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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도시 개발과 빈곤의 연대기

BoardLang.text_date 2018.05.17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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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도시 개발과 빈곤의 연대기,


서울시 주택지 개발과 철거


 

서준석(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화려한 유혹 속에서 웃고 있지만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해.”
– <서울 이곳은> (장철웅 작곡, 김순곤 작사)

 

위 노래는 1994년 문화방송의 드라마 <서울의 달>에 수록된 것으로, 최근 TVN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 수록된 노래이기도 하다. 노래는 같지만, 두 드라마의 분위기는 너무나 다르다. 1994년에 방영된 드라마가 당대 서울의 ‘달동네’를 배경으로 했다면, 2013년에 방영된 <응답하라 1994>는 1994년 서울 신촌의 하숙집이 무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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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드라마가 비슷한 시간대를 다루고 있지만, <응답하라 1994>는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중산층에서 자라 남부럽지 않은 대학을 다니며 자기 삶을 기획해나갔던 새내기들의 이야기이고, <서울의 달>은 빈손으로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와 이른바 불량주택가의 어느 집 방 한 칸을 빌려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응답하라 1994> 속 인물들에게 저 노래는 다만 당시 유행하는 노래에 불과했다면, <서울의 달> 속 인물들에게 위 노래는 매일매일 부대끼는 삶에 지쳐 흘러나오는 하소연이었다.

 

그런데 과연 <서울의 달>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달동네’, 즉 이른바 불량주택가에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곳에 거주하고 있을까? 아니면 흥얼거리던 노래에서처럼 고향이나 다른 곳으로 떠나갔을까? 또 그 동네는 지금도 제자리에 있을까?

 

서울시로의 인구집중과 무허가 정착촌의 확산


 

달동네들이 서울 지역에 형성된 것은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부터였다. 아니, 이미 일제시기부터 서울과 그 인근 지역에는 불량주거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제시기인 1920년대를 전후하여 서울 지역에는 이른바 ‘토막’이란 주거형태가 사회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토막이란 땅을 파서 그 단면을 벽으로 삼거나 혹은 땅위에 기둥을 세우고 거적 등으로 벽을 삼고 양철이나 판자로 지붕을 만든 원시주택으로, 위생과 치안의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토막집




토막민들은 대체로 농촌에서 생계대책을 잃고 도시로 이주한 이농민들이었으며, 일자리를 구하기 쉬운 도심 인근에 토막을 짓고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갔다. 토막민의 수는 꾸준히 늘어나 1928년에 1,143호, 4,803명이던 것이 일제말기인 1942년에는 7,426호, 37,026명까지 불어났다. 당시 식민당국자들은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1930년대 중반 식민당국은 새로운 시가지 계획 속에 집단거주지를 설정하여 토막민들을 정착시키고자 하였으나 이를 재산권 침해로 인식한 토지소유자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경성부에서 실행한 토막민 대책이란 경성부 바깥에 집단 주거지를 설정하고 토막민들을 내쫓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경성부 바깥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토막민들은 강제이주를 당한 후에도 끊임없이 도심으로 들어와 당국의 철거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1945년 해방을 맞은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해외로 떠나간 사람들이 돌아오고, 정치적 불안 속에 38선 이남으로 내려온 사람들까지 서울에 모여 들었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끝나고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서울의 인구는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겨우 90만 명을 웃돌던 서울의 인구는 1950년 한국전쟁 직전에 약 142만 명 정도로 늘었고, 1970년에는 무려 500만 명을 넘어섰다. 1970년 당시 서울시에서 집계한 바에 따르면 1970년 5월 현재 총 가구수가 99만 9,531가구인데 비해 총 주택수는 모두 58만 977채에 불과했으며, 무허가 판잣집 등 불량주택의 수도 18만 7,000채에 이르렀다. 이처럼 농촌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은 도심 하천변 및 구릉지 등 빈 공간이 있으면 아무 허가도 받지 않고 무작정 주택을 짓고 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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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내 무허가건축에 대한 서울시의 정책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시를 복구하고 정비하려는 시도는 이미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952년 중에 나타났다. 서울시는 1952년 3월 ‘서울 도시계획 가로변경‧토지구획정리지구 추가 및 계획지역‧변경’이란 제목의 전쟁복구계획을 성안하고 내무부 고시 제23호로 발표하여 부족한 재정에서나마 전쟁피해가 극심한 지역을 중심으로 도시정비를 시작하였다.

