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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국가’ 일본과 야스쿠니 신사 (1)

BoardLang.text_date 2006.09.17 작성자 이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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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국가’ 일본과 야스쿠니 신사 (1)


 이기훈(근대 2분과)


1. 나카소네와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는 일본 총리치고는 참 특이한 인물이다. 할아버지(영화 「청연」에 등장하는 바로 그 우정성 장관 고이즈미 마타지로)대부터 유명한 정치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4살 연하의 재벌가 상속녀와 결혼했다가 4년만에 이혼한 독신남이다. 아들 고타로는 꽤 인기있는 연기자다. 경력이나 외모(헤어스타일부터 범상치 않다)도 그렇지만 고이즈미는 평의원 시절부터 여러모로 튀는 언행으로 동료 정치인들로부터는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또 그것이 고이즈미의 무기이기도 해서 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어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대중의 호감을 사는지 잘 알고, 기존 정계의 서열이나 관행에 구애받지 않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는 점에서 일본에서 보기 힘든 유형의 정치가다.
고이즈미는 총리가 되기 이전부터 공약으로 야스쿠니(靖國) 신사의 공식참배를 내걸었고, 총리가 되자 실행에 옮겼다. 당연히 한국과 중국 등은 강력히 항의했지만,  지금까지 해마다 총리로서 공식적인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참배를 계속해왔다. 그러는 동안 한-일, 중-일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고, 최근에는 정상회담조차 거부당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물론 일본 국내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고려한 것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일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일본 내에서도 여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고이즈미와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정치인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총리다. 도쿄 제국대학 졸업, 고등문관시험  합격, 내무성 관료, 정계 입문, 장관, 수상 이후 자민당 파벌 지도자 등 일본 정치엘리트들이 거치는 길을 모조리 모아놓은 듯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 나카소네다(고이즈미는 사립 게이오대학 출신). 관행이나 전통과 파벌 간의 타협을 중시하는 튀지 않는 정치스타일도 고이즈미와는 정반대이다. 나카소네는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아직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주목할 만한 발언을 하고 있다. 바로 얼마 전에도 일본이 핵무장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요지의 정책제언을 해서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이 나카소네가 최근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에 대해서 몇번 딴지를 걸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1985년 2차대전 이후 처음 공식적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던 총리가 나카소네였고, 그 또한 이 문제로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게서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고이즈미가 여러 부담과 비판을 무릅쓰고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나카소네가 이를 비판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일본의 총리가 공식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일본이 아시아 주변 나라들과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와 아주 긴밀히 연괄될 수 밖에 없다. 최근 야스쿠니 신사를 둘러싼 논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의 전후 대외전략의 변화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일본 대외전략의 변화


(1) 나카소네와 ‘전후 총결산’


2차 대전 이후 일본은 헌법 9조에서 “전쟁이나 무력을 통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하게 이를 포기”한다고 명시하고, 무기수출 3원칙, 비핵3원칙 등을 내세웠다. 그렇다고 해서 전후 일본을 평화국가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일본은 전세계적인 냉전구도에서 가장 이익을 많이 누린 나라였다. 양대 진영의 대립 와중에서 한국과 중국이 전쟁으로 고통을 겪는 동안, 일본은 미군에 기지를 제공하고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면서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 점을 들어 전후 일본을 “기지국가”라 하기도 한다. 1970년대까지 일본의 외교적 관심사는 철저히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입장에서 아시아와 관계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1980년대부터였다. 1980년대 일본경제는 전성기를 누렸다. 자본의 해외진출이 크게 늘어나서 일부 재벌들이 경기침체에 허덕이던 미국의 유수한 기업과 부동산을 사들이자, 미국에서 제2의 진주만 공습이라는 소리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일본자본이 가장 적극적으로 진출한 것은 아시아 지역으로 직간접적인 투자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이렇다 보니 이전처럼 미국의 뒤만 따르는 외교정책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스스로도 경제대국의 지위에 걸맞는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해야 했고, 국제 사회도 일본에 대해 더 많은 역할을 요구하였다. 일본은 국제기구에 대한 지원과 아시아 지역에 대한 원조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지원보다 먼저 아시아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신뢰를 얻는 것이 더욱 큰 문제였다.


