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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1950년대 상하이 도시 기층 사회와 국가권력

BoardLang.text_date 2017.02.27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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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상하이 도시 기층 사회와 국가권력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단위와 거민위원회



박철현(국민대학교 중국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




한국역사연구회 근대도시공간연구반은 <Redian>에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박철현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http://www.redian.org/archive/107811)


연재를 시작하며

이 연재는 ‘한국역사연구회 공간사반’의 연구자들이 공부내용을 대중적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연구자들은 역사, 문학, 건축, 도시계획, 사회 등 다양한 전공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 여러 도시들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오고 있다. 도시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 도시가 속한 사회와 국가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의 행위자들과 그들이 둘러싼 구조들이 상호작용이 펼쳐지는 장소이다. 동아시아에는 전통시대부터 존재했던 도시들과 19세기 중반 이후 본격화된 제국주의 세력의 동아시아 침략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형성된 도시들이 혼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상호작용이 전개되는 양상들도 독특한 형태로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연재는 이러한 ‘양상들’을 중심으로 1개월에 2편씩 게재될 것이다. 독자들의 많은 성원과 질정을 바란다. – 필자들을 대표하여 박철현




 

공산당과 도시

기존에 중국 공산당은 농촌을 근거지로 삼고 농민을 조직하여 역량을 강화하여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해 들어가는(農村包圍城市)’ 노선이었지만, 국공내전에서의 일련의 승리를 통해서 혁명의 승리가 목전에 다가온 1949년 3월, 공작 중심을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서 ‘도시가 농촌을 지도하는(城市領導農村)’ 노선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다.

이후 공산당의 도시공작 기본방침은 “자본주의, 제국주의, 소비와 향략의 도시”를 “노동자와 생산의 도시”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이 방침은 ‘사회주의 도시’를 건설한다는 이념이 지도했지만, 장기간의 전쟁과 혼란으로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당시 공업생산능력을 갖춘 도시를 ‘접관(接管: 접수관리)’하여 생산력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현실인식에 기초해있었다.

문제는 공산당이 1949년 10월 건국 이전에 특히 동북(東北: 만주)지역에서의 승리과정에서 도시접관의 경험을 갖추고 있었지만, 전체 혁명과정에서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 우한(武漢) 등과 같이 공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를 장악하고 관리해본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따라 공산당은 건국 이후에도 기존 국민당(國民黨) 정권 시기 행정인원과 전문가들 상당 부분을 현직에 두고 보수를 지급하면서 도시를 관리하도록 한다. 이들을 유용인원(留用人員)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정수준의 지식과 학력을 갖춘 공산당원을 배치하여 유용인원으로부터 도시관리의 노하우를 학습하게 한다. 1950년대 중후반 전개된 각종 정치사회운동을 통해서 이 유용인원들은 제거되고, 그 자리에 훈련된 공산당 조직과 당원이 배치되어, 도시정부는 공산당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된다.

하지만, 공산당에게 있어서 도시관리를 위한 인력자원 부족의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민당과 제국주의의 침략과 통치의 유산은 물론 2천년 봉건사회의 유산이 켜켜이 쌓여있는 도시 기층 사회 공간의 권력구조를 전환시키는 문제였다. 그 어려움은 인민해방군이 상하이 전역을 점령한 지 3년이 지난 1952년 상하이시 전체 공산당원의 숫자는 2만4293명이었지만, 기층사회 공간인 가도(街道)의 당원숫자는 불과 40명이라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즉 실제로 압도적인 다수의 도시민이 주민으로서 거주 생활하는 기층공간은 여전히 ‘현지인(本地人)’의 세계였고, 기층사회에 대한 공산당의 영향력은 매우 취약했다는 것이다.

이에 공산당은 주민의 거주생활 공간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통해서 도시 기층사회를 조직해나갔다.

상하이는 과거나 지금이나 중국 최대의 경제도시로, 1949년 건국 시기 이미 인구가 500만 명을 돌파했고, 19세기 중반 아편전쟁 이후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이 조계(租界)를 설치하고 ‘치외법권(治外法權)’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근대적 공업기업과 소속 노동자들이 있는 거대도시였다. 따라서 당시 공산당에게 있어서 상하이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소비와 향략의 도시”의 상징이었고, 이곳의 공업기업을 장악하여 생산력을 회복하여 “노동자와 생산의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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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로 진주하고 있는 인민해방군 1949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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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상하이 와이탄 조계지역




단위체제와 ‘공인신촌’

상하이 기층사회 주민의 거주생활 공간은 두 가지 방식으로 조직된다. 바로 단위(單位)와 거민위원회(居民委員會: 주민위원회)이다.

