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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고려 청자 여행

BoardLang.text_date 2013.01.19 작성자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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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고려 청자 여행



박종진(중세1분과)

 

  지난 가을은 청자여행의 시간이었다. 그 중심에 청자를 주제로 한 대학원수업이 있었다. 수업주제를 청자로 정한 것은 2011년 12월부터 한국 중세 고고학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되면서, 친근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청자에 대한 기초지식이라도 살펴보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중세1분과에서 여름에 충북대학교 이종민 선생님을 초청하여 청자 특강을 한 것과 2011년 9월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과 함께 해남군 초기 청자 요지를 답사했던 것도 최근 내가 청자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데 힘을 더하였다. 특히 지난 가을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청자특별전을 열어 국내외의 명품과 다양한 자료를 보여주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지난 가을 청자와 관련된 주요 연구성과를 읽고, 전시된 청자와 도록의 사진을 보면서, 또 부안과 강진 답사를 다니면서 행복하게 청자와 만났다. 그중에서 11월 중순 1박 2일로 다녀온 강진 청자 답사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 즐거운 여정을 여기에 간단히 소개한다.


  우리 일행은 11월 16일 이른 아침 강진으로 가는 고속버스 첫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날은 올 지난해 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씨여서 모두 한겨울 복장으로 무장을 하고 나타났는데, 막상 강진에 도착하니 날씨는 생각보다 포근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호남평야를 지나 강진읍에 도착한 것은 점심 때 쯤이었다. 서둘러 점심을 먹고, 예약해 놓은 차를 빌려 타고 청자박물관이 있는 대구면 사당리로 출발하였다. 중간에 잠시 해변에 차를 세우고 강진만과 강진만 뒤로 보이는 주작산 덕룡산을 바라 보면서 청자의 고장 강진군에 온 것을 실감하였다.


1시 20분 쯤 강진청자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는 전시된 청자 뿐 아니라 대구면 사당리와 용운리에서 출토된 청자편을 볼 예정이었다. 강진군에서 운영하는 강진청자박물관은 전시, 연구, 교육 등을 담당하는 일반 박물관과는 달리 전통청자의 재현과 판매도 할 뿐아니라 청자축제도 담당하는 사업소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관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직원은 행정직 공무원이었고 연구직인 학예사는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고려 제일의 청자 생산지인 강진에 있는 청자박물관의 현실이다. 최소한 지방 국립박물관 수준의 운영을 상상하였던 나로서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의 운영으로는 강진청자박물관이 고려청자 연구의 중심이 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사진 1] 청자박물관 전경  강진청자박물관은 대구면 사당리 여계산 아래 있다. [사진 10]을 보면 박물관 자리에도 청자요지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박종진)


 

  박물관에 도착하여 먼저 전통식으로 재현해 놓은 가마를 비롯하여 청자 제작 작업실을 간단히 본 후에 박물관의 배려로 박물관 1층 수장고에서 용운리 63호와 사당리 7호 10호 가마에서 출토된 청자조각을 직접 보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 가마는 제작시기로 보아 대체로 초기, 중기, 후기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이 가마들 출토품을 직접 보는 것은 우리 일행에게 시기별 청자의 변화를 직접 느끼게 하는 좋은 공부가 되었다.


[사진 2]
용운리63호 청자 조각  
초기 청자의 특징 중의 하나인 굽 폭이 넓은 해무리굽이다. (ⓒ박종진)




[사진 3-1ㆍ2]
사당리7호 청자 조각 
음각으로 앵무문이 새겨진 청자 조각이다. 굽 폭은 좁아졌고, 굽 받침은 규석받침이다. (ⓒ박종진)




[사진 4-1ㆍ2]
사당리10호 청자 조각 
청자의 질이 많이 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박종진)


  첫날 청자박물관 전체를 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여 1층전시실만 보고 2층 전시실은 다음날 다시 들러서 보기로 하고 전시실 밖으로 나와서 박물관 뜰에 보존해 놓은 용운리 10호 가마와 사당리 41호 가마를 답사하였다. 고려청자 가마는 크게 두 계통으로 나뉜다. 하나는 청자 제작 초기의 가마로 중서부 지방에 주로 분포하는 벽돌가마이고, 다른 하나는 중기이후의 진흙가마이다. 벽돌로 만든 초기 가마의 대표적인 것이 순화라는 중국 연호가 새겨진 초기 청자가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배천 원산리 가마와 시흥 방산동 가마, 용인 서리 가마인데, 이들 가마는 대개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특히 용인 서리의 가마는 중대형인 벽돌가마에서 소형의 진흙가마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 매우 중요한 가마이다. 이 벽돌가마는 대체로 중국의 기술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벽돌로 만든 대형 가마들이 주로 중서부 지방에 분포하는 반면 진흙으로 만든 작은 가마들은 주로 남부지방에 분포하고, 이 가마들은 이전부터 있었던 도기가마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보고 있다. 청자박물관에 복원 전시된 용운리 9호와 사당리 41호 가마는 대표적인 소형 진흙가마이다.