1982년 총리에 취임한 나카소네는 ‘전후 총결산’을 당시 일본의 주요 과제로 내세웠다. 나카소네는 보수 일본 정계에서도 우익적인 인물이었지만, 일본이 경제력에 걸맞는 국제적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후 총결산’을 통해서 침략과 전쟁에 대한 책임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다음에야 정치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교과서에 ‘근현대사 기술 시 근린국에 배려한다’는 ‘근린제국(近隣諸國)’조항을 집어넣었던 것도, 히로히토 천황이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과거사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것도 다 이 즈음의 일이었다. 1984년에는 나카소네가 직접 일본이 한국과 한국국민에게 다대한 고난을 안겨 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고 잘못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과거사문제에 대한 사과가 한국에만 그쳤던 것은 아니었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지도자들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과거사문제에 대한 일련의 사과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배려’의 차원이었을 뿐, 실제로 제국주의 일본의 과거사를 반성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과 중국의 반발로 한번에 그치기는 했지만, 나카소네는 1985년 야스쿠니 신사를 총리로서는 최초로 공식참배하였던 것이다.


(2) ‘잃어버린 10년’과 보통국가론의 등장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급격한 팽창은 도처에서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거품’이 걷히면서 은행과 대기업이 잇달아 도산하였고 긴 장기불황이 시작되었다. 위기는 경제불황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정치에서는 자민당 1당 집권의 55년체제가 해체되면서 불안정한 상태가 시작되었다. 잇달아 터져나온 정치스캔들로 정치권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고, ‘주식회사 일본’을 이끌어온 관료제의 효율성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길이 모아졌다. 사회적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대중들 사이에서 내셔널리즘의 정서가 확산되었고 정치가나 언론인들 중에서는 이런 심리에 편승하려는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국제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1990년대는 냉전이 붕괴되는 시점이었지만, 표면적으로 ‘평화국가’를 표방하던 일본은 이를 실감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냉전체제가 보장했던 체제의 정체성과 안정성이 흔들리면서 일본의 국가적 정체성을 둘러싼 혼돈이 심해졌다. 특히 걸프전에 130억달러라는 막대한 전비를 부담하였지만 국제사회로부터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무임승차라는 소리만 듣게 되자 나카소네식 외교전략 자체의 효율성이 의심받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보통국가론’이 등장하였다. 1993년 당시 자유당 당수 오자와 이치로는 《일본개조론》이라는 책에서 일본이 국제사회에 적극 참여하고 군사적 지원을 포함하여 필요한 모든 조치를 자발적으로 실행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자와는 국제연합으로 대표되는 ‘국제사회’에서의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였지만, 이후 등장하는 보통국가론의 핵심은 실제로 집단적 자위권, 미국과의 동맹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어느 경우에나 이들의 주장은 평화헌법 하에서 일본은 보통국가가 아니었으며, 이제는 ‘보통국가’로 전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본이 적극적인 안보정책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일본은 미군에게 기지를 제공하는 것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방위분담에 나서야 하며 헌법 9조의 개헌도 고려해야 한다. 이제 보통국가론은 이론이나 제언의 차원을 넘어섰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자위대가 해외에 파병된 것은 물론이고, 1999년 「주변사태법」과 2003년 ‘유사법제’ 관련 3개 법안(「무력공격사태 대처법안」, 「자위대법 개정안」, 「안전보장회의  설치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일본의 군사적 대응태세는 한층 강화되었다.


‘보통국가’로의 전환을 군국주의의 부활이라고 바로 단정할 수는 없다. 보통국가론은 대부분 미국과 동맹 강화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노골적으로 단독 군사행동을 상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과거 일본의 침략마저도 ‘보통국가’가 정상적인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불가피한 현상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군국주의의 부활은 기우가 아닐 수도 있다. 따라서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보통국가’로의 행보와 관련되어서도 더욱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음에는 야스쿠니 신사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