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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15남북공동선언 5주년과 남북관계전망

BoardLang.text_date 2005.10.21 작성자 정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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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15 남북공동선언 5주년과 남북관계 전망


                                         정창현(현대사분과)

1. 6ㆍ15남북공동선언 5주년과 남북대화 재개

올해는 사문화돼 가던 2000년 6ㆍ15남북공동선언을 다시 확인하고 이를 전면적으로 이행하는 발판을 마련한 한 해가 될 것 같다. 북한은 제4차 6자회담이 성과를 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8월 14~17일 서울에서 열린 8ㆍ15민족대축전 기간에 당국ㆍ민간대표단을 파견해 현충원과 국회 방문, 청와대 예방 등 파격행보를 거듭하며 남북관계의 수준을 2000년 6ㆍ15공동선언 발표 시점으로 끌어올렸다. 노무현 정부도 남북관계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기 위해 한반도 평화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1년간 굳게 닫혔던 남북 당국간 대화가 재개된 것은 지난 6월 평양에서 열린 6ㆍ15민족대축전과 ‘6ㆍ17 김정일 국방위원장-정동영 통일부장관 면담’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대화 중단이 길었던 만큼 ‘6ㆍ17면담’과 6월 21일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는 그동안 밀린 남북간의 현안들이 한꺼번에 논의ㆍ합의됐다. 북한은 ‘6ㆍ17면담’에서 김 위원장이 약속한 대로 7월 말에는 6자회담에 복귀했다.



(자료출처 : 세계일보)

 

북한이 남북 당국간 대화와 6자회담에 복귀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깔려있다.

가장 큰 이유는 광복 60주년과 6ㆍ15공동선언 5주년을 맞아 6ㆍ15와 8ㆍ15남북공동행사를 성대하고 원만하게 진행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5월에 열린 남북장관급회담 재개를 위한 남북 실무대표 접촉에서 똑같이 남측 정부대표단의 평양 6ㆍ15남북공동행사 참가문제가 제안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다른 하나의 이유로는 북미간의 갈등이 더욱 고조되고 있던 한반도 정세를 들 수 있다. 미국은 올해 들어 북한의 ‘핵 실험설‘유엔안보리 회부’ 등을 공론화하며 대북 정치공세와 경제압박을 강화하고 있었다. 더구나 한미공조와 남북협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고 있는 노무현 정부는 북미 간의 핵 대결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북한은 남북대화 재개를 통해 노무현 정부가 한미공조로 기우는 것을 막고,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남북 협력을 모색하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북한 내부의 검열과 조직 개편이 마무리된 점을 들 수 있다. 북한은 지난해 7월 김일성 전 주석 10주기 조문 불허, 탈북자 대량 입국 등을 이유로 남북 장관급회담과 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중단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정의 이면에는 2004년에 진행되고 있던 조선노동당의 개편과 검열을 통한 체제 단속 등의 요인이 작용했다. ‘선군시대’에 맞는 기구 개편과 남북교류의 확대, 경제개혁의 추진 등으로 인한 사상 무장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대남창구의 조직과 인력 변화는 단기적으로 남북대화와 교류에 ‘속도조절’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남북교류를 혼선 없이 추진할 수 있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북한의 남북대화 재개는 북미관계를 중심으로, 남북관계를 보조축으로 사고하던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남북관계를 기본축으로 사고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의 대외정책에서 벗어나 ‘우리민족끼리’를 내세운 전면적인 민족대단결에 나선 것이다.

북한의 이 같은 기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17일 전격 만남에서 잘 드러났다. 이 만남에서 김 위원장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로 6ㆍ15 5주년 민족통일축전의 의미가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한 순간에 불식시키면서 남북관계와 동북아정세를 변화시키려는 구상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김 위원장은 우선 그동안 남쪽이 장관급회담이나 여러 차원의 남북대화에서 논란이 됐던 사안에 대해 전적으로 수용했다. 김 위원장은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북은 핵무기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장성급 군사회담을 재개해 서해지역의 긴장과 군사적 긴장을 해소할 뜻을 표명했다.

둘째, 김 위원장은 “미국이 북을 인정, 존중하려는 뜻이 확고하다면” 미국이 제기하고 있는 ‘북핵의혹’을 전면적으로 해소할 용의가 있음을 강조했다. 특히 미국이 미심쩍어 하던 부분, 즉 NPT 복귀,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의 국제적 사찰 수용과 검증 수용 의사를 밝혔다. 6월 21~24일 서울에서 열린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은 김 위원장의 발언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남북간에 많은 합의를 이끌어냈다.

