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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식민지와 판타지아의 사이, 하얼빈

BoardLang.text_date 2017.06.01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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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와 판타지아의 사이, 하얼빈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하얼빈의 근대사


 

한국역사연구회 근대도시공간연구반은 <Redian>에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박준형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http://www.redian.org/archive/110769)


 

박준형(근대사분과)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하얼빈역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탑승한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번 만주행에 앞서 이토는 한국통감직을 사임한 상태였다. 6량 편성 열차의 가장 후미 귀빈차량에 들어선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프체프는 일행에게 러시아군 열병을 제안하였다. 열차에서 내린 이토는 열병식을 마친 후 각국 대표단 및 명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재류일본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분침이 30분을 가리켰을 때 그는 총성과 함께 쓰러졌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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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909년 10월 26일 아침의 하얼빈역. (출처: 海野福壽, 『伊藤博文と韓國倂合』, 靑木書店, 2004, 131쪽)


 

이것은 한국인들이 하얼빈이라는 장소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장면일 것이다. 계속해서 이후의 사건 전개 과정도 함께 따라가 보자.

 

이토 저격 후 “꼬레아 만세”를 외치던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의 신병은 사건 당일 하얼빈 주재 러시아총영사관에서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졌다. 1899년 9월에 체결된 한청조약(韓淸條約)의 제5조에서는 한청 양국 상호간에 영사재판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의 재판권도 본래대로라면 대한제국 영사에게 주어지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 체결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해 재외한국인의 보호 또한 일본영사가 담당하게 됨에 따라, 안중근의 재판은 일본영사를 대신한 뤼순의 관동도독부 법원에서 진행되었다.

 

변호인은 한청조약을 근거로 안중근이 한국형법에 따라 치죄되어야 하지만 한국형법에는 이 사건에 적용할 만한 규정이 없으므로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자신이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적의 포로가 된 상황이라면서 전시국제법에 따라 처우해 줄 것을 요구했다. 법원은 이들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안중근은 사형 선고를 받고 사건 발생 144일 만인 3월 26일 오전 10시에 처형되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사람들이 그다지 궁금해 하지 않는, 하지만 지금의 상식으로는 어색하기만 한 요소들이 군데군데 포함되어 있다. 안중근의 신병 처리 및 재판 과정에서 한청조약이 언급되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하얼빈이 청국 영토였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이야기 속에서 청국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토 히로부미를 맞이했던 것은 청국 군대가 아니라 러시아 군대였으며, 안중근을 체포하여 최초의 조사를 행했던 것 또한 러시아였다. 하얼빈이 러시아의 영토나 식민지가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게다가 안중근이 이송된 뤼순 또한 청국 영토임이 분명할 진데, 일본의 법원이 등장하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이 질문들을 실마리로 하얼빈의 근대사에 다가가 보자.

 

모든 것은 철도에서 시작되었다!


 

위 질문들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러시아의 대외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대외정책의 중심은 남쪽으로 영역을 확대하여 부동항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그를 위해 먼저 흑해로부터 지중해로 빠져나가는 출구 확보가 시도되었는데, 러시아는 영국 · 프랑스와 연합한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하였다(크림 전쟁, 1853∼56). 하지만 이를 만회할 새로운 기회는 머지않아 극동 방면에서 찾아왔다. 1860년의 베이징조약을 통해 청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은 러시아는 최남단의 땅에 군항을 건설하고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톡은 완전한 부동항이 아니었다. 엄동기에 들어서면 한류를 타고 유빙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항구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럽의 러시아 본거지와는 광대한 시베리아 평원을 사이에 두고 있어 교통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가장 확실한 교통 방법은 바닷길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나 영국이 해로의 요소들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마저도 수월하지 않았다. 이에 러시아가 고안해 낸 방법이 바로 시베리아를 관통하는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이었다.

 

