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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장진과 밀양, 두 마을 이야기 : 국책사업 그늘에 가린 ‘마을’의 역사

BoardLang.text_date 2018.03.25 작성자 양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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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장진과 밀양, 두 마을 이야기


국책사업 그늘에 가린 ‘마을’의 역사


 

양지혜(근대사분과)


 * 한국역사연구회 근대도시공간연구반은 <Redian>에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양지혜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http://www.redian.org/archive/113610)

 

#1

깊고 험한 산길이었다. 해발 1,000m. 개마고원의 남쪽 마을. 고개 넘어 보이는 마을의 풍경은 낯설었다. 지붕과 기둥, 바닥까지 통나무로 지은 집들이었다. 사진기를 꺼내자 조선인 아이 서넛이 다가왔다. 호기심과 경계심을 담은 눈이었다. 마을을 떠나기 전 주재소를 거쳤다. 경찰은 일본인 셋, 조선인 둘이라 했다. 경찰서장은 말했다.

 

이 주변은 불령선인(不逞鮮人)이 자주 나타나는 곳이다.


불령선인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자주 있다.


 

1922년 9월 25일, 일본인 건축학자 콘 와지로(今和次郎)는 함경남도 장진(長津)을 찾았다.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조선 곳곳의 건축과 생활상을 조사하는 여정이었다. 그에게 장진은 험준한 산길과 줄을 이은 통나무집, 겁먹은 눈빛의 아이들과 ‘불령선인’의 습격으로 기억되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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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d321fb2abf0b8b9e7962711a7b187af_1698329http://www.redian.org/wp-content/uploads/2017/08/2-2-220x300.jpg 220w" alt="" width="351" height="478" />사진 1. 1922년 콘 와지로가 만난 장진 사람들: ()조선인 아이들/ ()경찰서장과 아이 (서울역사박물관 편, <콘 와지로 필드 노트 : 1920년대 조선 민가와 생활에 대한 소묘>, 서울역사박물관, 2016, 121, 133.)

 

2년 후인 1924년 조선 최초의 인구 총조사가 시행되었다. 장진군의 전체 인구는 4만 6,000여 명이었다. 99%는 조선인. 일본인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214명). 같은 해 경성(京城)의 인구 34만 2,000여 명 중 일본인의 비율은 25%(8만 8,875명)였다. 식민지이지만 지배자의 말과 모습이 낯선 땅, 장진이었다.

 

#2

1929년 9월 28일,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형사대가 경성 종로6정목 28번지를 급습해 한 청년을 검거했다. 공산당 관계로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혐의였다. 청년의 이름은 정찬주(鄭讚周‧鄭贊周), 장진 사람이었다.

 

[장진군지]에 따르면 정찬주는 1901년 생으로 일본 도후쿠제국대학(東北帝國大學)을 졸업했다. 외조부는 대한제국기에 장진 군수를 역임하고, 금광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 함경도 내 최고의 거부(巨富)라 불린 조정윤(趙鼎允)이었다. 부친 정재일 역시 사금(砂金) 채취 사업을 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고등교육까지 받은 정찬주는 왜 경찰에 쫓기고 있었을까. 형사의 말처럼 그는 공산당과 관계된 ‘맑스 보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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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19299월 정찬주의 검거 사실를 보도한 기사 (變姓하고 다니든 정찬주 시내서 검서, <중외일보>, 1929.09.28.)

 

실제 정찬주는 1929년 이전에도 이미 경찰에 검거된 전력이 있었다. 1922년 그의 나이 21세였다. 그는 조선독립사상을 품고 독립운동기관 ‘계흥단(繼興團)’을 조직해 상해 임시정부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징역 6개월의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외조부가 세운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사상 활동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런 그를 다시 ‘저항’하게 만든 것은 장진에 거대한 수력발전소의 개발이 추진되면서부터였다.

 

7b677a1b5ec31731d0cd90a41a23cfae_1698329http://www.redian.org/wp-content/uploads/2017/08/4-300x119.jpg 300w" alt="" width="654" height="259" />사진 3. 1925년 중동학교 학생들과 함께 경성에 방문한 정찬주 (長津中東校生本社見學, <동아일보>, 1925.10.04.)