[사진 5] 중서부 지방의 대표적인 초기 벽돌가마  현재 청자연구에서 가장 커다란 논쟁거리 가 우리 역사에서 처음 청자를 만든 시기에 대한 것인데, 그 논쟁 가운데 청자가마의 형태와 변화에 대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사진 6] 사당리 41호 가마  강진청자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진흙가마이다. 이 가마에는 몇 차례 고쳐 만든 흔적이 있다. (ⓒ박종진 )

  이어서 박물관 뒤쪽 여계산 기슭의 사당리 43호 발굴현장에 들렀다. 사당리 43호는 당시 막 발굴을 끝내고 현장 설명회를 남긴 상태였는데 현장은 보호 장비로 덮혀 있었고, 주말이라 발굴 관계자들이 없어서 아쉽게도 내부를 볼 수 없었다. 발굴 현장 주변에 가마에서 나온 갑발 등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사진 7] 사당리 43호 발굴현장  2012년 6월부터 11월까지 발굴 조사결과, 이곳에서는 청자 가마 1기와 폐기장 1곳, 유물 구덩이 2곳, 숯가마 1기 등의 유구가 조사됐으며 폐기된 많은 양의 청자와 갑발, 도침(도지미) 등 다양한 요도구가 확인되었다. 특히 초벌칸이 최초로 완벽하게 확인된 것이 이번 조사의 가장 큰 학술적 성과로 꼽히고 있다. (ⓒ박종진)

  청자 생산은 채취한 점토에서 불순물을 제거하여 고운 점토를 만드는 수비(水飛), 점토에서 기포를 없애고 수분 함량을 고르게 잘 반죽하는 연토(鍊土), 원하는 그릇 모양을 만드는 성형, 성형된 그릇에 문양을 넣는 정형, 800도 정도에서 굽는 초벌구이, 유약을 입히는 시유, 1200-1300도의 고온에서 굽는 재벌구이의 과정을 거치는데, 사당리 43호에는 초벌칸이 확인된 가마로 확인되었다.



[사진 8] 사당리 43호의 초벌구이 조각과 갑발 조각  (ⓒ박종진)

  발굴현장을 답사한 후 잠시 이후 일정을 논의한 후박물관 뒷산인 여계산(311.3 미터)에 올라 대구면 일대를 조망하기로 하였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보기와 달리 길이 가팔라서 오르기 아주 힘들었다. 특히 학생들은 한 겨울옷을 입고 온데다 본래 계획에도 없던 등산을 하게 되어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올라가기는 매우 힘들었지만 정상 근처에서 강진만과 사당리 일대를 내려다 보는 순간 올라올 때의 피로는 싹 사라졌다.



[사진 9] 여계산에서 내려다 본 대구면과 강진만  산 바로 아래가 사당리이고, 대구천 건너편(남쪽)이 수동리이다. (ⓒ박종진)


[사진 10] 강진 청자 요지의 위치  대구면에 수많은 청자 가마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해강도자미술관 · 전라남도 강진군, 1992『강진청자요지 지표조사보고서 제1권: 강진의 청자요지』)

  산을 내려오는 것으로 그 날의 일정을 마쳤다. 날은 어두워지고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강진읍에 가서 저녁을 먹고 일찍 쉬었다.


  다음 날은 아주 일찍 숙소를 나와 아침을 먹고 바로 대구면 쪽으로 출발하였다. 먼저 사당리 남쪽을 흐르는 대구천 남쪽으로 가서 전날 올랐던 여계산을 바라보았다. 여계산과 그 아래 펼쳐진 사당리가 이전에 청자 요지가 가장 많이 분포하였던 곳이다. 그곳 남쪽의 마량항은 아름다운 항구로 알려져 있어서 내친 김에 차를 마량항까지 몰았다. 마량항에서 마량성을 잠시 보고 해안도로를 따라 이른 아침 강진만 풍광을 잠시 즐겼다. 바람은 조금 불었지만 햇살은 좋았다.


  이어서 대구천 상류에 있는 용운리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사당리 동북쪽의 용운리 역시 많은 청자 요지가 있던 곳인데, 특히 용운리 9호, 10호 가마는 청자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대구천 옆에 난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용운리 항동 마을 전에 당전제라는 저수지가 나타나는데 용운리 9호 10호 가마는 당전제 좌우 기슭에 뭍혀 있을 것이다. 용운리 항동 마을을 지나 대구천 상류에 있는 정수사라는 절에 먼저 들렀다. 정수사는 대웅전만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산 속의 조그만 절이지만 이전에는 제법 사세가 컸다고 한다. 절 한 쪽에는 뜰 앞에 도자기로 만든 탑이 서있는 도조사(陶祖祀)라는 건물이 있다. 도조사는 예전에 강진에서 도자기를 만들었던 이름 없는 도공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강진에서 매년 가을 청자문화축제를 할 때에는 이곳에서 제사를 드린다고 한다.