시베리아철도는 1891년에 철도의 양단인 쳴랴빈스크와 블라디보스톡에서 동시에 착공되었다. 가장 빨리 개통된 구간은 블라디보스톡에서 하바로프스크에 이르는 우수리철도이다(1894년 완공). 그런데 흑룡강 지역을 답사한 결과 이 지역에서의 철도 부설이 용이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어, 러시아정부 내에서는 청국의 국경을 따라 우회하는 경로 대신 치타와 블라디보스톡 사이를 최단 코스로 연결하는, 다시 말해서 만주의 한복판을 동서로 횡단하는 철도건설계획이 강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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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901년경의 만주. (출처: デぃビッド・ウルフ著/半谷史郞譯, 『ハルビン驛へ』, 講談社, 2014, 6쪽의 지도를 수정)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은 러시아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안겨다 주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청국은 대만 및 요동반도의 할양과 함께 막대한 배상금까지 짊어지게 되었는데, 이때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반도를 반환케 하는 동시에, 차관 공여를 통해 배상금 문제에 숨통을 터 줌으로써 청국에게 은인으로 각인될 수 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러시아는 1896년에 청국과 비밀리에 동맹을 맺고 단축 노선의 건설을 승낙 받았다. 이에 따라 「동청철도의 건설과 경영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실행 주체로서 국책회사인 동청철도주식회사도 설립했다. 이어서 1898년에는 「관동주 조차에 관한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하얼빈에서 뤼순에 이르는 남쪽 지선의 부설권까지 획득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완전한 부동항을 손에 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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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1897년 8월 28일 동청철도 기공식. (출처: 西澤泰彦, 『圖說 「滿洲」 都市物語』, ふくろうの本, 2006, 20쪽)

 

‘점’, ‘선’, ‘면’


 

그런데 철도의 건설은 몇몇 ‘점’들 사이를 ‘선’으로 잇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철도는 원래 선로의 ‘선’과 정거장의 ‘점’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철도가 자국의 주권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는 식민지 등지에 건설되는 경우, 철도운영에 직접 관련되는 시설뿐만 아니라, 종업원이나 가족들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시설인 주택 · 학교 · 병원 등 외에도, 도서관이나 체육시설 등의 건설, 혹은 군대의 주둔지로서의 ‘면’의 확보가 필요하게 된다. 그 유지 · 운영을 위해 주권국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배타적 공간, 즉 치외법권이 설정되는 경우가 많았다(財團法人 滿鐵會,『滿鐵四十年史』, 吉川弘文館, 2007, 37쪽).

 

위의 인용문이 말하듯이, 러시아는 타국의 영토에서 이른바 철도부속지라는 치외법권적 ‘면’을 창출해 냈다. 앞서 언급한 「동청철도 건설과 경영에 관한 조약」의 제6조에서는 철도의 건설과 경영 등에 필요한 토지를 철도회사에 인도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해당 토지, 곧 철도부속지를 사실상의 러시아 영토와 같이 만들기까지는 여러 위법 행위들이 동원되어야만 했다.

 

먼저 조약체결 당시 “회사는 그 토지에 관해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행정권을 갖는다”는 내용을 프랑스어 정본에만 기재하고 중국어본에는 생략함으로써 청국 대표들을 속인 채 철도부속지의 행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또한 위 「조약」에는 청국관헌이 철도부속지 내 치안유지를 담당한다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청국 관헌의 출입 자체를 금지했으며, 나아가 철도와는 수백 미터나 떨어져 있어 관련성을 찾기 어려운 토지들까지 철도부속지라는 명목으로 수용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얼빈은 점차 ‘중국 안의 러시아’로 변해 갔다.

 

계획된 도시, 분할된 공간


 

본래 하얼빈은 쑹화강변의 이름 없는 한촌에 지나지 않았다. 하얼빈이라는 이름도 사실은 1902년에 주민을 대상으로 한 명칭 조사를 통해 정해진 것이었다. 이처럼 신도시였던 하얼빈은 서로 다른 기원을 갖는 네 개의 지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각 지구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려면, 먼저 하얼빈 형성의 출발점인 구 하얼빈 지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얼빈이라는 도시의 건설은 1898년 3월 철도 부설을 위한 선발대가 블라디보스톡을 떠나면서 본격화되었다. 선발대는 쑤이펀허에서 닝구타를 거쳐 아스허에 이르렀는데, 이 일대를 조사한 끝에 소주공장 건물을 구매하여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이곳은 지금의 샹팡(香坊, 러시아어 Staryi Kharbin, 영어 Old Harbin)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후 교회, 은행, 병영, 학교 등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초창기의 시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곳은 쑹화강으로부터 10km 가까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장기적 발전을 꾀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의화단 운동 때 시가의 일부가 소실된 이후로는 급격하게 쇠퇴했다.

 

구 하얼빈을 대신하여 쑹화강 근처 난강(南崗, 러시아어 Novy Gorod, 영어 New Town) 지역에 신시가가 건설되었다. 신시가의 관문인 하얼빈역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는 동청철도가 경영하는 호텔이나 병원이 세워졌고, 역전 광장부터 성 니콜라 성당에 이르는 일직선의 언덕길은 중심도로로서의 역할을 했다. 신시가는 하얼빈의 종교, 문화, 행정의 중심지였다. 동시에 이 지역은 비중국인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기도 했는데, 1913년의 센서스에 따르면 신시가 인구 중 17.3%만이 중국인이었다. 1929년에 이르면 중국인 비율이 47.3%까지 증가했으나, 그럼에도 신시가는 중국인이 소수로 남아 있던 유일한 지구였다.