단위는 국가기관단위(중앙과 지방의 당과 정부 조직), 기업단위(각종 형태의 기업), 사업단위(교육, 과학, 문화, 위생 분야의 각종 조직)로 나뉜다. 단위는 정치적 기능과 사회경제적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그 내부에 설치된 공산당 조직을 통해서 소속 직원을 지배하며, 식량 등 기본적인 필수품의 배급과 월급의 지급은 물론 교육, 문화, 보험, 의료, 거주 등 사실상 거의 모든 복지를 제공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단위가 소속 직원에게 제공하는 공유제(公有制) 주택이다.

이 공유제 주택은 단위 소속 주민에게만 배타적으로 제공되며, 주민은 무상과 다름없는 매우 저렴한 사용료만 내고,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있었다. 인구밀도가 매우 높고 상품으로서의 주택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회주의 시기 중국 도시에서 이러한 공유제 주택은 주민에게 있어서 안정적인 거주 생활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또한 공유제 주택은 기본적으로 단위의 직장(예를 들어, 공장)과 동일한 부지 내에 조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그 동일한 단위 소속 주민들은 동일한 주택단지에서 거주 생활하게 된다. 규모와 업종에 따른 단위들 사이의 차이 때문에, 단위라는 채널을 통해서만 주민에게 배분되는 각종 사회경제적 복지도 서로 달랐다. 예를 들어서, 울산 현대자동차공장 면적의 3배에 가까운 부지를 차지하고, 몇 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기업인 ‘창춘 제1자동차 공장(長春第一汽車製造廠)’이 제공하는 복지와 중소기업이 제공하는 복지는 큰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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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걷고 있는 여성노동자 1953년




그 결과 동일한 단위의 공유제 주택에서 거주 생활하는 주민들은 외부에 대해서 강한 배타성과 폐쇄성이 생겨났고, 주민들 사이에는 독특한 ‘연대의식’에 기초한 정체성이 생겨났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단위 내부에 설치된 공산당 조직이 동일한 부지 내에 있는 공유제 주택에 거주 생활하는 직원이자 주민을 ‘지도부-간부-적극분자-일반노동자’의 위계구조를 따라서 직접 조직 동원하는 방식으로 도시 기층사회를 조직했다는 점이다. 또한 개별 단위는 상급 단위의 정치적 행정적 통제를 받았다. 예를 들어, 시(市) 국유기업이자 기업단위인 ‘상하이 제1피혁창(第一皮革廠)’은 행정적으로는 양푸구(楊浦區)정부 화학공업국(化學工業局)를 통해, 상하이시(市)정부 화학공업부(部)의 통제를 받는다.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양푸구 정부와 상하이시 정부에 각각 설치된 공산당 조직의 통제를 받았다.

1952년 5월 완공된 상하이시 푸퉈구(普陀區) 차오양신촌(曹楊新村)은 중국 최초의 ‘공인신신촌(工人新村)’이다. 차오양신촌은 입주 당시 상하이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선진노동자”, “모범노동자”, 당 간부 위주로 주민을 모집함으로써, 공산당이 “사회주의 중국의 행복한 노동자 생활”의 상징으로 체제의 우월성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소재로 대대적으로 소개되었으며, 이후 전국의 거의 모든 도시들에서 공인신촌(혹은 공인촌)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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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상하이 차오양신촌




차오양신촌은 조계시기부터 노동자와 빈민의 판자촌이 밀집해있던 푸퉈구 일부지역을 시정부가 수용하여 노동자 주택을 건설한 것이다. 공산당은 기존 노동자들은 “제국주의와 국민당 반동파”의 통치 하에서 매우 열악한 판자촌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상하수도시설을 비롯한 각종 기초시설이 전무하기 때문에 하루빨리 “생산력을 진일보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물질생활 조건을 제고”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1949~78년 기간 상하이에는 모두 256개의 공인신촌이 건설되는데, 그 중 86%인 196개가 1951~58년 기간에 집중된다. 1953~57년이 사회주의적 중공업화가 본격화된 ‘제1차 5년 계획(第一個五年計劃)’ 기간이므로, 공산당은 이 시기 중공업화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노동자 주택을 대량 건설하여 도시 기층사회 공간을 조직해나갔고, 이러한 노동자 주택은 ‘단위체제’의 핵심적인 구성요소이자 주민에 대한 국가의 정치적 지배의 장소와 기제로서 작동하였다.