‘6ㆍ17면담’과 15차 장관급회담의 성공으로 남북관계는 2000년 남북이 합의한 6ㆍ15공동선언을 전면적으로 이행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각종 합의를 이행할 장관급회담,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남북적십자회담 등과 이를 위한 각종 실무회담이 연말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2. 6ㆍ15, 8ㆍ15남북공동행사와 ‘우리민족끼리’

6ㆍ15통일대축전의 성과를 이어받아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남북해외대표들이 서울에서 함께 한 ‘자주 평화 통일을 위한 8ㆍ15 민족대축전’은 남북의 화해와 협력 분위기가 최고조에 도달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8ㆍ15민족대축전은 분단 60주년을 맞아 남북 당국대표단과 남북해외 민간대표단이 서울에서 처음으로 함께 한 행사였다. 북한은 8ㆍ15민족대축전에 당국대표단을 파견해 민간행사 참여는 물론 역사상 처음으로 당국간 광복절 공동 기념행사를 갖는 등 별도의 일정을 진행했다. 특히 14일 개막식에 앞서 북한 당국ㆍ민간대표단 32명이 국립 현충원을 전격 방문, 참배한 것은 분단 60년을 마감하고 민족화해와 공조의 시대를 열어가려는 북한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북한대표단의 현충원 참배는 남북 화해에 대한 전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시켰으며, 이후 남북관계가 금단의 벽을 뛰어넘어 질적으로 도약하는 초석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자료출처 : 세계일보)

 

또한 북한 대표단의 국회방문과 김대중 전대통령 병문안, 이해찬 총리주최 만찬 참가, 노무현 대통령 예방은 현충원 참배 못지않은 과감한 행보로 평가된다. 남북이 7ㆍ4공동성명 이후 상호 실체를 인정했다고 하지만 당국과 민간 대표단이 직접 상대측의 입법기관을 공식 방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8ㆍ15민족대축전은 ‘미완의 광복’을 완성시키기 위한 유일한 길이 조국통일임을 다시 확인했다. 8ㆍ15민족대축전 참가자들은 ‘7천만 겨레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통해 “분단의 벽을 허물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룩하자. 진정한 광복은 분단의 극복을 통해 비로소 완성 된다”고 선언했다.

이번 8ㆍ15대회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주와 ‘우리민족끼리’에 대해 남쪽이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동영 장관은 개막식 축하연설에서 “당당한 자존의 나라, 자주의 나라, 통일의 나라”를 제시하며 “본격적으로 분단과 정전상태를 청산하고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 김기남 단장도 “우리 민족끼리의 리념”을 제시하며 “가슴 아픈 민족적 불행은 더 이상 지속되지 말아야 하며 우리 겨레 스스로가 통일의 새 력사로 바꾸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대남관계자들은 ‘남북공조’와 ‘우리민족끼리’를 구별해서 사용한다. 남북공조는 주로 경제와 사회 문화교류를 의미하는 데 반해 ‘우리민족끼리’는 그 보다 한차원 높은 통일로 가는 근본원칙으로 사고하는듯하다. 북한은 ‘우리민족끼리’ 정신을 남한 당국이 전면적으로 수용해야 정상회담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내비치고 있다.

전체적으로 평양 6ㆍ15통일대축전으로 남북관계가 ‘제2의 6ㆍ15시대’로 진입했다면 서울 8ㆍ15민족대축전은 제 2의 6ㆍ15시대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대세가 되었음을 대중적으로 확인한 행사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3. 6자회담과 한반도평화체제

남북의 화해와 협력 분위기가 높아가고 있지만 북한은 여전히 남한 당국과 미국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특히 북한은 8월 하순부터 9월 초에 진행되는 을지포커스렌즈(UFL) 훈련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8월 12일 4차 실무대표회담에서 남과 북이 백두산에서 개최키로 합의한 제3차 장성급 군사회담 개최 일정에 합의하는 데 실패한 것도 이 사안이 가장 걸림돌이 됐다.

을지포커스렌즈(UFL)훈련에 대해 북한은 여전히 대화의 상대방인 북한을 반대하는 ‘대규모의 핵전쟁 연습’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만 북한은 과거와 달리 을지포커스렌즈 훈련에도 불구하고 ‘8ㆍ15대회’에 당국대표단을 파견함으로써 남북관계를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확고함을 보여주었다. 8ㆍ15민족대축전에 참석한 북한 관계자들은 “남측이 현재의 분위기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남북관계는 앞으로 획기적 진전이 있을 것”이라며 “6자회담과 남북대화는 별개의 문제”라고 밝혀, 북핵문제의 진전 상황과 관계없이 남북대화가 진행될 것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6자회담의 성공을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되지 않는다면 남북관계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이 한반도의 객관적 상황이다.



(자료출처 : 세계일보)

 

그런 점에서 8월 초에 휴회된 6자회담이 앞으로 어떤 성과를 낼지 주목된다. 6자회담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 해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안정된 한반도평화체제와 북미관계 정상화의 전망을 여는 회담이 될 것이다. 현재 6자회담에서는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권과 핵 포기의 범위를 둘러싸고 공방을 벌이고 있다.

평화적 핵 이용권과 관련, 북한은 국제사회가 인정한 주권국가의 권리인 만큼 포기할 수 없으며 미국은 그간 합의를 수없이 파기해 온 전례를 볼 때 현 시점에선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평화적 핵 이용권과 관련, 자국의 여건을 감안할 때 수력과 화력도 아닌 원자력 발전만이 전력 수요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또 핵 포기의 조건으로는 핵 보유가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자위적 억제력이었던 만큼 그 위협이 사라져야 하며, 핵위협 제거의 제도적 담보가 마련되고 남한에 대한 핵우산 철회, 동시사찰이 이뤄져야 한다고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현재의 모든 핵 포기에 동의한다면 미래의 평화적 핵 이용권에 대해 양보할 수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문제는 북한의 ‘에너지 주권’과 연계돼 있어 북한의 양보가 쉽지 않은 사안이다.

