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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귤, 강북 탱자

BoardLang.text_date 2011.09.16 작성자 지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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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귤, 강북 탱자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반북과 멸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민주주의를 유보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이비 민주주의이다."

 

지수걸(근대사분과)


  

1. 교육과정 날치기 개악사건의 전말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 8월 9일에 2011년 사회과 교육과정’(제 2011-361호)을 고시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교과부는 심의과정에 참여한 관련 위원들과 아무런 협의도 하지 않은 채 독단으로 초등학교 ‘사회’, 중학교 ‘역사’, 고등학교 ‘한국사’ 교육과정에 들어 있는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모두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하여 고시하였다. 심의과정에 참여한 위원들의 항의에 따르면,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직한 ‘역사교육과정 개발 정책 연구위원회(위원장 오수창 서울대 교수)’ 위원 가운데 24명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 의견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개악을 감행했다고 한다.


  한국역사연구회 등 30여 개가 넘는 관련 학회들은 이런 날치기 개악에 반대하여 지난 8월 25일 「교과부는 ‘자유민주주의’ 관련 교육과정 ‘고시’를 폐기하라」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자 날치기를 주도했거나 찬성하는 이들은 온갖 언론매체를 통해 한목소리로 “자유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은 민중민주주의자들이거나 북한식 인민민주주의자들이다”라는 막말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뉴라이트 계열 학술단체인 한국현대사학회 회장 권희영(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은 “(좌파 인사들이) 여태까지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인민민주주의를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한 측면이 있다”고 하면서 “수식어가 없는 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급진민주주의 등 좌파적 개념도 모두 포괄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자유민주주의로 못박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국민일보>> 쿠키뉴스) 게다가 한국현대사학회의 교과서위원장이자 뉴라이트 계열의 교원단체인 자유교육연합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이명희 교수(공주대 역사교육과)는 ‘헌법 정신’이나 ‘세계적 석학의 말’까지 인용하며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심화된 높은 단계의 특성”이라 강변했다.(<<조선일보>> 시론) 이런 주장들을 접하면서, 필자는 문득 안자(晏子)의 ‘강남 귤, 강북 탱자’(橘化爲枳)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림 1> 역사교과서 (ⓒ 오마이뉴스)

2.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리버럴데모크라시’와 다르다.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가 한국에 건너와서 반북·멸공주의가 되었다는 건 우리 현대사를 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짐짓 모른 척하며, ‘민주주의 이론의 세계적 권위자’를 들먹이며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심화된 높은 단계의 특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회수(淮水)가 아니라 태평양을 건너와 탱자가 되어 버린지 이미 오래인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여전히 ‘숙성한 귤’이라 우기는 뉴라이트들의 저의가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뉴라이트들의 자유민주주의에 관한 궤변들은 그동안 너무도 자주 보아온 뉴라이트의 자가당착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리버럴 데모크라시(Liberal democracy)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종의 색깔론적 정치구호, 요컨대 반북멸공주의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국의 반북 단체들이 조직명칭을 정할 때 ‘자유’라는 수식어를 선호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자유수호국민운동, 자유시민연대, 자유교육연합, 자유총연맹, 자유선진당, 자유아시아방송 등이 그러하다. 이런 단체의 홈페이지를 가보면, 이름만 조금씩 다를 뿐이지 모두가 형제자매 단체임을 금방 알수 있다. 과거의 독재정권이나 반공보수단체들이 애용하는 ‘자유’라는 말은 프리덤이나 리버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좀 더 예를 들면 ‘자유대한’이나 ‘자유중국’, ‘자유월남’ 또는 ‘자유세계’나 ‘자유진영’이라는 말과 유사한 맥락의 구호들일 뿐이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만 더 소개하면, 자유수호국민운동이라는 단체는 자신의 단체 로고 위에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하는 그날까지…”라는 말을 새겨넣었는데, 이런 점들은 이들 단체가 다른 무엇보다 멸공통일과 친북좌파 척결을 목적으로 한 조직임을 잘 보여준다. 2009년 초에 창립된 위 사단법인의 조직 목적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유지·발전을 위해 범국민적 애국운동을 실천하고, 국민의 안보의식  제고와 국가 선진화 및 민주화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필자도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나 인민공화국 실험은 철저히 실패했다고 본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고 있는 세습정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오로지 ‘반북’과 ‘멸공’만이 목적이자 목표였던 이승만이나 박정희식 자유민주주의나 한국식 민주주의도 실패했다고 보아야 옳다.