리롱과 ‘거민위원회’

한편 거민위원회는 ‘가거제(街居制)’의 구성요소이다. 가거제란 가도판사처(街道辦事處)와 거민위원회 체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가도판사처는 구정부의 파출기관이자 중국 도시의 최말단 행정기구를 가리킨다. 가도판사처는 관할지역에서 단위에 속하지 않는 주민들을 조직하는 거민위원회를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가도판사처 내부에는 공산당 공작위원회(工作委員會)가 설치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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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상하이 홍차오 거민위원회 위원들




앞서 단위(=직장)가 중앙으로부터 관련 업무부문의 지휘계통을 따라서 수직적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행정적 위계구조의 최말단에서 단위 소속 주민을 조직했다면, 거민위원회는 ‘공장, 상점, 기관, 학교’ 등과 같은 단위에 소속되지 않는 도시 주민을 조직했다. 거민위원회는 명목상 도시 주민의 기층 ‘자치조직’으로 책임자인 주임(主任)과 부(副)주임 및 위원(委員)들로 구성되고, 주민에게 필요한 복지를 제공하는 한편, 당과 국가의 정책을 선전하면서 주민을 동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업무부문이 설치되어있다. 거민위원회에는 공산당 지부(支部)가 설치되어 가도판사처 공산당 공작위원회의 지휘를 받았으며, 거민위원회의 주임과 부주임은 주민들이 선출하지만 전직(專職)인 이들의 월급은 가도판사처에서 지급하고, 공산당원인 경우가 많아서, 사실상 자치는 명목적인 것에 그쳤다.

1949년 5월 27일 인민해방군은 상하이 전역을 점령한다. 하지만 도시관리의 경험이 없는 공산당이 맞닥뜨린 것은 “뿔뿔이 흩어진 모래”와 같은 도시사회였다. ‘노동자, 기관공작자, 점원, 직원, 교원, 공상업주, 학생’ 등과 같은 상하이 주민들은 공장, 상점, 기관, 학교 등과 같은 단위에 소속되었고, 따라서 공산당과 정부는 이러한 단위를 통해서 소속 주민들을 조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정된 직장(=단위)에 소속되어있지 않은 ‘가정부녀, 노점상, 자유직업자, 독립노동자, 실업자’와 ‘아동, 장애인, 노인’은 1952년 상하이 전체 주민 중 60%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공산당이 상하이를 점령한 지 3년이 지난 1952년에도 단위를 통해서 조직을 할 수 있는 상하이 주민은 전체의 40%에 불과했던 것이다.

문제는 단위를 통해서 조직할 수 없는 60%의 주민이 거주하는 곳은 ‘리롱(里弄)’이라고 불리는 전통주택 밀집지역이었다는 사실이다. 리롱은 19세기 중반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피해서 각지에서 상하이로 모여든 난민들이 살기 시작한 주택으로 ‘스쿠먼(石庫門)’이라고 하는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스쿠먼들이 서로 밀집되어 더 큰 거주지역을 형성하면, 이것을 리롱이라고 불렀다. 리롱은 건국 이전은 물론 건국 이후에도 상당수 상하이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던 도시 기층사회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리롱은 공산당이 상하이를 장악하기 이전에는 ‘보갑제도(保甲制度)’에 의해서 조직되어 있었다. 보갑이란 청(淸)나라 때부터 기층사회를 관리하기 위한 행정제도였는데,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폐지되었다가 1931년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 혁명근거지를 섬멸하기 위해서 부활시켰다. 하지만 상하이는 외국인들이 ‘치외법권’을 누리는 조계의 존재로 인해서 보갑제도를 실행할 수 없었는데,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본이 상하이 전역을 점령하고 사실상 조계가 사라지지자, 보갑제도를 실시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다. 2차 대전 종료 후, 다시 상하이를 장악한 국민당 정부는 보갑제도를 실시하고 주민을 조직해나간다.

