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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 런던에 있는 그의 유적을 찾아

BoardLang.text_date 2005.03.10 작성자 박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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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 런던에 있는 그의 유적을 찾아


                                                                         박윤재(근대2분과)


 

 

맑스의 마지막 망명지가 런던이고, 그곳에 그의 무덤이 있다는 것 정도는 풍문으로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의 행적을 더듬는 답사를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80년대 학번이 그렇듯이 책장에 맑스의 책 한두권이 꽂혀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볼 것도 많은 영국까지 갔는데, 아니 유럽에 갔는데, 굳이 ‘칙칙한’ 맑스를 찾아갈 이유는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맑스 답사를 하게 된 데는 크게 세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ㅂ이라는 학교 선배 때문이었습니다. 학진의 지원으로 1년간 영국 옥스포드에서 포닥을 밟기 위해 떠나가 되었고, 그 환송회 자리였던가요, 은근히 압력을 가하더군요. “영국까지 갔는데, 맑스 무덤 정도는 보고 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이십년이 넘게 사회주의운동사를 붙들고 있는 애정을 생각해보니 쉽게 부탁을 뿌리칠 수가 없더군요.

 

하지만 그뿐이었다면 바빴다는 핑계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두번째 계기는 옥스포드에서 만난 ㄱ이라는 유학생이었습니다.

 

80년대의 마지막 학번인 그와는 전공이 유사한 덕에 자주 술자리를 가졌는데, 어느 술자리에선가 맑스의 무덤뿐 아니라 맑스가 살던 집까지 가본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가겠다면 가이드를 하겠다는 제의까지 포함해서요.

 

옥스포드에 오기 전에 런던에서 석사를 했던 그는, 자신의 전공이외에도 예술 분야까지 포괄하는 넓은 관심의 영역을 가지고 있었고, 그 한쪽에 맑스가 있었습니다. 어느 술자리에선가 그러더군요, “지금 유럽을 보면, 맑스를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고요.

 

세번째 계기 역시 옥스포드였습니다. 북한 국적의 ㅂ이라는 재일교포를 만났습니다. 제주도가 원적인 그는, 왜 북한 국적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일본에게 역사적 채무감을 느끼게 하고 싶어서”라고 하더군요.

 

국적 때문에 국립 동경대가 아닌 사립 와세다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즉 국적 때문에 실질적인 피해를 입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체제에 대한 충성심은 없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북한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충성도가 약하다는 것은 그가 한국 최고의 기업인 ㅅ전자에 입사하려 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민족학교를 다녔던 이력은 버릴 수 없었는지 영국에 와서 해야 할 일로 유명한 동화인 곰 푸(Pooh)의 탄생지와 함께 맑스 무덤 방문을 꼽고 있었습니다.

 

이상 세가지 계기가 얽혀 맑스 답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간 곳은 맑스가 자본론을 썼던 대영도서관입니다. 사진 1이지요. 정확히 말하면 舊 대영도서관입니다. 지금은 대영박물관 안에 舊 열람실의 형태로 보존되고 있지요.

 

(사진1)



 

맑스가 자본론을 쓰고 있을 당시는 이런 서가배열은 아니었을 겁니다. 19세기 중반의 사진이 있다면 정확히 어떤 구조였는지 알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의 구조 자체도 멋스럽습니다.

사진 2는 그곳의 좌석입니다. 맑스 관련 자료를 뒤지다 보면 맑스가 자본론을 쓰면서 주로 이용했던 좌석번호가 명기되어 있는 것이 있지요. G7인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일종의 지정석 비슷하게 사용했다고 쓰여 있지요.

 

(사진2)



 

사서의 말에 따르면, 사실이 아니라더군요. 지정석이 있었을 리 없지요. 아마 지금 우리처럼 빈 좌석이 있으면 앉아서 공부를 했을 겁니다. 사진 속의 좌석 어디쯤에 한번쯤은 앉았겠지요.

(사진3)



 

사진 3은 대영박물관 입구 바로 앞에 위치한 선술집, 영국식으로 말하면 펍(Pub)입니다. 이 펍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맑스가 공부에 지친 머리를 쉬기 위해 가끔 들러 맥주를 마셨답니다. 위치가 도서관 바로 앞이었던 까닭에, 다시 이 펍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한 당시 영국의 저명인사들이 자주 이용했다고 하더군요.

금년 초 KBS의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런던에 와 있는 황석영을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도 대영박물관 열람실을 본 후 이 펍에 들러 진행자와 함께 맥주를 한잔 하며 맑스 이야기를 하더군요. 저도 겸사겸사해서 들어가려 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었는지 문을 열지 않았더군요.

