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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 교과서 편향성 시비에 대한 역사연구단체들의 의견서

BoardLang.text_date 2004.10.22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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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 교과서 편향성 시비에 대한 역사연구단체들의 의견서

1. 의견서를 내게 된 경위

지난 10월 4일 국회의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모 국회의원이 모 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검정교과서를‘좌파’적 편향성이 심각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역사교육은 뜻하지 않게 정치 쟁점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 학교교육에서 역사교육이 위축되어 있고, 주변국들의 역사왜곡이 심각한 상황에서 한국을 이끌어 나갈 학생들에게 미래지향적인 참다운 역사교육을 위해 고심하고 있던 역사교사와 역사학자들은 전혀 뜻밖의 사태에 당면하여 크게 당혹하면서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 국민의 시민의식을 양성하는데 핵심이 되는 자국의 근현대사 교육이 선택과목으로 축소된 처참한 교육현실을 반성하고, 국가 발전전략 하에서 역사교육의 정상화를 위하여 정책을 추진해야 할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근현대사교육을 색깔 공세의 일환으로 도마에 올린 것은 적절치 못할뿐더러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역사교육이 정치세력들의 정쟁의 도구로 전락할 때 가장 큰 피해를 받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고 이끌어야 할 이 땅의 청소년 학생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는 심각할 만큼 무책임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역사학계는 그러한 주장이 과연 타당한지 냉정하게 검토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역사 연구와 교육 분야의 대표적인 학술단체인 역사교육연구회, 한국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3단체는 지난 10월 14일 연합 심포지움을 개최하여 최근 물의가 된 한국근현대사 고등학교 교과서 편향성 시비를 학술적 관점에서 검토하게 되었다. 역사교과서 편향성 시비가 당리당략 차원에서 정치적 공방으로 흐르고 있는 최근 논의를 역사학 전문학자들이 직접 나서서문제의 진위를 점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연합 심포지움의 결과로 역사학전문가들의 의견을 정리하여 본 의견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2. 검정 교과서의 집필기준 및 검정 시스템에 관한 의견

특정한 정권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객관적이고 다양한 역사교육을 가로막는 국정교과서 체제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서, 오랫동안 준비해온 교과서가 검정 교과서이다. 김영삼 정권 때인 1997년 12월 고시된 제7차 교육과정에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검정체제로 편찬하도록 결정하였다. 당시 교육부장관이 고시한 「교육과정」과 「집필상의 유의점」에 따라 집필된 교과서는 교육과정평가원의 주관 하에 2001년 12월 역사학자 및 역사교사 10인으로 구성된 검정위원회의 검정과정을 통과하였고, 2002년 제작되어 2003년부터 사용되고 있다.

검정교과서는 교육과정과 집필상의 유의점에 따라 집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왕의 국정교과서와 연계하여 서술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엄격한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인정체제는 국정체제에서 한발 전진한 것이며, 이를 발판으로 삼아 보다 자율적인 집필을 보장할 수 있는 체제로 나아가는 것이 역사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판단된다.

3.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내용에 대한 의견

이번에 문제가 된 근현대사 교과서의 내용과 역사관은 해방 이후 남한 정치권력의 성격과 경제성장, 6․25전쟁, 북한에 대한 평가 등이다. 교과서는 남한의 정치성격을 한편 독재정권이라 하여 비판하고, 다른 한편 경제성장을 이룬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모순된 평가는 제7차 교육과정에서 제시된 교과서 집필기준에도 그대로 나온다. 이는 독재정권과 경제성장이 동시에 가능했다고 보는 ‘발전국가론’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남한의 현대사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보다는 독재와 탄압으로 점철된 역사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비판이나, ‘긍정적인 부분을 다루지 않았다’는 비판은 교과서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았거나 현재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발전국가론’의 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나온 평가라고 할 수 있다.

