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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화석을 찾아서 ③] 맨홀, 도시의 지문_강성호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10.31 BoardLang.text_hits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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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10월(통권 56호)

[도시 화석을 찾아서] 

도시 화석을 찾아서 3: 맨홀, 도시의 지문

 

 

강성호(순천대)

 
 
 
맨홀(manhole)은 도시 화석으로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토목 시설물이다. 사전적 의미로 맨홀은 땅속에 묻은 수도관과 하수관 등을 검사하거나 수리하기 위해 지어진 수직 구멍으로서 지상과 지하를 연결한다. 도시의 지하는 우리가 모르는 복잡한 생태계로 이루어져 있다. 상수도와 하수도, 그리고 각종 도시가스·전기·통신선 등은 우리가 걷는 길의 아래에 신경망처럼 뻗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설물들을 안전하기 관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도시의 지하로 들어가야 한다. 

맨홀의 종류는 기능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상수도관의 점검과 보수를 위한 맨홀, 여러 곳에서 모인 빗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뚜껑에 구멍을 뚫은 멘홀, 생활하수와 분뇨 등 더러운 물이 흐르는 오수관의 맨홀 등등. 이렇듯 맨홀은 도시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역사적으로 맨홀은 실족사 사건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문 기사를 검색해 보면, 맨홀은 뚜껑이 없거나 열려있는 맨홀에 사람이 빠져버린 사건의 단골 손님이다. 특히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하는 아이들이 실족사가 매년 신문 기사의 한 지면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도시 화석으로서 맨홀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뚜껑에 있다. 맨홀뚜껑은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철과 탄소의 합금인 주철(Cast Iron)로 만들어진다. 주철은 내열성과 내마모성이 뛰어나면서도 용융점이 낮아 쉽게 주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주철은 기계 부품, 건축 자재, 주방 도구 등 산업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다. 중요한 점은 맨홀뚜껑에 다양한 문양과 함께 설치한 기관의 상징을 새겨 넣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뚜껑에 새겨진 문양과 상징은 도시의 시층(時層)을 가늠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한다. 그래서 맨홀뚜껑만 찾아다니는 기록 활동이 생길 정도이다. 
 
 

식민지 시기 부(府)의 도시 마크와 맨홀뚜껑

 
2017년 12월 서울 용산에서 경성부 시기의 도시 마크가 새겨진 맨홀뚜껑이 발견된 적이 있다. 한 도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도시 마크'는 1889년에 도쿄시를 시작으로 만들어졌다. 일본의 도시 마크는 오래전부터 사용해 오던 가문 문장에 뿌리를 두는 경우가 많다. 도시 상징물에 대한 관심은 식민지 조선으로 이어져 1918년에 경성부 제1기 도시 마크가 제정되었다. 이 도시 마크는 '京'자를 중심에 두고 글자를 둘러싼 원 바깥쪽으로 8각이 배치된 형태이다. 이 8각은 경성부 외곽에 위치한 성곽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7년이 지난 1926년에 경성의 도시 마크가 바뀌었다. 제2기 도시 마크는 공모전의 방식으로 제정되었다. 식민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과 만주에서도 참여한 결과 483명이 932점의 작품을 응모하였다. 
 
 
<표1> 1926년 공모전 결과 
 

<표1>은 경성부의 도시 마크 공모전에서 1등부터 5등까지 한 작품을 정리한 것이다.1) 그중에서 1등을 한 작품이 제2기 도시 마크로 확정되었다. 이 작품은 대화정(大和町, 현 필동)에 주소를 둔 田內文藏이 응모한 것이다. 새로운 도시 마크는 경성을 상징하는 작은 원을 중심으로 북한산과 남산을 상하에 배치한 형태이다. 뫼 '山'자를 둥글게 비튼 모양으로 응용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2> 서울특별시의 역대 도시 마크 
-맨홀뚜껑 사진 출처- 
제2기 맨홀: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journey.to.modern.seoul) 
제3기 맨홀: @woori__dongne
제4기 맨홀: @manholekorea
 
 
그 결과 서울특별시의 역대 도시 마크는 <표2>와 같이 바뀌었다. 경성(서울)의 도시 마크가 새겨진 맨홀뚜껑은 도시의 역사를 수집하는 이들에게 무척 흥미로운 소재거리였다. 2021년 3월 20일부터 5월 21일까지 '서울맨홀: 발 밑에 숨은 100년의 역사' 전시회가 열릴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제2기 도시 마크가 새겨진 맨홀뚜껑은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라는 SNS를 운영하는 김영준 연구원이 서울을 돌아다니며 찾은 것이다. 서울 예지동의 시계 골목길에 있는 맨홀뚜껑이다. 제3기 도시 마크는 부천에서 발견된 맨홀뚜껑이다. 경성의 도시 마크는 서울뿐만 아니라 인천과 목포 등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경우가 있다. 