이번의 교육과정 개악을 주도한 ‘뉴라이트’들은 ‘뉴라이트 전국연합’이라는 조직을 출범시키면서 자신들의 노선이 올드라이트들과 다름을 분명히 밝혔다.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이들의 선언을 직접 인용하면 자신들은 올드라이트 즉 “해방 직후 국제공산주의의 위협과 남북한 좌익세력의 방해 속에서 나라를 건국했던 세력”이기는 하나 “반공 절대주의에 빠져, 반공이라는 이름 하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했던 세력”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추측건대, 자신들을 ‘신우익’이라 부르지 않고 이른바 ‘뉴라이트’라 영어로 호명한 것도 기존의 보수우익과 자신들을 차별화하기 위한 전략이라 보인다. 이런 차별화 전략이 진정성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뉴라이트는 교육과정을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리버럴 데모크라시’로 고쳐 써야 옳았을 것이다.

3. 논쟁을 제대로 하려면 뉴라이트들은 현실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리버럴 데모크라시를 옹호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 성립 이래 뉴라이트들의 약진이 눈부시다. 얼마 전에 있었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파동>이나 이번의 <교육과정 개악 파동>은 뉴라이트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임이 분명하다. 그동안 독재정부와 보수우익들은 이른바 기억투쟁(역사투쟁) 과정에서 늘 수세를 면치 못했다. 독재정부와 보수우익들은 반공과 반북을 명분으로 저질러 왔던 각종 국가폭력사건들을 숨기는 데 급급해 왔다. 4월과 5월만 되면 독재정권은 군인과 경찰을 동원하여 기억투쟁을 막는 데 급급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과거사청산 작업이 급물살을 타면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되었다. 그러자 독재정권과 보수우익들은 전술을 바꾸었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현대사학회가 도발한 이번 사건은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화는 물론이고 민주화운동의 성과마저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다고 보여진다. 지난번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책을 통해서도 드러났듯이,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이번의 개악사건을 야기한 것은 한국의 현실 민주주의, 즉 자유민주주의는 민주화운동의 성과가 아니라 이승만이나 박정희 독재정권, 또는 보수우익들의 공헌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반북·멸공주의), 예를 들면 박정희식 ‘한국적 민주주의’(10월유신)가 민주화운동의 산물이 아니라는 주장은 백번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 리버럴 데모크라시가 어느 정도 발전한 것도 결코 독재정권이나 보수우익의 공헌이 아니다. 이런 지적에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토론을 하지 말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이 세계인의 관심을 끌면서 한국의 산업화는 물론이고 민주화 과정을 설명할때도 ‘강한 국가’(strong state: 발전국가, 개발국가, 혹은 조합주의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주장이 여럿 제기된바 있는데, 뉴라이트의 자유민주주의론은 이보다 훨씬 더 책략적이다. 시비와 선악을 떠나 말하면 오히려 올드라이트들의 주장이 훨씬더 솔찍하고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

신문지상을 통해 여러 역사교사들이 우려를 표시하였듯이, 우리의 국가와 사회가 지향해야할 민주주의가 현실의 한국적 자유민주주의라 할 경우 4·19의거나 6월민주항쟁 등 민주화운동의 의미는 퇴색되는 반면 이승만이나 박정희식 ‘민주주의’만 그 의미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 농민들의 피와 땀의 결실인 경제성장은 물론이고 민주주의의 성과까지도 독점하려는 저들의 욕심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하기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아버지는 늘 “하면 된다”라는 말을 좋아한 모양인데, 그래도 정말 이건 아니다. 뉴라이트도 자신의 창립선언에서 강조했듯이, 올드라이트 즉 한국의 현실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는 무관한 ‘반공 절대주의’이자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했던 반민주주의’(뉴라이트전국연합 선언 참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4. 우리 헌법에 명시된 민주주의가 진짜 리버럴데모크라시일까? 