 

다음으로 소호(Soho) 딘 거리(Dean Street) 28번지에 있는 맑스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사진 4이지요. 사진 5는 맑스가 살았다는 표식입니다. 영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유명인들의 사적을 표시하더군요.

 

(사진 4)



 

(사진 5)



 

소호는 지금도 런던의 중심지이고, 맑스가 살았을 적도 그랬답니다. 간단히 말하면, 집값이 아주 비쌌다는 것이지요. 런던의 차이나타운도 이곳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가이드로 나선 ㄱ은 맑스가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고 말하더군요.

잘 아시다시피, 소호에서 맑스의 삶은 아주 비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자식의 관을 살 돈 조차 없어, 이웃에게 돈을 빌렸던 곳이 바로 소호이지요. 맑스는 이 집을 陋屋(hovel)이라고 불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ㄱ은 소호시절의 맑스가 반드시 가난하지만은 않았다고 하더군요. 엥겔스의 지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뉴욕 트리뷴의 특파원 월급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비싼 소호의 집값을 감당할 정도는 되었다는 것이지요. ㄱ은 그 때문에 맑스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맑스는 빵만을 원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소호에 살면서 맑스는 당시 부흥하는 부르조아지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그들이 마시는 포도주를 동경하게 되었고, 따라서 맑스는 노동자들에게 빵뿐 아니라 자신이 소호에서 보았던 포도주가 동반된 그런 삶을 주고 싶어 했다는 것이지요. 맑스에 대해 저보다 해박한 분들의 고견을 기대해봅니다.

 

(사진 6)



 

사진 6 역시 같은 소호의 맑스 집입니다. 재미있어서 찍었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집의 간판이 보입니까? 읽어보세요. ‘Sunset Strip’입니다.

스트립쇼를 하는 곳이지요. 역시 ㄱ의 말에 의하면, 굉장히 유명한 곳이랍니다. 잠시 안을 들여다 보니 바의 형태더군요. 아마 술을 마시면서 쇼를 보는 곳인 모양입니다. 역시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본격적인 영업은 하지 않고 있더군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상품화를 비판한 맑스, 그의 집, 그리고 바로 그 옆에 그 상품화의 상징인 스트립쇼장. 하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맑스 무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맑스의 무덤은 지하철(Tube)을 타고 아치웨이(Archway)역에서 내려 이십여 분 거리에 있는 하이게이트 묘지(Highgate Cemetery)의 동쪽(East cemetery)에 있습니다. 역부터 걸어 올라가는 길이 런던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언덕길이라 힘이 들었습니다.

 

(사진 7)



 

(사진 8)



 

사진 7은 맑스의 무덤, 정확히 말하면 맑스의 가족 무덤입니다. 사진 8은 머리부분만 찍은 것입니다.

간 날이 토요일이어서인지, 그러니까 휴일이어서인지 묘지를 찾는 사람들이 드물게나마 있더군요. 그중 대부분이 맑스 무덤을 향했습니다. ㄱ의 말이 동구권 사람들인 것 같다더군요.
우리 앞에서 맑스 무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어느 할아버지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동구권 사람이라면, 그리고 맑스의 무덤을 찾을 정도의 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회주의의 아버지인 맑스 앞에서, 그리고 사회주의가 무너진 현실 앞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기는 어려웠겠지요.

 

(사진 9)



 

하지만 맑스의 무덤을 보면서 그 동구권에 의해 맑스가 우상화된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더군요. 사진 9가 그것입니다. 맑스 무덤을 다른 무덤들과 비교해보십시오. 맑스의 그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큰지.

맑스의 사후,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원으로 다른 무덤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던 무덤을 이렇게 크게 만들었다는군요. 그들의 애정은 이해를 하지만, 이렇게 비대한 맑스의 무덤을 보면서 그 애정이 아름다워 보이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맑스 무덤의 백미는 사진 10입니다. 무슨 사진 같습니까?

 

(사진 10)



 

맑스의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를 들어가려는데 어떤 여자가 가로막더군요. 영국 여자답지 않게 화장이 요란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입장료를 내라더군요. 자그마치 개인당 2파운드. 사진을 찍을 경우는 1파운드를 추가해야한다더군요.

할 수 없이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가려는데, 마침 그 여자가 앉아 있는 의자 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찍었습니다. 맑스 관련 자료더군요.
맑스 무덤을 찾으면서 일행끼리 이런 이야기들 주고받고 있었지요, 사회주의 국가가 무너진 지금이야말로 맑스가 재평가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냐는.

 

맑스가 묻힌 공동묘지를 빠져나오면서 이렇게 결론지었지요. 맑스는 재평가되고 있다, ‘맑스도 돈이 된다’는 재평가. 사람의 상품화를 비판한 맑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품화되어 영국 어느 여인네를 먹여 살리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