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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걸음 더]송나라 사람의 고려 정착기

BoardLang.text_date 2018.10.26 작성자 이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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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걸음 더


송나라 사람의 고려 정착기


- 채인범과 유재를 중심으로 -


 

이바른(중세1분과)


 

기회의 땅, 고려: 송 지식인의 코리안 드림

고려시대에는 전 시기에 걸쳐 다양한 민족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수시로 왕래하는 송상宋商의 선박이 바다를 통해 고려와 송의 물자, 사람들을 실어 날랐으며 고려에 인접해 있는 발해・거란・여진의 수많은 사람들이 고려로 유입되었다. 《송사》 고려전에는 고려 왕성에 중국 사람이 수백 명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어 그만큼 많은 외국인이 고려로 유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고려와 송의 외교가 시작된 광종 대에는 과거제를 건의한 쌍기 등 송 투화인들에 대한 후대 문제로 고려 관료들의 불만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고려로 들어온 외국인들을 관용적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이들은 규모나 고려에서의 역할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고려시대 이민족의 이주는 국가적인 측면에서 논의되어 고려 내로 이주해온 각 인물의 입장에서 고려 사회에서의 정착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소홀했다. 이제는 이주 외국인들의 입장에서 고려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시기를 달리하여 고려에 온 두 인물, 채인범과 유재를 중심으로 송에서 온 사람들의 고려 정착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두 인물 모두 묘지명을 남기고 있어 이들의 삶을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채인범 묘지명은 현존하는 고려 묘지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유재는 묘지명과 더불어 《고려사》 열전에도 입전되어 있어 그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두 인물의 자손들도 고려에서 관직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므로 성공적인 고려 정착의 사례이다.

 

송 천주 출신 채인범과 그 가문, 고려에서 번성하다

채인범은 묘지명 외 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묘지명을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채인범은 송나라 천주泉州 출신으로, 970년(광종 21)에 천주 지례사持禮使를 따라 고려에 왔다. 고려로 왔을 때 그의 나이는 37세였으며, 광종은 예빈성낭중(5품급)에 임명하고 주택과 토지・노비 등을 하사하여 그의 정착을 적극 지원하였다.

 

채인범은 성종 때 조회의 의례를 담당하였던 합문閤門[결락으로 구체적인 관직명을 확인할 수 없으나 그의 관직 임용 과정을 볼 때 5품급인 합문사로 짐작된다]과 상서예부시랑(정4품) 등을 역임하였다. 예부 또한 의례를 관장한 관서였던 만큼 국초에 여러 의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은 자명하다. 채인범은 998년(목종 1)에 65세로 사망하였고 예부상서(정3품)로 추증되었다. 이후 1024년에 상서우복야로 추증되었다.

 

가장 주목되는 내용은 그의 가계 부분이다. 먼저, 그에게는 처음 부인인 청하군대부인 최 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한 명 있는데, 묘지명 작성 당시 그의 관직이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감수국사였다.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묘지명이 작성되기 2년 전인 1022년 6월에 내사시랑평장사‧서경유수에 임명된 채충순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사》 채충순전에 그의 세계를 알 수 없다고 한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채인범이 고려에 왔을 때 37세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부인 최 씨와 장남은 송에서부터 함께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혼인한 장 씨는 청주군군(?)에 봉해졌으며, 슬하에 세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 세 아들 가운데 첫째는 합문지후, 둘째는 군기주부가 되었으며 셋째 아들은 출가하여 불주사 대덕이 되었다. 두 딸 역시 모두 혼인하였으나 묘지명 작성 시기 이전에 사망하였다. 특히 ‘아들과 형제자매가 낳은 남녀와 여러 손자들[嗣子兄弟姉妹所生男女諸孫等]이 매우 창성하여 또한 각기 벼슬에 나가 관리가 되었다’는 구절에서 채인범 자신뿐 아니라 다른 형제자매도 고려에 와 정착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후에 혼인한 장 씨의 경우 고려 여인으로 짐작되는데, 그녀의 가문적 배경 역시 채인범 일가의 정착을 도왔을 것이다.