 

제국의 국책사업 ‘장진강수력개발’


 

1920년대까지 조선의 전력(電力)은 화력발전에 의존했다. 경성과 대구, 평양 등 대도시에 건설된 화력발전소가 해당 지역권의 전력을 생산・공급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화력 중심의 전력 구도는 1920년대 후반을 지나며 크게 변화되었다. 북부 지방에 대규모 수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여기서 생산된 전기를 고압 송전선을 통해 남부 지방으로 전달하는 구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장진강 수력의 개발은 이러한 전력체계의 전환에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었다.

 

장진강은 함경남도 북서부의 장진군과 신흥군, 삼수군을 거쳐 압록강으로 유입하는 강이다. 장진강에 대규모 수력발전소를 설립한다는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25년부터였다. 초기에는 대기업 미쓰비시(三菱)가 수리권(水利權)을 얻어 사업을 추진했지만,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과 경제대공황의 영향으로 결국 무산되었다.

 

수리권은 1933년 또 다른 대기업인 일본질소(日本窒素)에게 넘겨졌다. 일본질소는 1931년 현재 조선 내 전력업 관련 자본의 68%를 점유하며 전력 산업을 주도하던 기업이었다. 일본질소는 장진강 수력 개발에 앞서, 생산하는 전력의 절반을 경성과 평양 방면으로 송전하고, 나머지 절반만을 자회사인 흥남비료공장으로 송전한다는 계약을 총독부와 체결했다. 사기업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추진되었던 전력 산업은 이 계약을 토대로 ‘준 국책사업’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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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장진강수력개발위치도(붉은 원 안) (長津江水電株式會社, <長津江大水力發電工事槪要>, 1936.)

 

 

“어찌 우리의 생활권을 박탈하는가”, 마을 사람들의 저항


 

발전소의 건설로 인해 수몰될 지역은 장진군의 4개 면(面)에 달했다. 전체 약 2,700만 평(약 9,000정보), 장진군 전체의 1/5에 해당할 만큼 넓은 면적이었다. 주민은 2,000여 호, 1만 여 명.

 

마을 사람들은 ‘개발’이란 이름으로, ‘국책’이란 명분 아래 주민의 삶을 밀어내는 발전소 건설에 저항했다. 1927년 회사 측의 토지 매수가 시작되자 주민들은 ‘지주회’를 조직했다. 1930년 말 현재 장진군의 자작농 비율은 98.8%로, 이름은 ‘지주회’이지만 사실상 제 땅에 제 농사를 짓는 마을 주민 모두의 모임이라 할 수 있었다. 이들이 저항을 선택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회사 측의 터무니없이 낮은 금액의 매수 가격 제시
군수도, 경찰서장도, 군 직원도 한통속
감언이설로 마을 주민을 갈라놔


 

① 회사 측이 제시한 매수 가격이 지나치게 낮았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제시된 매수 가격은 토지 한 평당 최고 11전(1927년 미쓰비시)・17전(1933년 일본질소), 최저 2전(1927년 미쓰비시)・6전(1933년 일본질소)이었다. 1922년 콘 와지로가 남긴 메모에 따르면, 당시 장진에서 계란 한 알은 2전에 거래됐다. 땅 한 평을 팔아도 수중에 계란 몇 알 밖에 쥘 수 없는 셈이었다. 전 재산을 팔아도 새로운 땅을 찾아 사람답게 뿌리내리며 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② 군수와 경찰서장, 군 직원의 태도는 마을 사람들의 불신을 키웠다. 회사 측이 토지 매수 가격을 산정하자 장진군수와 경찰서장은 네 개 면(面)의 면장과 유력 지주들을 모아 회사 측에 협력을 당부했다. 이후 구장(區長) 집으로 마을 주민들을 불러 모아 매매서류에 강제로 날인을 시키거나, 주재소로 주민을 불러 매매를 강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군 직원 중에는 이미 회사 직원으로 이직한 사람도 있었고, 앞으로 회사 직원으로 채용이 약속되어 있다는 인물도 있었다. 군과 회사가 결탁했다는 불신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③ ‘지금 매매하면 당신에게만 높은 금액을 쳐 주겠다.’ ‘앞으로 공사가 시작되면 공사의 십장(什長) 자리를 보장해 주겠다.’ ‘공장이 생기면 당신에게만 취업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 회사 측의 브로커들은 비공식적으로 주민들을 일대일로 만나 향응을 대접하거나 향후의 개인적 특혜를 약속하며 마을 주민들을 갈라놓으려 했다.

