가 괴이한 힘과 여러 잡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는 뜻을 받들어 기이한 얘기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예전에 중국 역사책에서 고구려 건국과 관련된 사실을 보았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기록이 너무 소략했기 때문이다.

  『삼국사』를 세 번이나 보았던 그에게 생각의 대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전의 기이하고 환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동명왕 얘기가 성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에게 생긴 생각의 변환,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이규보만이 알 뿐이다.

  그가 느낀 감흥은 곧바로 장편의 서사시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규보는 ‘고려가 성인(聖人)의 나라’라는 사실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시를 썼다고 주장한다. 성인이란 주몽을 말하며, 이규보는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국이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했다.

  아마도 그는 당시 무인집정자들 앞에 왜소해진 고려 국왕의 존재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아가 자부심을 가져야 할 고려국가의 위상은 동생뻘이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앞에서 한없이 왜소해져 있었다. 이렇게 작아진 현실은 그의 좌절된 꿈과 오버랩되었을 것이다.

  이규보는 혼란스러운 국가를 바로 잡을 영웅의 탄생을 고대했다. 백운거사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온 이규보에게 다시 꿈을 꾸게 하는 것, 그것이 주몽의 얘기라는 뜻이다.


  3. 「동명왕편」의 노래

  「동명왕편」은 매우 긴 장편 서사시이다. 그 형식은 본문에 시를 배치하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삼국사』에 실린 역사적 사실을 붙였다. 이를 살펴보면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와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주몽 탄생과 관련된 부분을 보면, 비슷하지만 『삼국사』의 내용이 『삼국사기』보다 과장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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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 부분
  주몽의 영웅성은 그의 탄생과정부터 활쏘기 능력, 신비한 힘 등으로 뒷받침된다. 아버지인 해모수와 어머니 유화, 이들은 모두 신(神)과 관련이 있다.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 유화는 강의 신 하백의 딸이다.

  두 사람의 결혼은 어딘가 고대적인 약탈혼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해모수와 하백으로 대표되는 두 부족 간의 갈등이 여기에 등장하기도 한다.

  주몽의 탄생 이후 성장은 전형적인 드라마이다. 부여왕자들과의 갈등과 시련이 있고,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전개된다. 탈출의 백미는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였다. 뒤쫓는 부여의 추격부대와 위기의 순간, 주몽은 자라와 거북이로 이루어진 다리를 건너 이들을 따돌린다. 마치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를 건너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부분이다.

  주몽이 만든 국가는 확장 단계에서 비류국과 충돌한다. 그는 굴복하지 않는 비류국의 송양과 활쏘기 내기에서 승리한다. 결국 나라를 세운 주몽은 40세에 사망하고, 이후에는 그의 아들 유리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이규보가 이 얘기를 통해 남기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군주의 얘기다. 그가 유학적 가치가 아닌 신화적 얘기에 몰입했으면서도, 결말에는 다시 유학적 사고로 돌아간다.

  창업하는 군주는 성스러워야 한다는 점, 그리고 수성하는 군주는 너그럽고 어짊으로 왕위를 지키고, 예의로 백성을 교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것이 그가 당시 통치자들에게 할 말이었다. 젊은 시절의 이규보는 무신 쿠데타라는 큰 변란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고려 국가의 위상 속에 초라한 현재의 자기 모습을 대입시키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