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연재를 마치며

BoardLang.text_date 2010.05.12 작성자 한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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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연재를 마치며



한상권(중세사2분과)





  1. 지금까지 1997년 2월 말 해직된 이후부터 박원국 이사장이 한 차례 복귀하였다가 다시 쫒겨 나는 2001년 10월 말까지 5년 동안 덕성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 하였다. 이 기간은 ▲국정감사 네 차례(1997, 1999, 2000, 2001) ▲교육부 특별감사 두 차례(1997, 2001) ▲관선이사 파견 세 차례(1997, 1999, 2001) ▲이사장 교체 여덟 차례[박원국→박동서(직무대행)→김계수→박승서(직무대행)→이문영→김기주(직무대행)→박원국→이해동] ▲총장 교체 다섯 차례[주영숙→김용래→권순경(직무대행)→이강혁→권순경(직무대행)→신상전(직무대행)] 등이 일어난 질풍과 노도의 시기였다. 5년 동안 이사장이 직무대행을 제외하고 5명 교체되었다. 사립대학 이사장 임기가 5년임을 감안한다면, 지난 5년의 투쟁기간은 평화로운 시기 25년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 만큼 덕성투쟁은 격렬했다.


2. 지난 5년 동안의 학원민주화투쟁을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는 1997년 2월 말 한상권 교수가 재임용탈락 된 이후부터 1999년 2월 말 복직될 때까지의 2년간이다. 이 기간 동안 ‘동토의 왕국’ 덕성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덕성의 문제는 대학을 자신의 사유물로 여겨온 박원국 전 이사장의 그릇된 교육관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재단 이사장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한 사립학교법이 그의 일탈된 행동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한 덕성인은 기본권을 박탈당한 채 노예처럼 살 수밖에 없었다. 어느 사립대학보다도 낮은 급여, 끊임없이 발생하는 부당한 해직, 비싼 등록금에 턱 없이 못 미치는 열악한 교육시설, 무분별한 학부제 시행 등 열악한 교육환경에 맞서 덕성인들은 떨쳐 일어섰다.


3. 2기는 한상권 교수가 복직된 이후 박원국씨가 대법원 판결로 복귀하였다가 다시 해임되는 2001년 10월까지다. 이 기간 동안에는 사학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친일족벌재단 퇴진투쟁이 벌어졌다. 덕성학원은 모자세습(송금선→박원국), 형제세습(박원국→박원택), 부자세습(박원택→박상진)이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족벌세습재단이었다. 게다가 덕성학원 설립자라고 일컬어지는 송금선은 반민족행위자 즉 친일파였다. 민주세력은 기억을 둘러싼 투쟁 끝에 덕성학원 설립자가 친일파 송금선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차미리사라는 사실을 밝혀내는데 성공했다.


4. 덕성의 학원민주화투쟁이 두 차례 모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연대투쟁 때문이었다. 기득권층은 절대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지 않는다. 기득권층이 자신의 이익을 자진해서 양보한 예는 역사상 없다. 따라서 기득권층에 맞서려면 강인한 인내심과 불굴의 투지를 갖고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려는 각오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력과 권력 물리력 등 모든 힘을 갖고 있는 기득권층의 지연작전에 휘말려 제풀에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연대는 교수와 학생, 학내 민주세력과 사회민주세력, 졸업생과 재학생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5. 재임용탈락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설사 내 의지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 환경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였다. 자의건 타의건 나의 삶의 일부분일진대, 이 현실을 인정하고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 개인에게 역사는 가혹하기도 하고 축복이 되기도 한다. 개인의 삶이 역사적 가치를 띠게끔 살았던 사람들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결코 역사가 개인의 삶을 짓밟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자신의 삶을 걸고 주장하고 있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삶을 가치 있게 만들려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누려할 권리가 훼손된 데 분노하며 끈질기게 투쟁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복직을 구걸하지 않았다. 비타협, 불복종, 투명성의 3원칙을 내걸고 투쟁이란 정당한 권리를 사용하여 쟁취하고자 했다. 그리고 민주세력과의 연대를 위해 정의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하였다.


6. 학생들이 보여준 연대의 정신은 참으로 놀라웠다. “비리가 없는 학교는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해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덕성여대생들뿐이다”라는 karma의 말처럼, 학생들은 온갖 탄압과 억압, 폭력에 맞서 싸웠으며 물러서지 않았다. 학생들은 기성의 권위에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학점을 무기로 탄압하는 교수들의 허위의식을 꿰뚫어보고 조롱하였다. 교수들이 무슨 말을 해도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당당히 맞섰다. 이처럼 정의를 위해 떨쳐 일어선 소중한 저항정신이 덕성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진보와 정의를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고귀한 연대정신을 기록으로나마 복원하고자 노력하였다. <나의 이야기>가 연대투쟁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다면 더 없이 기쁘겠다.


7. 험난한 학원민주화 투쟁에서 민주세력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지형이 바뀐 때문이기도 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하에서 안병영 교육부장관이 덕성여대에 대해 특별감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그 감사결과를 근거로 후임 이명현 교육부장관이 박원국 이사장을 해임하였다. 수평적 정권교체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첫 교육부 수장으로 이해찬 의원이 임명되었다. 이해찬 장관은 박원국 전 이사장과의 1년여에 걸친 고투 끝에 공익이사 4명을 파견함으로써 박씨 일가로부터 이사회 의결권을 빼앗고 족벌세습체제에 철퇴를 가하였다. 이후 족벌사학에 우호적인 김덕중 아주대 총장이 후임 교육부장관이 되면서 이사회 의결권은 곧 다시 박씨일가로 넘어갔다. 2001년 한완상 상지대 총장이 교육부총리로 임명됨에 따라, 이사장으로 복귀한 박원국 씨와 1년에 걸치는 험난한 투쟁 끝에, 마침내 이사회 의결권을 박씨 일가로부터 다시 찾아 왔다.


8. 역사가는 사료에 대한 분석 작업을 하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종합하는 작업을 통해 단편적인 사료들을 일관되게 연결한다. 학원민주화투쟁을 하면서 학문적 양심과 학자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압력과 회유에 맞서왔던 과정을 백서로 발간하였다. 망각은 상대로 하여금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도록 선동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5권으로 펴낸 투쟁백서와 교수협의회 활동백서를 바탕으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사건들을 뽑아낸 후, 그에 관해 가능한 한 사실에 입각해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하였다. 상대방의 입장도 자료가 허용하는 한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상상력을 동원한 이상 주관적 요소가 개입되므로, 그 서술이 모두 객관적 역사에 부합되기는 어렵다. 역사가는 다만 신빙성 있는 역사를 저술하려고 정성을 다할 뿐, 그 역사서가 과연 신빙성이 있을지는 보증할 수 없다. 주관적 인식인 쓰인 역사가 객관적 존재인 본래의 역사와 완전히 부합할 수는 없는 것이다.


9. 지난 10여 년 동안 머릿속에 박제 상태로 남아있던 기억을 세상 밖으로 불러내 기록으로 정리하는 계기가 된 것은 한국역사연구회 운영위원회가 끝난 후 가진 회식자리였다. 2008년 10월부터 지금까지 햇수로 2년 동안 웹진싸이트에 <나의 이야기>를 게재해준 한국역사연구회에 감사드린다.






2010년 5월 12일
한 상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