 

한편 하얼빈의 상업중심지인 다오리(道里, 러시아어 Pristan, 영어 The Wharf)는 난강 북쪽에서부터 쑹화강에 이르는 평원에 위치했다. 하얼빈의 주요 상업시설은 거의 모두 이 지구 내에 자리를 잡았다. 건물 대부분은 유럽풍으로 지어졌는데, 특히 러시아인들에 의해 ‘중국 길’이라고 불린 지금의 쫑양따지에(中央大街) 양편에는 유럽풍 건물들이 즐비하였다. 이곳에서는 중국인과 외국인이 고르게 분포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외국인 우세에서 중국인 우세로 변화해 갔다.

 

마지막으로 다오와이(道外) 혹은 푸자뎬(傳家甸)이라 불린 지구는 중국인들의 거주구역이었다. 거리의 간판은 오직 한자로만 표기되어 있는 등 중국 내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다오와이가 하얼빈의 다른 지구들과 하나의 경제 단위를 이루고 있던 것은 분명하지만, 정치적으로는 1932년까지 중국 관할에 속해 있던 만큼,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하얼빈은 이중 도시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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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하얼빈의 철도부속지와 네 지구. 하늘색 부분이 철도부속지이다. ①은 구 하얼빈의 초기 시가지 모습, ②는 성 니콜라 성당, ③은 다오리의 메인 스트리트인 ‘중국 길’, ④는 중국인 거주구역인 다오와이이다. 다오와이는 철도부속지와 쑹화강 사이에 위치하였다. (출처: 西澤泰彦, 『圖說 「滿洲」 都市物語』, ふくろうの本, 2006, 22쪽의 그림 위에 같은 책 23쪽의 사진과 南滿洲鐵道株式會社 總裁室 情報課, 『滿洲寫眞帖』, 中日文化協會, 1929의 61쪽 사진들, James H. Carter, 『Creating a Chinese Harbin-Nationalism in an International City, 1916-1932』, Cornell University Press, 2002, 18쪽의 사진을 배치하였다.)

 

무관용 속에 소멸되어 간 혼종성(混種性)


 

그런데 1905년 8월 러일전쟁의 강화회의 석상에서, 일본 측 전권 고무라 주타로는 러시아 측 전권 세르게이 비테에게 러시아의 철도부속지 내 행정권 행사는 청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크게 비판했던 일이 있다. 이에 대해 비테는 철도 경영에 필요한 토지를 점유하고 있을 뿐 특허나 특권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고무라는 러시아의 토지 수용이 철도 경영에 필요한 정도를 크게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그를 마치 자국 영토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재차 항의했으나, 비테는 사유지를 어떻게 사용할 지는 소유자인 동청철도주식회사의 자유라고 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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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1929년경의 동북아철도망. 빨갛게 표시된 부분이 일본의 국책회사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철도망이다. (출처: 南滿洲鐵道株式會社 總裁室 情報課, 『滿洲寫眞帖』, 中日文化協會, 1929)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중동철도의 창춘 이남(남만주철도)에서의 권익을 계승한 일본은 한층 더 주권침해적인 권리들을 획득해 갔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청일선후조약(淸日善後條約)」(1905년 12월 조인)을 통해서는 철도부속지 내 주병권(駐兵權)을 공식화했다. 이에 따라 철도 1km에 15명 이내의 병력을 합법적으로 주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러일전쟁 중에 일본군이 자의적으로 부설한 안동 · 펑톈 간 경편철도를 러시아로부터 계승한 기존 권익의 일부로 인정시켰다. 결과적으로 남만주의 철도부속지는 청국에게는 어떤 권리도 없는, 사실상의 일본 식민지로 변해 갔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 이후 중동철도(동청철도의 청조 멸망 후의 명칭)에 대한 영향력마저 잃어 가던 러시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군의 파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듬해 시베리아 파병을 단행한 일본군에 의해 하얼빈을 포함한 철도 전 노선이 점령당했다. 중국은 1923년에 다시금 하얼빈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으나, 중소국교회복조약의 일환으로 철도의 절반을 소련에게 반환하고는 공동으로 운영하는 체제에 들어갔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은 약 4개월 뒤 하얼빈을 재차 점령했다. 이 사건은 하얼빈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변곡점이 되었다. 1923년에 하얼빈에서 태어나 사건 당시 8살에 불과했던 한 러시아인은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중국인의 사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광경을 목격했는데, 그때의 충격은 머릿속 깊이 각인되어 60년 이상이 지난 만년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되었다고 한다. 상호 간의 자제와 균형 위에 유지되었던 하얼빈의 혼종적 성격은 이처럼 무관용적 힘에 의해 소멸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듬해 건립된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의 모토가 ‘오족협화(五族協和)’, 곧 일본인 · 조선인 · 중국인 · 만주인 · 몽고인 상호 간의 협력과 조화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그때까지 침략의 거점 노릇을 하던 철도부속지가 이제는 일원적 지배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이 되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권력은 지배의 바깥을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만주국정부는 1935년 3월에 중동철도를 소련으로부터 매수한 데 이어, 1937년 11월에는 남만주철도의 철도부속지를 철폐하고 행정권을 회수했다.