 

1953년 8월 1일에는 서울특별시 규칙 제25호로 ‘서울특별시 수도부흥위원회규정’을 제정하여 새로운 도시 건설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동월 3일에는 서울특별시 공고 제24호 ‘건축행정요강’을 발표하여 주택을 비롯한 각종 건물의 건축에 대한 기본 요강을 마련하였다. 주택과 관련해서는 주택대지의 최소 면적을 25평으로 하는 한편, 도시계획에 저촉된 건물을 함부로 지을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나아가 무허가건축물의 신축을 금지하고 기존 무허가건축에 대해서도 자진 철거하지 않을 시에는 강제로 철거하겠다고 명시하였다.

 

그러나 서울시의 계획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재정적인 문제가 컸다. 당시의 서울시 재정으로는 긴급한 도로와 교량 복구비, 각급 청사와 학교 교실 수선비 및 전염병 예방을 위한 보건비, 구호양곡지급비, 공무원 봉급 등을 지출할 수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철거민들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허가 건축물들을 철거할 수는 없었다.

 

물론 정부와 시에서도 무허가건축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공공주택을 건립하기도 했지만, 일시적으로 시행된 것이거나 중간소득층을 위한 것으로 저소득층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전재복구 과정에서 이재민들에게 시유지 일부를 무상으로 대여하거나 특정 지역에 주택을 지을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불량주거지가 양산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한편 도심 곳곳에 생겨난 불량주택들은 대체로 당시 미군부대 등에서 흘러나온 목판이나 아연철판, 루핑 등을 활용해서 지은 판잣집으로 화재나 수재에 매우 취약했다. 실제로 1950~1960년대에는 무허가 정착촌에서 자주 화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정부의 입장에서는 무허가건축이 꾸준히 확산되는 것을 그냥 방치해둘 수 없었다. 이에 정부는 1967년부터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포함된 정책과제로서 서민주택의 대량건설을 목표로 주택건설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어 그해 9월 건설부는 저소득층 주거지와 무허가정착촌 일대에 아파트와 단독주택 등 공영주택을 건설한다는 안을 포함한 1968년도 주택건설계획을 발표하였다.

 

서울시에서도 이미 김현옥 시장의 주도하에 ‘무허가건물 연차별 정리계획(1965~1970)’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1967년에는 근본적인 해결을 위하여 ‘불량건물 정리계획(1967~1969)’을 새롭게 마련하였다. 이 계획의 핵심은 첫째, 시 외곽에 대단위 정착지를 설정하고 도심의 무허가 건축물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키는 방법이었다. 둘째는 주민 자력으로 불량주택 및 주거지역을 개량하되 필요한 비용 중 일부를 시에서 지원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시민아파트의 건립이었다.

 

1967년에 마련된 ‘불량건물 정리계획’은 그동안 시와 정부가 방기해왔던 주거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시민아파트 건립은 시에서 직접 아파트를 지어 저소득 무주택 가구에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시민아파트 건립사업은 196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1972년까지 서울시내 32개 지구에 모두 425개동 17,204가구의 아파트를 지었다.

 

그러나 1970년 4월 8일에 일어난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인해 시민아파트 건설 사업은 전면 중지되고 말았다. 특히 와우아파트 붕괴 이후 당시까지 건립된 시민아파트 405동의 안전 상태를 전수 조사한 결과 91%인 370동이 위험상태에 있었음이 드러났다. 시민아파트 건립사업은 애초부터 적은 예산으로 시행된 데다가 짧은 공사기일 안에 지어야한다는 부담 속에 졸속으로 계획수립과 시공이 이루어져 시행 초기부터 부실논란이 제기되고 있었다. 또한 시에서 지은 시민아파트는 겨우 골조공사만 했을 뿐이어서, 입주자가 돈을 들여 직접 내부 공사를 해야만 했다. 여기에 더해 서울시는 입주자들에게 15년간 분할상환토록 했던 분양금을 갑자기 일시 지불토록 강행하여 거센 반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집단이주정착지 건설사업 또한 시에서 주거에 필요한 제반시설을 마련하지 않은 채 무작정 강행한 사업으로 사실상 기존의 강제이주정책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 계획은 이미 1959년 미아리집단이주정착지 사업을 시작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집단이주정착지 건설사업은 도심지역인 도동(후암동), 명동, 인현동, 광희동, 돈암동, 청계천변 등지에 무허가주택을 짓고 거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서울시는 1971년까지 도심 바깥으로 약 43,000여 가구를 이주시켰고, 그 결과 목동, 상계, 중계, 신정동, 신월동, 신양동, 사당동, 봉천동, 신림동, 천호동, 거여동, 마천 등 유휴 국공유지에 대규모 집단이주정착지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새로 마련된 정착지는 대부분 미개발지여서 주거에 필요한 제반 시설이 갖춰지지 않았고, 일자리가 있는 도심으로부터 멀어 주민들의 생계에도 커다란 지장을 주었다. 이주한 주민들은 시로부터 일정 크기의 토지를 불하받았지만, 그에 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불하받은 토지를 전매하고 다시 도심지 인근으로 재이주하기도 하였다. 집단이주정착지 사업의 부작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1970년 8월에 일어난 광주대단지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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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서울시 철거민운동사 연구」 <서울학연구> 13, 1999