 

이에 대응해 지주회는 호소문과 성명서 발표, 항의 방문 등을 지속하며 사안의 부당함을 반박하고 사태의 시정을 요구했다. 이들은 “관헌(官憲)의 압력과 금력(金力)에 굴하지 말고 단결이 필요하다” “강제 매수를 거듭해서는 안 된다”며 저항했다. 동아일보 등의 조선어 일간지에서는 이 사건을 일제와 재벌에 대항하는 민족적 사안으로 보도했다. 신간회 역시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지원했다.

 

결국 지주들은 강제 날인했던 계약서의 반환을 실현시켰다. 토지 매수를 위한 실지 측량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난 1928년 10월 현재에도 회사 측에 매수된 토지는 예정 지역의 1%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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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1933년 장진지주회 대표단이 총독부에 진정(陳情)하기 위해 경성에 방문한 모습 (장진지주단 대거하여 진정, <동아일보>, 1933.11.14.)

 

회사, 돈으로 지주회를 “함락”시키다


 

1929년 9월 종로에서 체포된 정찬주는 이 저항의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규합해 지주회를 조직하고 공동대표를 맡아 운동을 이끌었다. 1928년은 그가 운동에서 하나의 상징이 된 해였다. 그 해에 장진에는 금융조합(현재의 농협) 대출금의 일시 상환과 차압 수속이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채무가 있는 주민들은 파산 위기에 놓였다. 관(官)은 회사 측에 토지를 팔아 채무를 변제하도록 유도했다. 정찬주는 지주회 대표로 경성(京城)으로 가 자금을 구했다. 그는 경성의 부호(富豪) 한규설에게 빌려 온 4만 원을 마을 주민에게 저금리로 다시 대부했다. 관(官)의 돈, 위협하는 돈이 아닌 조선인의 돈, 삶의 터전을 지키는 돈이었다. 주민들은 정찬주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정찬주는 이후 경찰에게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1928년에는 출판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1929년에는 주민에게 융통한 4만 원의 자금 출처가 공산당으로 의심된다는 혐의로, 1933년에는 7년간의 지주회 활동비의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혐의로. 정찬주는 경찰에 쫓기고, 체포되고, 옥에 갇히는 생활을 거듭했다.

 

1933년 12월 20일. 정찬주가 마지막으로 체포되었을 때, 또 다른 지주회 대표는 회사(일본질소) 측과 매수 협정 체결을 발표했다. 지주회는 해산 절차를 밟았다. 7년간의 싸움이 수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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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지주회 해산 기사(「幹部七人은檢擧되고 地主會는解散運命」, <동아일보>, 1933.12.20.)

 

1933년 겨울 장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정찬주의 체포와 매수 협정 체결, 지주회 해산은 왜 짜 맞춘 듯 이어졌을까. 신문기사는 이렇게 전한다. 회사 측이 기존 제시 가격에 10%를 추가로 지급하고, 개인별 보상금 외에 마을 기부금 14만 원을 별도로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협상의 ‘결과’ 만을 보여줄 뿐이다.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은 회사 측 장부에 일부 남아있다.

 
1933년 12월 19일
조대하(趙大河) 채용(사무부 촉탁)
– 장진군의 유력자로 용지매수를 위한 정책상 필요.1934년 3월 9일
장진군 하갈경찰서에 1,500원을 기부
– 용지매수에 계속 도움을 주었고, 나아가 지주회 해산의 원인을 만들어 주었음.1934년 4월 2일
지주회 해산 연회(宴會)에 술과 안주 값으로 300원을 지급
– 1927년 이래 굳건하게 결속해 완강한 반대를 보여 온 장진군 지주회도 지난 겨울 결국 함락. 현재는 이들의 우두머리(巨魁)도 계속해 회사 측으로 넘어와, 일반 지주들의 분위기도 온건하게 전향. 앞으로 더욱 융화를 하자는 취지에서 술과 안주 값을 지불.1934년 5월 28일
지주회에 6만 원을 장려금으로 지급
– 함경남도지사의 알선에 따라, 기존에 소비된 지주회비와 훗날의 장려금 명목으로 지급.