[사진 11] 대구천  대구면을 관통하는 조그만 내이다. 대구천을 좌우로 고려 청자 요지가 있다. 흔히 대구천을 청자운반과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나는 대구천이 청자생산에 필요한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박종진)

  정수사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당전제 동쪽의 대구면 용운리 항동마을에 들렀다. 차를 세우고 길 옆의 밭을 살피자 여기저기서 청자파편이 발견되었다. 해강도자미술관이 강진군과 함께 용운리에서 지표조사를 한 것이 1991년에서 1992년이다. 그 때 주요한 유물들은 모두 수습하였을 것이고, 그 후 지금까지 20여년 동안 밭을 일구었을 텐데 아직도 밭에는 청자 파편과 갑발 조각 등이 널려있었다. 이곳이 청자 생산지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는 증거이다. 이곳 밭과 그 아래 저수지 둑 근처에서 청자 조각과 갑발 조각 등을 주우며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비가 온 후라 신발은 진흙투성이가 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청자에 대한 살아있는 공부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사당리로 돌아왔다.



[사진 12] 항동마을 밭에서 주운 청자 조각과 갑발 조각 (ⓒ박종진)

  다시 청자박물관 전시실에 들어갔다. 1층 한 쪽에서는 이곳에 소장된 명품을 전시하고 있었고 또 한쪽에서는 현재 발굴 중인 사당리 43호에서 출토된 요도구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2층이 상설전시실인데, 이곳이 다른 박물관과 다른 점은 주요 청자 요지에서 발견한 청자 파조각을 청자 가마별로 따로 정리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청자의 생산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청자 굽과 굽 받침, 문양 등을 가마별로 충분히 살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볼 것은 많고 시간은 정해져있다. 처음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강진에서 청자답사를 충분히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갔다. 박물관 전시실을 나와 박물관 동쪽의 당저마을 쪽으로 향하자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아마 이곳은 청자축제를 할 때 쓰는 일종의 행사장일 것이다. 물론 이곳도 예전에 청자 요지가 있던 곳일 것이다. 이곳 공터를 보면서 문득 포구를 메워 만든 법성포의 넓은 주차장이 생각났다. 법성포 역시 굴비 축제를 위해 넓은 행사장이 필요했으리라.


[사진 13] 여계산 기슭에서 발견한 요도구들  이 근처에도 청자가마가 있었을 것이다. (ⓒ박종진)

  당저마을 입구에 서있는 커다란 푸조나무를 보고 박물관 쪽으로 돌아오다가 박물관 뒤쪽의 여계산 기슭에서 도침, 갑발 조각 등 요도구를 발견하였다. 최근 발굴한 사당리 43호 가마의 위치를 보건대 당시 청자 요지들은 여계산 기슭을 돌아가며 설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여계산 기슭에서 요도구가 발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1박 2일의 짧은 답사를 하면서 중요한 청자 유적지가 훼손되거나 방치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나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 일대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청자판매장에 들러 도록을 몇 권 산 후 대구면을 떠났다. 조만간 다시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대구면에서 강진읍으로 가는 길에 칠량면 삼흥리 요지에 들르기로 하였다. 칠량면은 고려시기에 칠량소가 있던 곳이다. 삼흥리 요지는 초기 청자요지로 알려져 있는데,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현장에 가니 삼흥저수지 북쪽 숲 기슭에 오래되어 글씨도 보이지 않은 간판만이 하나 서있었다. 이것이 현재 고려청자 유적지 관리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곳은 발굴을 한 곳이기 때문에 간판이라도 서 있는 것이다. 대부분 지표조사만 한 수많은 청자 요지는 위치조차 표시되지 않고 사라져 가고 있다.



[사진 14] 삼흥리 요지 표지판  표지판이 오래되어 글씨를 한 자도 읽을 수가 없다. 네비게이션 덕분에 이곳이 삼흥리 요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종진)

  강진읍에 와서 점심을 먹은 후에 강진읍의 영랑유적지에 잠시 들렀다. 처음 들르는 곳이다. 강진에는 학생들 답사 때마다 들르지만 사학과 답사에서는 늘 뒷전으로 밀렸기 때문이다. 영랑 유적지 답사를 마치고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1박 2일의 알뜰한 답사였다. 그러나 시간에 쫓긴 아쉬운 답사였다. 그나만 차를 빌릴 수 있었기에 짧은 기간에 여기저기를 갈 수 있었다.



[사진15] 함께 답사한 사람들 (ⓒ박종진)


서울로 가는 버스에 앉아 다시 생각해 본다.


고려시기 아니 우리 역사에서 청자 생산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

또 고려청자의 생산에서 강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