 

주택개량 및 양성화사업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울시는 한 지역에 30동 이상 무허가건축이 집단화되었으며, 도시계획에 저촉되지 않고 침수지역이 아닐 것 등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한 지역 혹은 주택에 대하여 주민이 주택을 개량하면 시에서 공사비의 일부를 지원하고 사실상의 점유권을 인정하는 양성화정책을 펼쳤다. 양성화사업은 비교적 도심지로부터 거리가 있는 홍제, 마포, 미아, 성북, 상계 등지의 무허가 정착촌을 대상으로 시행되어 1982년까지 약 9만 4천여 채의 주택이 양성화되었다.

 

양성화 사업은 앞선 시민아파트 건립사업이나 집단이주정착지 건설사업보다 재정적 부담이 덜했지만 이 또한 문제점이 많았다, 양성화사업 역시 대부분의 공사비를 주민에게 전가했기 때문이다. 즉, 주택개량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무허가건축물을 완전히 헐어치운 뒤에 새롭게 집을 지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던 주민들이 새 집을 지을 정도의 공사자금을 부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리 잡은 지역으로부터 강제철거를 당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강제이주책에 비해서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지는 않았다.

 

이렇듯 1967년에 마련된 ‘불량주택 정리계획’은 그동안 방치되어왔던 저소득층의 주거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목표를 제시했지만, 실제로는 저소득층에게 재정적인 부담을 전가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서울시는 이를 통해 도심과 그 주변의 무허가 정착촌들을 상당수 정리하고 시 외곽으로 재배치함으로써 과밀화된 도심의 인구, 교통, 주택난을 해소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미개발지였던 시 외곽의 이주정착지들은 집단이주한 주민들이 비록 무질서한 상태에서나마 자리를 잡아가면서 자신들의 마을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들 주거지역을 다시 해체하고 재개발을 실시하였다. 재개발의 명목은 ‘열악한’ 주거환경의 개선이었으며, 도심에서 쫓겨났던 주민들은 다시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거나 극한투쟁을 선택해야만 했다.

 

 

주민은 돌아올 수 없는 도시(재)개발


 

1970년대에 서울시는 도심에 과밀화된 인구와 주택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심 내에 산재해있던 무허가정착촌을 해체하여 이주시키는 것과 함께 새로운 신도심을 건설하였다. 이른바 ‘강남개발’이다. 해방 이후 서울의 범위는 몇 차례에 걸쳐 확장되었는데, 특히 1963년에 이루어진 대규모 시역확장을 통해 서울시의 총면적은 268.35㎢에서 약 596.5㎢로 늘어나 오늘날 서울의 범위와 비슷하게 되었다.

 

서울시의 확장은 계속 팽창하는 인구에 대비하여 미리 새로운 시가지를 건설할 땅을 마련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울시의 빈곤한 재정형편으로 볼 때 새로운 시가지 건설은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 사이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사람들은 도심 주변으로만 모여들어 1960년대 말에는 거의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1970년을 전후해 서울시와 정부는 도심 인근의 무허가정착촌을 해체시켜 외곽으로 재배치하면서 도심지역에 대한 재개발을 시행하였고, 이와 함께 도심의 기능을 분산시킬 새로운 시가지 건설, 즉 강남을 개발하는데 집중하였다.

 

서울시가 강남을 개발하는데 집중하는 사이 시 외곽에 이주한 주민들은 없는 형편에서나마 자신들에게 주어진 공간을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나갔다. 1980년대 말 재개발사업이 시행된 사당2동 지역에 대한 연구에 당시 집단이주정착지의 형성과정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살펴보면, 서울시는 새로 조성된 집단이주정착지로 이주한 주민들에게 이주민증을 발급하는 한편, 시유지인 산을 분할하여 가구당 10평씩 배분하였다. 그러나 생계수단도 없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도심까지 가려면 교통비도 많이 들어 처음 이주한 사람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배당받은 땅을 팔고 떠났다.