 

이효석과 「哈爾賓(하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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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하얼빈 쫑양따지에에 위치한 모던 호텔(현 馬疾爾賓館). 모던 호텔은 1913년에 세워진 건축물로, 하얼빈에서 최고의 격식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림 4〉의 ③ 왼쪽 아래에도 호텔의 모습이 보인다. 1940년에 상처 후 어린 자식마저 잃은 이효석은 실의 속에서 떠난 여행길에서 이 호텔에 투숙했다고 전해진다. (출처: 西澤泰彦, 『圖說 「滿洲」 都市物語』, ふくろうの本, 2006, 5쪽)



1940년 10월에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로 유명한 이효석은 「하얼빈」이라는 단편 소설을 『문장』에 발표했다.

소설 속 주인공은 키타이스카야, 그러니까 다오리의 ‘중국 길’에 인접한 호텔에 투숙 중이었다. 주인공은 하얼빈이 처음이 아닌 듯 호텔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거리의 급격한 변화에 애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카바레 ‘판타지아’에서 일하고 있던 백계 러시아의 혼혈 여성인 유우라는 그러한 주인공에게 그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키타이스카야는 이제 벌써 식민지예요. 모든 것이 꿈결같이 지나가 버렸어요.”

유우라가 말한 ‘식민지’적 현실은 두 사람이 호텔 근처를 산책하던 중에 보다 노골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본국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가족들의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려워졌다는 프랑스영사관, 그리고 아예 철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네덜란드영사관과 차례로 마주치게 되었다. 영사관들의 이와 같은 처지는 하얼빈이 더 이상 ‘동방의 파리’가 아님을 여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었다.

주인공은 “무슨 까닭으로 하필 현재의 이 우연한 결정이 있게 되었는가”를 물었다. 그리고 “현재가 이미 우연일 때 현재와 다른 우연의 결정을 생각할 수 없을까”를 재차 물으면서, ‘식민지’가 아닌 현실, 그에게 있어서의 ‘판타지아’를 꿈꾸고자 했다. 그러나 유우라는 꿈꾸기 자체를 거부했다. ‘식민지’ 또한 누군가의 ‘판타지아’였음을 그녀는 알고 있던 것일까. 사람의 힘에 부치는 것에 대한 생각은 자연에 대한 반역과 같다던 그녀가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던 것은 먼 곳의 꿈이 아니라 눈 앞의 죽음이었다.

이효석은 1942년에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 그 즈음, 서로 다른 ‘판타지아’가 만들어내는 불협화음 속에서 하얼빈의 다민족 잡거의 역사적 경험도 최종적으로 무(無)로 돌아갔다.




<참고자료>

南滿洲鐵道株式會社 總裁室 情報課, 『滿洲寫眞帖』, 中日文化協會, 1929
David Wolff, 『To the Harbin Station-The Liberal Alternative in Russian Manchuria, 1898-1914』,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James H. Carter, 『Creating a Chinese Harbin-Nationalism in an International City, 1916-1932』, Cornell University Press, 2002
이태진, 「안중근」 『한국사시민강좌』 30, 2002
海野福壽, 『伊藤博文と韓國倂合』, 靑木書店, 2004.
西澤泰彦, 『圖說 「滿洲」 都市物語』, ふくろうの本, 2006
방민호, 「이효석과 하얼빈」 『현대소설연구』 35, 2007
麻田雅文, 『中東鐵道經營史-ロシアと「滿洲」 1896-1935』, 名古屋大學出版會,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