6․25전쟁은 분단의 고착화와 국제적 냉전의 심화를 초래한 사건으로서 한국현대사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따라서 한국현대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에 대해서는 이전의 국정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분량도 매우 적다.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라는 점만을 반공적 시각에서 문제삼는 천박한 수준으로는 6·25전쟁이 가져온 전쟁 전후에 미친 국내외적 영향을 전혀 포착할 수 없다. 교과서는 그동안 학계에서 이루어진 6․25 전쟁에 대한 다양한 연구성과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북한에 대한 서술은 제7차 교육과정을 통해 처음으로 근현대사 교과서에 내용이 들어갔는데, 이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본다. 남과 북은 60여년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서로 떨어져 각각 발전하는 한편 서로가 상대방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46년 남한의 민주의원과 북한의 임시인민위원회, 1948년 남북 각각의 단독정부 수립, 1950 ․ 60년대 남북한에서의 경쟁적인 경제복구와 경제성장 정책, 1970년대 초 남한의 유신체제 수립 빛 북한의 사회주의헌법 제정, 1990년대 이후 남한의 북한에 대한 원조 등은 상호 간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연구는 정보와 자료의 부족, 접근방법의 제한 등으로 인하여 양적으로도 부족하고 질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수준을 반영하여 북한에 대한 서술은 부정적 긍정적 평가 이전에 단지 사실만을 소개하는데 그쳤다고 보인다. 특정한 가치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기준으로 북에 대한 적대적 반북논리를 강요하고, 북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낮다고 하여 그것을 곧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논리로 규정하는 것은 중세적인 정통성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식으로서, 미래 지향적인 역사교육에서는 지양되어야 할 시대착오적인 논리라고 판단된다.

 

4. 학교 현장에서 교과서의 채택 및 활용 현실에 대한 의견

학교 현장에서 교과서가 채택되는 과정은 그 절차가 공개적이고 민주적이다. 우선 각 시도 교육청으로부터 전시용 교과서가 배포되면, 교사들은 여러 날에 걸쳐 교과서를 비교 ․ 검토한 뒤에 각자의 교과서 선정을 위한 체크 리스트에 항목별로 점수를 산정하도록 되어 있다. 대표교사는 이를 수합한 다음 그 결과를 서술형으로 정리하여 학교운영위원회에 제출하고, 학교운영위원회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교과서를 최종 선정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는 이와 같은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전국에 걸쳐 절반의 고등학교에서 교과서로 채택한 인기있는 교과서이다. 교육현장에서는 해당 학교 학생들의 지적수준, 다양한 교수­학습 방법과의 연계성, 학습 자료의 종류와 난이도, 탐구 활동의 적절성 여부 등 실제 수업에서의 활용도를 고려하여 교과서를 선택한다. 역사교육 이론에서는 학교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들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학생들의 주체적인 학습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교수-학습법이 도입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단순한 암기식 지식 전달보다는 학생들의 역사적 사고력을 배양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현장의 역사교사들은 이러한 역사교육의 이론을 토대로 교재를 선정하고 새로운 교수-학습법을 개발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교과서를 교육현장의 교육적 기준, 수업에서의 활용성 등을 고려하지 않고 정치적, 이념적 공세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이 땅의 교단을 지키며 미래를 이야기하는 교사와 학생들의 교육권을 침해하고 퇴보시키는 부끄러운 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5. 문제해결을 위한 역사학계의 제안

1) 역사교육과 역사연구는 교육적이고 학문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로서 학계와 교육계에서 책임지고 풀어갈 수 있도록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2) 역사교육을 당리당략이나 이념공세의 수단으로 삼는 행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이러한 행위가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정치권과 언론계의 반성을 촉구한다.

3) 현재의 한국근현대사 검정교과서는 검정기준에 따라 원칙적으로 처리될 수 있도록 보호되어야 한다. 나아가 검정교과서의 검정기준 자체가 학계의 연구성과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므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그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4) 교육인적자원부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싼 비이성적 이념공세의 파장을 수습하고 교육현장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2004. 10. 20

역사교육연구회, 한국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