 



재개발 직전 사당2동의 모습




반면 철거민 정착이 끝난 1968년 이후부터 이농민과 도시영세민들이 싼 주거지를 찾아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서울시에서 매우 커다란 무허가정착촌을 형성하였다. 먼저 입주한 주민들은 집을 짓고, 나중에 세 들어온 사람들에게 선불을 받아 방을 한 칸씩 늘려가며 집 모양을 갖추었다. 정착 초기에는 주민들이 스스로 전기를 끌어오고 물도 길어다 먹었으며 버스 종점까지 30분을 걸어서 나가야 했다. 이후 사람들이 늘고 거주지가 형성되자 선거에서도 표밭으로 인식되어 그 덕분에 도로를 포장하고, 초등학교와 파출소가 생기기도 하였다. 이처럼 집단이주지가 하나의 시가지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은 이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인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지역의 가치도 상승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주거지는 지역주민들에게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곳일 뿐 아니라, 각자의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집단이주정착지는 대체로 산기슭에 위치해 물이나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고 교통이 불편했다. 대신에 주거비가 다른 일반주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쌌다. 또한 이 지역으로 이주해온 주민들은 처지가 비슷하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울타리가 되어주어 심리적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다. 나아가 이 지역에서 형성된 이웃관계는 서로의 일자리를 구하는 데에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곳 주민들은 대체로 일용노동자나 행상을 하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구하는 일자리는 주로 지역 내에서 맺은 이웃관계나 연줄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때문에 비록 환경이 열악하다고는 하나 저소득층 가구가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근거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이들 무허가정착촌은 다시 (재)개발의 광풍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에 시작된 강남개발도 1980년대 초 개포지구에 대한 개발로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한편 서울시의 인구는 1983년에 900만 명, 1988년에는 드디어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가운데 신규택지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늘어났다. 급기야 1960~1970년대에 저소득층이 만들어놓은 주거지역이 재개발 지역으로 물망에 오르게 되었다.

 

특히 1980년대 들어서는 재개발사업의 시행주체가 정부에서 민간으로 바뀌면서 사업을 둘러싼 갈등이 예전보다 더욱 첨예해지고 훨씬 더 폭력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한국에서 그동안 시행되어온 재개발사업은 대체로 전면철거 후 새롭게 용도와 목적에 따라 시가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그중 철거과정에서 나타나는 주민의 저항과 철거민에 대한 대책문제는 정부에게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부담을 해소하고 정부가 의도하는 재개발사업을 추진해나갈 수 있는 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합동재개발’ 방식이었다.

 

‘합동재개발’ 형태의 재개발 사업은 정부나 지자체에서 사업대상지를 재개발 지구로 지정한 후, 지역 주민(가옥주)들이 재개발조합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사업을 시행할 건설사를 선정하여 정부 및 지자체로부터 시행인가를 받으면 재개발사업을 전개해나가는 형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재개발사업의 중요주체인 정부가 표면에서 사라지고 재개발조합과 건설사가 전면에 나서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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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제로는 정부의 도시정비계획을 바탕으로 재개발사업이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시행주체에서는 정부가 빠짐으로써 재개발사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처리하고 해소하는 비용을 민간에 전가하는 결과를 낳았다. 더군다나 가옥주만이 재개발조합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작 지역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세입자들은 조합에 참여하여 재개발사업에 대한 보상이나 대책을 전혀 요구할 수 없었다.

 