  우리 헌법이 한국식 자유민주주의, 혹은 미국식 리버럴 데모크라시를 국시(國是)로 천명했다는 뉴라이트들의 주장도 제고의 여지가 많은 주장임을 기억해야 한다. 여러 학술단체들의 성명서에도 보이듯이, 우리나라의 ‘헌법’이나 ‘민주화운동명예회복법’에서 사용하고 있는 ‘the basic free and democratic order’는 좁은 의미의 ’자유민주주의‘에 해당하는 ‘liberal-democratic’'이 아니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라고 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관련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미군정(美軍政)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제헌의회가 제헌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우리 헌법의 기본이념으로 공식화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삼균주의(三均主義)에 기초한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1), 또는 유럽식(대륙식) 사회민주주의를 수용한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가령, 우리 헌법에는 ‘사회권 보장’과 관련한 경제 조항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는데, 미국식 리버럴 데모크라시 개념에는 이런 내용이 거의 없다. 게다가 제헌헌법은 3·1운동이나 임시정부운동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전문을 통해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임시정부가 ‘임시헌장’(1920)이나 ‘건국강령’을 통해 강조한 민주주의도 우리 현실의 자유민주주의가 결코 아니다. 우리 헌법에서 명시된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민주주의를 용인하고 포괄하는 열린 개념이다. 따라서 헌법정신에 따라 교육과정의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고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는 주장은 근거 없는 역사왜곡일 뿐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뉴라이트들이 왜 자유민주주의라는 올드라이트들의 정치이념을 변호하려 하는 것인지, 그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고 본다. 이번 사태는 어찌 보면 저들이 본디 올드라이트와 하나도 다를바 없는 올드라이트의 선전대이자 별동대일 뿐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일 뿐이다. 이는 한국현대사학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이나 한국현대사학회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리버럴 데모크라시와 관련한 자신들의 주장이 나름대로 진정성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뉴라이트 전국연합이 창립선언에서 밝힌 것처럼 자신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올드라이트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분명히 다른 것임을 밝히고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색깔논쟁을 넘어 학문적인 논쟁이 가능할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민주주의에 대한 사유수준을 높이려면 더욱더 논쟁을 많이 해야 한다. 하지만 논쟁을 제대로 하려면 뉴라이트는 올드라이트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진짜 리버럴 데모크라시를 들고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 논쟁의 생산성이 높아질수 있다. 한국사회의 ‘자유’ 개념은 일종의 블랙홀이다. 한국의 ‘자유’는 어떤 것과 짝을 맺든 그 색깔론적 위력 때문에 모든 것들을 변색·변질시키고 만다. 반북과 멸공이 일종의 ‘정언명령’처럼 강조되기 때문이다.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만나면서 민주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췌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한국에서 ‘자유’, 혹은 ‘자유민주주의’와 관련한 논쟁은 필연적으로 색깔논쟁으로 비화될 수밖에 없다. 리버럴 데모크라시와 관련한 논쟁은 반북·멸공이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가 쟁점이 되어야 한다.