현재 서울특별시의 도시 마크는 1996년에 제정되었다. '서울'을 서울의 산, 해, 한강으로 나타내면서 신명난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도시 마크의 변화에 따라 맨홀뚜껑에 새겨진 그림도 변화를 맞았다. 1997년 6월 3일자 일간 신문들은 서울의 맨홀뚜껑 도안이 격자망 무늬에서 방사-창살형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맨홀뚜껑은 도시 마크와 제작 주체를 표기하고 하수도의 종류별로 '하수', '우수', '오수' 등을 새겼다. 이 신문 기사는 맨홀뚜껑이 정책적으로 도시 마크의 변화와 맞물려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 1997년 6월 3일자 《조선일보》
 
 
식민지 시기 도시 마크는 《일본도시대관》이라는 책에 잘 남아있다. 현재 이 자료는 국립중앙도서관 외부연계자료(1936년판)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1940년판)을 통해 인터넷으로도 열람이 가능하다. 경성을 제외한 다른 부(府)의 도시 마크를 몇 가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도시대관》은 각 도시의 마크 모양과 유래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는 도시 마크가 제정된 시기를 알 수 있는 내용도 있다. 이를테면 인천부의 도시 마크는 1921년(大正 10年)에, 광주부의 도시 마크는 1925년(大正 14年)에 만들어졌다. 그 밖에 대구부는 1927년, 평양부는 1922년 등 도시마다 도시 마크가 제정된 시기가 다르다. 좀 더 꼼꼼한 조사와 비교·분석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는데, 1920년대 초중반에 도시 마크 제정 붐이 식민지 조선에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는 읍(邑)도 자체적인 도시 마크를 제정하려고 했다. 주지하다시피 읍은 1917년에 일본인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정면(指定面)을 전신으로 한다. 1931년에 읍으로 바뀐 지정면은 철도역이 있거나 행정·상업 중심지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남원읍은 1935년 7월 31일까지 휘장 공모전을 치렀다.2) 공모전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남원 사례는 1930년대에 들어서 읍도 도시 상징물을 갖추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남원 어딘가에는 1930년대 중반 공모전을 통해 제정된 도시 마크가 새겨진 맨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맨홀뚜껑 도안의 확산 

 
식민지 시기에 주로 부(府)를 중심으로 제정된 도시 마크와 맨홀뚜껑 도안은 점점 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해방 이후에 각 도시마다 도시 마크를 선정하고, 이를 맨홀뚜껑에 새긴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특히 1995년을 전후로 시행된 지방자치제는 도시 마크가 구(區) 단위로 만들어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1995년을 전후로 지방자치 시대가 열리면서, 각 지자체들은 빠른 속도로 도시 상징 디자인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1997년 3월 서울의 7개 자치구가 맨홀뚜껑에 해당 자치구의 마크를 새겨넣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 일이다.3) 이때 중구 등 7개 자치구는 “지자체 시대에 하수도 관리를 맡고 있는 자치구의 마크를 새겨넣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며 교체를 요청하였다.  
 
 
<표3> 부산광역시의 도시 마크 
 
 
다만 필자의 게으름으로 서울 자치구의 도시 마크가 새겨진 맨홀뚜껑은 찾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부산 자치구의 도시 마크이다. 부산광역시의 도시 마크는 현재까지 4번에 걸쳐 제정되었다. <표3>의 왼쪽에 등장하는 도시 마크는 부산광역시가 1995년부터 2023년까지 사용한 것이다. 부산의 상징인 갈매기, 오륙도, 산, 바다, 강을 형상화한 도안이다. 아래의 맨홀뚜껑은 필자가 부산 벡스코 일대를 돌아다니다 발견한 도시 화석이다. 그리고 오른쪽은 부산광역시 해운대구가 1994년에 제정한 도시 마크이다. 이 마크는 해운대의 상징인 파도, 동백꽃잎, 일출의 3대 요소를 표현하였다. 
 
 

순천의 맨홀을 찾아서 

 
순천에서는 아직 식민지 시절의 도시 마크가 새겨진 맨홀이 나오지 않고 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 당시 순천의 도시 마크가 어떤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힘든 부분이 있다. 대신 해방 이후 순천시의 도시 마크는 <표4>와 같은 변천 과정을 거쳤다. 제1기 도시 마크(1-2)는 16개 동(洞)을 상징하는 월계수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데 이 도시 마크는 1995년에 순천시와 승주군이 도농통합으로 합쳐지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승주군의 도시 마크(1-1)도 없어졌다. 이런 점에서 <표4>의 제2기 도시 마크는 '도농통합 도시로서의 순천'을 증언하는 도시 화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제3기 도시 마크는 2001년에 바뀐 것. 참고로 순천시는 2024년부터 새로운 도시 마크를 도입하였다. 
 
 
<표4> 순천시의 역대 도시 마크 
 
순천의 도시 마크를 한 눈에 정리한 다음, 필자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맨홀뚜껑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아직 승주군의 도시 마크가 새겨진 맨홀뚜껑은 찾지 못했다. 도농통합 이전 순천시의 도시 마크가 있는 맨홀뚜껑도 추정에 따른 것뿐이다. 그래도 1995년 도농통합을 계기로 새로 만들어진 도시 마크가 새겨져 있는 맨홀뚜껑은 2개 정도 발견하였다. 기회가 된다면 순천의 맨홀 지도를 작업해서 지역의 도시 화석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발굴해 나갈 생각이다. 
 
 
 
<미주>
 
1) 「京城府徽章圖案 入賞」, 《매일신보》 1926년 9월 26일자. 
2) 「남원읍의 휘장 懸賞으로 모집」, 《매일신보》 1935년 7월 28일자. 
3) 「맨홀뚜껑에 區 상징마크 요청 서울시 곤혹」, 《동아일보》 1997년 3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