 

채인범은 자신뿐 아니라 자손에 이르기까지도 고려 정부에서 관직생활을 안정적으로 영위하며 정착한 사례이다. 송과의 관계가 맺어진 초기에 송 지식인의 정착 사례로 단연 모범이 되었을 것이며 이를 계기로 송 지식인들의 지속적인 고려 유입을 자극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아들들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점이나 다른 기록에서 언급되지 않다는 게 의아하다. 이는 고려 초에 점차 지역 가문 중심의 중첩적인 문벌귀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채인범이 외국인 출신인 점이 한계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왕의 스승이 된 유재, 출세가도를 달리다

유재는 송나라 천주 출신으로, 선종 대 건너와 고려에 정착한 인물이다. 일찍이 유재는 입사의 뜻을 밝히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해동[高麗]에 이르렀다고 하니, 관직 진출에 대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고려에 왔음이 분명하다. 그는 29세이던 1089년(선종 6)에 고려에 당도하였다. 선종은 유재가 온 것을 알고 시부詩賦로 시험해보고 감문위참군사[열전에는 천우위녹사참군]에 임명하였다.

 

숙종 즉위 후 유재는 1102년(숙종 7)에 우사・지제고・동궁시독으로 파격 승진하여 태자를 보좌하게 되었다. 이는 4품급에 해당하는 지위로, 관직 승진의 순서를 뛰어넘어서[超拜] 임명된 것이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9급 서기보에서 4급 서기관이 된 수준의 파격적인 인사였다. 이후 숙종 대에는 정4품직의 우간의대부, 예부시랑, 좌간의대부 등을 역임하였으며, 1104년(숙종 9)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고려 정부의 공무원시험 출제자의 역할까지 수행한 셈이다. 예종이 즉위하자, 그는 평탄한 승진 과정을 거쳐 정3품직의 좌산기상시, 예부상서, 이부상서를 역임하고 상서좌복야・문덕전학사(정2품)가 되어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다. 유재는 그야말로 고려에서 현달하였다.

 

한편,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1119년 묘지명 작성 당시 통사사인(정7품)이던 장남 유급과 차남인 주부(8품급) 유승경이다. 유급은 유재가 고려로 온 5년 후인 1094년(헌종 즉위) 8월에 온 것으로 확인되는데 유재가 먼저 온 이후 그 가족들이 모두 고려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유재는 고려에 온 목적에 부합하게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초고속 승진에 이어 안정적으로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성공하였다. 이러한 유재의 고려 정착 과정은 어느 정도 제도 정비와 안정적인 관료조직을 갖춘 당시 고려 중기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고려 사회의 또 다른 돋보기, 투화인

지금까지 시기를 달리하여 고려에 온 두 사람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채인범과 유재는 모두 송 천주인이라는 배경은 같았지만 고려 관료가 되는 과정과 정착에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채인범이 고려의 관료가 되는 관문은 누구보다 쉬웠다. 그는 왕을 배알만 하고도 바로 고위급 관료에 임명되었으며 정착을 위한 편의가 제공되었다. 유재의 경우에는 관직 생활에 대한 뚜렷한 목표로 고려로 왔음에도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야 말단의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고려 내부의 제도적 정비와 안정의 정도에 따른 차이일 것이다.

 

채인범은 높은 관직에서부터 시작한 데 비해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지만, 이름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송 투화인이라는 점과 재신의 반열에 오른 아들의 모습을 통해 고려 초 송 투화인과 그 일가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고려에 정착하였는지를 보여준다. 반면, 유재는 처음에 미관말직이었으나 그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다음 왕위 계승권자인 태자의 스승이 됨을 기점으로 고속 승진하여 재상의 위치에 이르렀다. 이러한 그의 일생은 역으로 고려 중기 제도적 정비를 통한 관료 조직의 안정성을 드러낸다. 이렇듯 고려에 온 수많은 외국인, 즉 투화인들은 고려 사회를 접근하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해주는 이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