1933년 12월 장부에서 언급한 조대하(趙大河)는 정찬주의 외사촌(정찬주의 외조부 조정윤의 장손)으로, 회사 측과 매수 협정에 날인한 장본인이었다. 정찬주가 체포되고, 매수 협정이 진행되는 사이, 그는 회사에 촉탁으로 임용되어 급여를 지급받고 있었다. 협정 체결 전후로 조대하가 회사에 매수(買收)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34년 3월부터 5월까지의 장부 역시 같은 흐름에 놓여 있다. 3월에는 지주회 해산의 원인(즉, 정찬주의 체포)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4월과 5월에는 ‘화합’과 ‘장려’의 명목으로 지주회에 술값과 거액의 기부금을 지급했다. 회사와 경찰, 지주회 일부 간부, 나아가 이들의 결속을 알선한 도지사까지. 이들이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며 지주회를 “함락”시키는 사이, 마을 사람들은 싼 값에 제 터전에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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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장진강수력발전소의 건설과 수몰된 마을 ()공사 모습, ()장진호(長津湖)(間組百年史編纂委員會, <間組百年史 : 1889-1945>, 間組, 1989, 550쪽, 554쪽.)

 

또 하나의 장진, 밀양


 

해방 후 70여 년이 지났다. ‘식민지’는 끝났다. 누구도 다만 ‘식민지민’이라는 이유로 상처입거나 난민으로 몰릴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땅은, 어떤 삶은 ‘국책’이라는 이름 아래 볼모잡혀 있다. 한국전력의 송전탑 건설 문제로 지난 10여 년간 첨예한 갈등을 겪어 온 밀양이 이를 대표한다.

 

‘밀양 사람들은 전기를 안 쓰나’ ‘국가를 위한 사업인데 누군가는 희생해야지’라는 말은 상황을 가볍게 왜곡한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밀양에서 벌어진 갈등은 몇 마디 말들로 외면할 만큼 가볍거나 단순하지 않다. 올해 3월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밀양송전탑 마을공동체 파괴 실태 보고서 발간, 증언대회>에서는 밀양의 주민들이 겪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보 공유 및 협의 과정에서 공공성 결여
자본과 공적 권력을 동원한 일방적 합의
마을 자치 역량 훼손과 마을공동체 해체


 

모두 한국전력의 국책사업 수행 ‘과정’에서 벌어진 문제들이다. 정돈된 말들을 한 꺼풀 들춰내 보면, 밀양의 상황은 80년 전 장진의 상황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① 회사는 2005년 첫 주민설명회를 개최했으나, 이 자리에 참석한 인원은 송전선로가 지나는 5개 면 인구 2만 1,000여 명의 0.6%(126명)에 불과했다. 이후에도 정보는 충분히 공유되지 못했고, 마을 사람들은 협의의 장에 오르지 못했다. 회사 측은 마을 사람들과 비공식적으로, 일대일로 만나는 방식을 택했다. 이들은 ‘합의서 도장’을 찍는다는 조건으로 자녀의 취업을 약속하거나, 선물이나 접대를 제공했다고 한다.

 

② 마을 사람들이 전하는 회사 측의 대응 매뉴얼도 80년 전의 사례에 비견될 만하다. “주민 성분 파악 → 이장, 반대운동 대표자 포섭 → 마을 내부에 협력 주민 구성 → 협력 주민에게 권한과 지위를 주고 막대한 보상 → 합의와 비합의 주민을 구분해 보상금 차등 지급 → 자녀 등 주민 약점을 파악해 압박 → 주민 내부의 갈등 유발 → 분열 뒤 개별 접촉 재시도.” 이 과정에서 공무원과 경찰이 건설 공사를 강행하기 위해 노력해온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③ 마을이 깨졌다. 사업에 찬성해서, 혹은 ‘나랏일에 반대해봐야 소용없다’ ‘지금 합의를 안 하면 돈이 떠내려간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려 보상금 지급에 합의한 사람들과 그 반대 측에 선 사람들로. 마을은 송전탑 사건을 거치며 분열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깨어진 마을에서 “살아 있지만 눕은 것(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지금은 혼자 집에 누워 있으면 무섭다. 누가 갑자기 찾아와서 해코지할까 심장이 벌렁벌렁하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마을에서 태어나 마을에서 한 생을 보낸 김 할머니에게 2010년대의 현실은 ‘식민지’ 그 이상의 무게였다.

 
이 골짜기 커갖고 이 골짜기서 늙었는데 6‧25 전쟁 봤지, 오만 전쟁 다 봐도 이렇지는 안 했다. 이건 전쟁이다. 이 전쟁이 제일 큰 전쟁이다. 내가 대가리 털 나고 처음 봤어. 일본시대 양식 없고 여기 와가 다 쪼아가고, 녹으로 다 쪼아가고 옷 없고 빨개벗고 댕기고 해도 이거 카믄. 대동아전쟁 때도 전쟁 나가 행여 포탄 떨어질까 그것만 걱정했지 이러케는 안 이랬다. 빨갱이 시대도 빨갱이들 밤에 와가 양실 달라 카고 밥 해달라 카고 그기고. 근데 이거는 밤낮도 없고, 시간도 없고. 이건 마 사람을 조지는 거지. 순사들이 지랄병하는 거 보래이. 간이 바짝바짝 마른다. 못 본다 카이, 못 봐.