하지만 상하이를 점령한 공산당은 주민의 절반 이상이 거주하는 리롱을 장악하기 위한 인력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보갑제도는 폐지하되 국민당 정부 시기 임명된 보갑장(保甲長: 보장+갑장)을 비롯한 기존 보갑요원의 65%를 유용(留用)시켜서 주민을 조직하고자 정책을 취했다.

상하이 주민의 다수가 거주하는 리롱 공간에는 이러한 보갑요원은 물론, 범죄조직, 비밀결사, 종교결사와 같은 전통시대의 비공식 조직이 존재했고, 이들이 리롱 주민들에게 가지는 영향력은 상당했다. 따라서 신생 공산당 정부로서는 이 조직들을 소멸시키고 이들 대신하여 주민을 조직할 기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도시 기층사회의 장악을 위한 핵심적인 과제였다. 공산당은 1950년 6월 성립된 구(區)정부와 파출소를 통해서 기존의 보갑제도를 폐지하고 기층주민을 조직하려고 했으나, 구정부의 민정부(民政部)와 파출소(派出所) 소수 인력만으로는 거대하고 복잡한 리롱의 기존 비공식 조직을 폐지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1950년 10월 8일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결정과 전시체제 돌입은 공산당이 상하이 리롱 공간을 장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산당은 주민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하여 강력한 기층조직의 건설이 긴급한 과제였고, 이를 위해서 ‘동방(冬防: 반혁명진압, 치안강화, 국가재산과 인민생명보호를 위해 겨울철에 이뤄진 防特, 防匪, 防火, 防盜의 약칭)’이라는 대중운동을 시작한다. 우선 시정부 층위에 ‘동방위원회(冬防委員會)’를 설립하고, 구 정부 및 기관, 기업, 학교에도 동방위원회를 설립하고, 노동조합, 학생회 등에는 규찰대를 조직했다. 특히 리롱 주민들은 구정부의 지도 하에 ‘동방복무대(冬防服務隊)’를 조직했다. 바로 이 시기 전국적으로 대중운동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던 ‘진반(鎭反: 鎭壓反革命 반혁명진압)’운동도 동방과 결합하여 공산당이 리롱 주민을 전시체제로 동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1년 시정부는 동방복무대의 기초 위에 리롱 거민위원회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본격적으로 주민을 조직하기 시작하여, 1952년 말에는 전체 리롱의 90%에 거민위원회가 설치된다. 거민위원회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공산당은 단위에 속하지 않는 주민들에게 거민위원회를 통해 일자리와 복지를 제공하는 한편, 기존에 유용된 보갑요원은 물론 각종 “불순분자(민간신앙, 동향조직, 동업조직, 반혁명분자, 봉건세력, 사회치안분자 등)”를 색출하고, 공산당원이나 공산당에 충성하는 인원들로 거민위원회를 재구성한다. 거민위원회를 매개로 리농의 주민에게 복지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여, 이후 펼쳐지는 각종 정치운동에 기층사회 주민을 동원하는 기본적인 틀의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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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상하이 리롱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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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상하이 리롱




 

이후 1958년 ‘중화인민공화국 호구등기조례(戶口登記條例)’가 실시되어, 모든 중국인은 출생지에 따라 농촌호구와 도시호구로 나뉘고, 농민의 도시유입이 엄격히 차단되자, 단위와 거민위원회로 조직된 상하이 기층사회는 상당 수준으로 ‘인구학적 동질성’이 유지되었다. 몇 차례의 정치운동에 의해서 이러한 동질성이 일정하게 무너지는 계기가 생겨나지만, 단위와 거민위원회에 의해서 조직된 도시 기층사회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유지되었다가, 개혁기 국유기업 개혁으로 단위가 해체되고, 호구제도의 이완으로 대량의 농민공이 도시로 유입되는 199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변화되기 시작한다.




 

<참고문헌>

김승욱, 「사회주의 시기 상하이 도시 개조와 공인신촌」, 『역사비평』 117호, 역사비평사, 2016.

日本上海史研究會, 『建國前後の上海』, 硏文出版,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