5. 민주주의 교육,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사회교과던 역사교과던 민주주의를 잘 가르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 대한 수준 높은 이해가 결여될 경우 우리의 민주주의 발전은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행의 교육기본법도 민주주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997년에 제정된 ‘교육기본법’은 한국의 국민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교육을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보다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점은 현 정부 들어 민주화나 민주화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교육과정에 반영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7년에 개정된 ‘제7차교육과정’, 그리고 2007년 ‘개정교육과정’은 우리 교육이 추구해야할 인간상으로 “전인적 성장의 기반 위에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 “기초 능력을 토대로 창의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 “폭넓은 교양을 바탕으로 진로를 개척하는 사람”,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의 토대 위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 “민주 시민 의식을 기초로 공동체의 발전에 공헌하는 사람” 등을 강조했다. 그러나 2009년에 개정된 새교육과정은 이를 4가지로 줄이면서, ‘민주시민의식'과 관련한 조항을 삭제하였다. 그런 뒤 새교육과정은 “세계와 소통하는 시민으로서 배려와 나눔의 정신으로 공동체 발전에 참여하는 사람”을 추가하였다. 이런 사실은 현정부가 민주주의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나눔과 배려의 정신으로 공동체 발전에 참여하는 사람, 참으로 시의적절하고 좋은 말이다. 하지만 민주시민의식과 관련 조항을 삭제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조처라 할수 있다.

필자도 미국식 리버럴데모크라시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육과정에서 열린 개념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한국적 자유민주주의 또는 리버럴 데모크라시가 배타적으로 강조되는 경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운동사는 물론이고 미래의 민주주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진전된 논의가 불가능해진다. 일종의 ‘정통론(正統論)’처럼 자유민주주의나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수호를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그 순간부터 오랜 역사과정에서 논의되고 실천된 여러 형태와 내용의 민주주의나 민주화운동 자체는 부정의 대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누차 강조했듯이 사전적으로 이해하면 리버럴 데모크라시는 개인의 정치사회적 자유와 자율, 예를 들면 학문사상의 ‘자유’ 등을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정치사상이다. 하지만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반북과 멸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민주주의를 유보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이비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6. 민주주의에 대한 사유 능력


  우리의 교육과정도 강조하고 있듯이,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나 인민공화국 실험은 확실히 실패했다. 역사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그 실패와 비극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그래서 더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에 배타적 특권을 부여하면서, 개화사상이 등장한 이래 이 땅의 지성이나 우국지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치열하게 실험하고 실천한 모든 민주주주의 운동의 역사를 부정적이거나 미성숙한 것으로 돌리는 태도는 옳지 않다.

뉴라이트나 이전의 올드라이트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정통론’은 역사교육의 경우 민주주의 발전사 교육을 어렵게 만드는 독소조항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국 땅에서 풍찬노숙하며 상해임시정부를 만들 때 선열들이 상상한 민주공화국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해방 직후 한 민족 구성원들이 건설하고자 했던 민주공화국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의 국민교육은 이런 역사적 경험들을 실시구시적으로 잘 가르쳐야 한다. 어떤 민주주의가 바람직한지, 그것을 위해 앞으로 어떠 노력을 해야할지를 질문하고 답을 찾게 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와 민주공화국에 대한 수준 높은 사유 능력을 길러 줄 수 있다.

우리의 현실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시키려면 다양한 민주주의간의 경합과 경쟁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김용옥은 한국사상사(<<도올심득 동경대전>> 수록 논문)를 정리하면서 ‘民主主義’를 넘어선 ‘民本主義’를 주창한 바 있으며, 수유+너머라는 학술단체는 공산주의를 넘어선 '코뮨주의'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런 주장들은 서양에서 기원한 ‘민주주의론’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들로서 주목된다. 물론 이런 주장들이 국민적 동의를 획득하려면 많은 대화와 토론, 실험과 실천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주장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수 있다.

이에 반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은 새로울 것도, 생산적일 것도 없다. 하도 노골적인지라 이를 모를 사람들도 드물 터이나, 저들이 깔아놓은 판에서 논쟁을 하면 할수록 올가미는 더욱 조여지고, 수렁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현재의 우리 상황은 어쩌면 어떤 민주주의를 지향해야할 것인가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최소 요건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더 고민해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교과부는 날치기 개악을 시도를 즉각 중단하고 사회과나 역사과 교육과정을 백년대계를 내다본다는 마음가짐으로 새롭게 개편해야 한다. 꼭 그렇게 해야만 내일의 대한민국은 ‘그때의 대한민국’보다 훨씬더 희망이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