또 체제 안전보장과 관련해서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김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북미간의 양자 안전보장보다 다자틀의 안전보장이 더 굳고 실효성이 있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다자 안전보장의 유효성에 대해서 일리가 있다”며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김 위원장은 “미국의 입장이 아직 확고하지 못한 것 같고 미국이 시간을 끌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발언에는 안정된 틀의 체제보장이 중요하지, 그것의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 협상상대를 존중하는 상호신뢰 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6자회담 논의를 통해 볼 때 한반도 평화보장체제는 결국 북미 또는 남ㆍ북ㆍ미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다른 6자회담 참가국들이 이를 보장하는 형태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4. 역사의 교훈과 향후 과제

오는 10월에는 경의선, 동해선의 철도와 도로 연결이 완료된다. 개성과 백두산 관광도 가시화되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남북간에는 해로, 육로, 항로가 모두 열리게 된다. 분단 60년 만에 끊겼던 혈맥이 완전히 뚫리는 셈이다. 특히 제10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에 대해 다시 한번 합의함으로써 6ㆍ15남북공동선언의 합의사안 중 제2항의 통일방안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만이 향후 과제로 남게 됐다.

 

물론 낙관적인 시나리오로 대로 남북대화와 교류가 이어질 경우 2000년 6월 이후 남북관계가 최고점에 도달하고 2차 남북정상회담의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6ㆍ17면담’에서도 김 위원장은 정상회담에 대해 “적절한 때가 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려면 노무현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고, 그만큼 중대한 결단을 필요로 하는 사안들이 많다. 특히 북미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2차 정상회담이 추진될 경우 남과 북은 모두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될 것이다. 북한은 이미 2000년과 2002년 두 차례 남북공조 아래 북미관계정상화를 추진했으나 부시 행정부의 등장과 ‘북핵 의혹’ 제기로 좌절한 경험을 갖고 있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이 다시 열리면 6ㆍ15남북공동선언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데, 남한의 정치ㆍ사회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생각을 내비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6ㆍ15남북공동선언 제2항의 통일방안 논의의 진전과 연결돼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 또는 다른 지역의 2차 정상회담은 북미관계와 남한의 정치 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히 과거의 교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2000년대 들어 동북아 정세의 흐름을 보면 주도권을 잡기 위한 각국의 각축이 상당히 치열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1999년 후반기부터 한반도 주변정세는 남북의 정세 주도 → 남북정상회담 → 북미 외교정상화 합의로 이어졌으나, 2001년 부시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북미관계가 다시 긴장관계로 돌아서고 한미공조가 강화되는 흐름으로 돌아갔다.

2002년 남북은 다시 정세의 주도권 회복을 위해 남의 특사 파견 → 북의 7ㆍ1사회주의경제관리개선조치 단행 → 신의주 특구 발표 → 북일정상회담 → 북의 부산아시안게임 참가 등 일련의 유화조치가 이어졌다. 그러나 2002년 10월 중국이 신의주특구 행정장관을 구속하고, 미국이 다시 북핵문제를 제기하면서 주도권을 다시 미국과 중국으로 넘어갔다.

2003년부터 2004년 6월까지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북ㆍ중ㆍ미 3자회담과 3차례 6자회담이 열려 다자구도가 형성됐으나 북미ㆍ남북관계가 냉각되면서 동북아 정세는 남한의 발언권이 약해지고 북미간의 직접 대결 구도가 뚜렷해 졌다.

2002년 10월에 북핵문제가 다시 터졌을 때 노무현 정부는 핵과 경협 문제의 연계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인 끝에 연계정책을 채택했다. 북핵 해결 우선주의인 셈이다. 사실 이때부터 남북대화가 우여곡절을 겪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올해 들어 노무현 정부가 북미 간에 ‘촉진자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정세의 주도권을 어느 정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계속되는 ‘위기설’과 긴장고조를 막고 남북대화의 지속을 위해서는 남과 북 당국이 북핵문제와 남북경협을 분리해 북핵문제는 6자회담에서, 남북현안 및 경협은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논의하는 전략적 기조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북핵 문제는 장기적인 문제이고 남북협력과 경협은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분리ㆍ추진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 8ㆍ15민족대축전을 두고 극우보수진영이 반대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북한 대표단의 현충원 방문과 남한 국민들의 환영 열기에 묻혀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소수세력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남북경협의 확대, 통일방안 논의의 본격화 등에 따라 남남갈등은 여전히 남북관계 진전에 걸림돌로 남아 있다. 평화군축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효율적인 홍보, 통일교육의 강화, 민간 통일운동의 확대 등을 통해 내부 갈등을 줄이려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한반도는 바야흐로 6자회담, 남북대화의 진전으로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동북아 질서를 만들어가는 대전환의 시점을 맞고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남북의 주도적 역할이 절실한 상황에서 역사학자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