단적인 예로 1983년 ‘합동재개발사업’이 도입될 당시 세입자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었다. 세입자들은 자신들에게도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함을 역설하며 정부와 건설사, 재개발조합에 대한 극한투쟁을 전개했고, 그 결과 1987년에는 방 한 칸 입주권이나 3개월분 생활비 중에 택일하는 것, 1989년에는 공공임대주택이나 3개월분 생활비 중 택일하는 보상대책이 마련되었다. 오늘날 뉴타운・재개발 대상지역의 주택세입자에게는 크게 영구임대주택과 주거이전비 가운데서 택일하며, 이와 함께 임시수용시설과 동산이전비(이사비)를 보상받을 수 있다. 상가세입자에게는 영업손실보상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선 이후 총건립주택 수 대비 임대주택의 건립비율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으며, 임시수용시설 마련이나 주거이전비 지급 등의 보상조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저소득층인 기존 주민들은 개발 이후 새롭게 들어선 아파트에 입주할 수 없었고 또 다른 저렴한 주거지역을 찾아 떠나야 했다. 집주인이라 하더라도 개발 이후 높아진 주거비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80년대 초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전개된 도시재개발로 목동, 사당동, 상계동, 돈암동, 신림동, 봉천동 등지에 산재해있던 무허가정착촌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곳에 살았던 저소득층 주민들은 대부분 기존 주거지 인근의 단독주택이 많이 모여 있는 지역에 있는 지하 셋방이나 옥탑방으로 옮겨갔다. 1990년대 초부터 입주가 시작된 영구임대아파트는 비교적 주거조건이 좋았지만, 공급량이 많지 않아 입주 시에도 다시 조건이 붙어 매우 제한적으로만 입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도저도 어려운 사람들은 비닐하우스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무허가정착지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2015년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저소득층 주거지는 모두 31마을로 파악된다. 이중 홍제동 개미마을이나 성북구 정릉골과 같이 성북구, 관악구, 서대문구 등에 있는 11개 마을은 한국전쟁 이후에 생겨난 자연발생 정착지이며, 노원구에 있는 백사마을과 같이 1960년대에 조성된 집단이주정착지도 8개 마을이 남아 있다. 이외에 송파구, 서초구, 강남구 등지에 있는 12개 마을은 1980년대 무허가정착촌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저소득층 주민들이 옮겨가서 새롭게 자리 잡은 곳이다.

 

 

도시재생사업과 주거권


 

2018년 현재 드라마 <서울의 달>의 무대와 같은 달동네는 이제 서울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1960년대 이후로 서울의 많은 지역이 주거환경 개선과 정비라는 명목 아래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어 새롭게 변신했다. 그러나 기존 주민들은 새롭게 단장한 지역에 다시 발붙이고 살기 어려웠다. 집을 철거하면서 받은 보상비로는 재개발과정에서 불어난 집값을 지불하고 새 아파트에 입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서울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주택난이 극심해지자, 정부와 서울시는 꾸준히 주택공급정책을 펼쳐왔다. 그 덕분에 오늘날 서울시의 주택보급률은 95%를 넘어섰다. 그러나 서울시의 자가점유율은 2016년을 기준으로 42%(전국적으로는 56.8%)에 불과하다. 한편 2016년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 규모이기는 하나, 월 소득 200만 원 이하인 저소득층에서의 자가점유율은 46.2%로 2014년보다 1.3% 떨어졌고, 월 소득이 400만 원을 초과하는 고소득층의 자가점유율은 같은 기간 4.1% 상승했다.

 

이 같은 통계들은 우리에게 그동안 서울시와 정부에서 추진해온 주택정책이 과연 실제 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되묻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2002년부터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이른바 ‘뉴타운’사업의 대상지역에 거주했던 주민들이 사업 이후 재정착한 비율은 25.4%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든다. 과연 서울시와 정부의 주택공급정책은 집 없는 서민들을 위한 것이었는가?

 

최근 정부는 기존의 ‘합동재개발’ 방식의 개발사업과는 다른 시도를 시작했다. 2006년 정부는 도시재생사업단을 발족하고 2013년 6월 ‘도시재생특별법’을 제정했으며, 2014년에는 서울시를 5개 권역으로 나누어 도시재생사업을 본격화하였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도 표현되는 이 작업은 노후하고 불량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기존 시가지들에 새로운 기능을 도입하고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다시금 도시를 소생시키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처음에 이러한 작업을 주도한 것은 일군의 젊은 예술가, 인문학자, 문화기획자들이었다. 이들의 작업을 통해 2000년대 중후반부터 홍대 주변과 합정동, 상수동, 삼청동, 신사동 가로수길 등 개발의 뒤편에 있던 거리가 새롭게 주목받고 지역이 활성화되자 정부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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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시재생사업 또한 기존의 재개발사업에 못지않은 부작용을 안고 있음이 곧 드러났다. 좀 더 저렴한 곳을 찾아 들어온 젊은 예술가와 문화기획자들의 시도로 지역의 가치가 상승하자, 거대 자본이 이를 잠식하였고 정작 거리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 주체들은 지역으로부터 내쫓기는 등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즉 오래된 도시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더라도 그 이익은 정작 지역 주민들과는 전혀 다른 누군가가 취할 수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재개발 사업과 새로운 도시재생사업이 과연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다가오는 1월 20일은 2009년에 용산참사가 발생한지 9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러나 여전히 세입자와 저소득층의 삶을 파괴하는 재개발은 계속되고 있다. 지역주민의 삶과 주거권을 우선시하는 도시개발에 대한 고민이 절실히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