(밀양구술프로젝트,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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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 2014년 행정대집행 당시 밀양 (이게 국가가 할 일인가밀양 송전탑 건설 중단 촉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06.11.)

 

‘식민지민’ 정찬주, 장진 그 이후


 

장진의 7년간의 싸움을 이끌었던 정찬주는 이후 회사(일본질소)의 브로커로 변신했다. 회사의 1939년 2월 장부에는 <용지매수 알선자에 사례 지출의 건>이라는 제목의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평안북도에서 진행된 수풍댐 건설 공사에 앞서 정찬주가 주민들과 만나 용지 매수의 알선을 담당해 이미 백 수십 만 평의 토지를 매수했으며, 나아가 그 가격이 관(官)에서 사정한 금액보다 10만 여 원 싼 값이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회사 측은 “여비(旅費), 숙박비 등의 실비(實費) 정도는 지급하여 그 공로를 치하하고자 정찬주 씨에게 3,000원의 사례를 지출”했다.

 

회사 측의 기록만이 아니다. 수풍댐 건설 과정을 분석한 일본인 학자 히로세 테이조(広瀬貞三)의 논문에 따르면, 1938년 10월 13일 조선총독부 조사관의 기록에는 “압록강수전(일본질소 자회사명) 사원이라고 칭한 정찬주가 벽동군 내에서 지주 3명으로부터 토지를 매수. 부하를 이용해 이 지역에서 매수공작을 추가로 진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저항가’에서 ‘부동산 브로커’로, ‘쫓기던 자’에서 ‘남을 쫓아내는 자’로, 그는 굽은 일생을 살았다. ‘식민지민’ 정찬주의 일생은 제국의 기업, 제국의 관공리, 제국의 경찰로 인해 뒤틀렸다. ‘식민지’가 끝난 땅에서 그의 삶은 지켜질 수 있었을까. 1968년 간행된 <함경남도지>에는 정찬주가 한국전쟁 중에 인민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망 장소는 장진군의 자택이었다.

 

<참고문헌>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 관계문서, 미간행.
「創韓團 一派의 控訴, 함흥서는 계흥단을 만들어 활동해」, <每日申報>, 1922.05.05.
조선총독부, <조선국세조사보고서>, 1925.
「長津中東校生本社見學」, 동아일보, 1925.10.04.
「“팔기야 팔지마는 상당한 가격 요구” 조상의 피땀 흘려서 지어 노흔 땅을 팔기도 앗가운데 그저 빼앗기서야」, <동아일보>, 1927.11.10.
「變姓하고 다니든 정찬주 시내서 검서」, <중외일보>, 1929.09.28.
「當局의 積極 干涉으로 住民의 不平 日增」, <동아일보>, 1929.12.10.
「장진지주단 대거하여 진정」, <동아일보>, 1933.11.14.
「幹部七人은檢擧되고 地主會는解散運命」, <동아일보>, 1933.12.20.
長津江水電株式會社, <長津江の大水力發電工事槪要>, 1936.
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 <함경남도지>, 1968.
堀内稔, 「長津江水電と土地紛爭」, <朝鮮民族運動史硏究> 2, 1985.
間組百年史編纂委員會, <間組百年史 : 1889-1945>, 間組, 1989.
広瀬貞三, 「水豊発電所建設による水没地問題-朝鮮側を中心に」, <朝鮮学報> 139, 1991.
장진군민회, <장진군지>, 2010.
李光宰, <韓國電力業の起源>, 柘植書房新社, 2013.
밀양구술프로젝트,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이게 국가가 할 일인가”…밀양 송전탑 건설 중단 촉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06.11.
「‘밀양’이 위험하다: 송전탑 피해 마을공동체 파괴 실태 조사보고서 발간. “한국전력 전면 감사‧책임 규명, 갈등 조정 지원법 필요”」, <한겨레21> 제1155호, 2017.03.29.
「“돈으로 마을을 부쉈다” 송전탑 건설로 한전이 깨트린 밀양, 더 망가지기 전 진상 규명 절실」, <한겨레21> 제1172호, 2017.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