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을 위한 역사⑥] 아첨꾼을 사랑한 임금

BoardLang.text_date 2016.08.16 작성자 이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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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첨꾼을 사랑한 임금



한국역사연구회는 <시민의 한국사> 출간에 앞서 <한겨레21>에 15회 분량의 ‘시민을 위한 역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중세1분과 이익주 선생님이 기고한 글입니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679.html)


 

이익주(중세1분과)


 

‘폐’(嬖)란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천한 사람을 특별히 사랑한다는 말이다. ‘행’(幸)은 ‘행’(倖)과 같은 글자로 아첨한다는 뜻이다. 그냥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 유난을 떤다는 말이다. 두 글자를 합쳐 ‘폐행’(嬖幸)이란 말이 만들어졌다. 특별히, 임금에게 아첨하여 총애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임금의 총애는 출세와 권력을 보장했다. 그래서 폐행이 생겨났지만,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정치는 부패하고 백성의 삶은 곤란해졌다.

중국의 환관, 고려의 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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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사지 10층 석탑은 1348년(충목왕 4년) 강융, 고용보가 원나라와 고려의 왕실 복을 기원하며 만들었다. 강융은 본래 노비였으나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폐행이 되었고, 고용보는 원나라의 환관이 되어 권세를 부리다가 공민왕에 죽음을 당하였다(왼쪽). ‘폐행전’에는 모두 36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 ‘윤수(尹秀) 열전’을 보면, 윤수는 매사냥을 좋아하는 충렬왕의 기호를 잘 맞춰 폐행이 되었고, 그의 아들 윤길보는 격구(擊毬)를 잘해서 충선왕의 총애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고려사>는 고려시대 폐행들을 모아 열전을 만들고 ‘폐행전’(嬖幸傳)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자고로 소인배들은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엿보아 영합하고 조장하였다. 때로는 아첨으로, 때로는 놀이와 여자로, 때로는 매사냥과 개사냥으로, 때로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해서, 때로는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때로는 기예와 술수로써 그렇게 하였다. 모두 임금이 좋아하는 바를 좇아서 그 비위를 맞추고자 하였다. 고려는 나라가 오래되었으므로 간사하고 아첨하는 폐행(嬖幸)도 또한 많았다. 이제 옛 기록에 근거하여 폐행전을 짓는다.”


‘폐행전’에는 모두 36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중 대부분은 고려 후기 사람들이다. <고려사>를 지은 사람들은 고려 후기에 폐행이 많아져서 정치가 혼란해졌고, 그래서 망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들이 세운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증명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폐행전’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항변할 수만은 없는 역사적 진실이 담겨 있다. 고려가 폐행 때문에 망한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임금의 가까운 자리는 본래 환관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궁중에서 임금의 수발을 들면서 임금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임금 가까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도 이들의 ‘무기’였다. 환관의 한마디 말이 한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었다. 이들은 임금의 총애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뒤에서 호가호위하며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중국 후한 말의 십상시(十常侍)가 대표적인 예다.


중국 역사에는 십상시 말고도 환관 권력자가 많았다. 진시황 사후 어린 황제를 세우고 권력을 휘두른,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주인공 조고(趙高)는 진나라의 환관이었다. 당나라에서는 현종 때 고력사(高力士)가 환관정치의 문을 열었다. 그는 관리들이 황제에게 올린 글을 중간에서 열어보고 걸러냈다. 명나라에는 희대의 환관 위충현(魏忠賢)이 있었다. 그는 황제 직속 정보기관인 ‘동창’의 책임자가 되어 황제 다음가는 2인자로 군림했는데, 자신이 나타나면 누구나 엎드려 ‘구천세’를 부르게 했을 정도다(황제에게는 ‘만세’를 불렀다). 명나라 말에는 환관이 모두 7만 명이나 되어 관료보다 많았다고 하니, 비단 청나라가 아니었어도 이 나라는 곧 망했을 것이다.


반면 우리 역사에서는 권력을 잡은 환관이 한 사람도 없다. 환관의 발호를 극도로 경계한 결과였다. 고려는 환관을 10명 이내로 제한하고 승진도 7품까지로 제한했으며, 조선은 환관을 천대하고 국정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독했다. 그 대신 고려에서는 폐행이 출현했다. <고려사> 열전에 올라 있는 최초의 폐행은 제7대 목종 때의 유행간(庾行簡)이다. 그는 남색(男色)으로 총애를 받았는데, 왕명을 내릴 때마다 그에게 먼저 물어봤으므로 사람들이 왕처럼 대우했다고 한다. 그는 문무 관리들에게 턱짓이나 얼굴 표정으로 지시할 정도로 위세를 부리다가 결국 목종이 시해되자 함께 죽음을 당했다.


몽골제국 간섭과 측근 정치 발호


고려의 폐행은 몽골과의 전쟁이 끝난 뒤 유난히 많이 출현했다. 당시 고려는 30년에 걸친 항전 끝에 나라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몽골제국의 정치적 간섭은 피할 수 없었다. 고려 국왕이 몽골에 의해 폐위되는 일이 벌어졌고, 국왕은 늘 폐위의 불안을 안고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의 국왕들은 자신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할 사람을 필요로 했고, 이것은 폐행이 자라날 최적의 환경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몽골어 통역관, 응방(鷹坊)의 매 사육사, 고려 국왕과 혼인한 몽골 공주의 시종 등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폐행으로 등장했다. 모두 몽골과 외교하는 데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통역관은 물론이고, 매 사육사는 매를 사육해서 몽골에 진상했으며, 몽골 공주의 시종들은 몽골의 실력자들과 다리 놓는 역할을 했다. 모두 국왕의 사적인 외교였다. 이 밖에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정치 환관도 다시 출현해서 폐행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의 폐행이 동시에 등장해서 세력을 이룬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측근 정치’라 할 만한 정치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측근 정치의 가장 큰 폐해는 권력이 폐행들에게 집중되면서 부패한다는 점이었다. 우선 자신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기 위해 인사 규정을 어기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재산을 늘리기 위해 법을 어기는 것도 다반사였다. 감찰 관리들을 제멋대로 능욕하고 왕에게 모함하여 쫓아냈으니, 말 그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이렇게 되자 관리 가운데 뜻있는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고 소인배들은 폐행에게 아부하여 관직을 구하는 것이 풍조가 되었다. 그러니 유능하고 청렴한 관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었겠는가. 그 피해는 그대로 백성에게 전가되어 권세가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과도한 수탈에 견디지 못해 고향을 떠나 유랑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최충헌의 최준문, 우왕의 이인임


밖에서는 외세의 간섭이 강하게 미쳐오고, 안에서는 폐행들이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관료사회는 무너지고 민생은 파탄에 이른, 그래서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나라 같지 않은 나라’가 되어버렸다. 그 원인은 국왕이 폐행을 중용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의 원인은 국왕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적으로 총애하는 사람들에게 공적 영역의 정치를 맡겼기 때문이다. 결국 권력의 사유화가 문제였다.


권력이 사유화되면 반드시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난다. 그 예로, 단연 무신정권을 꼽을 수 있다. 최충헌 집권기에 그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는데, 말로 하기 민망하여 사료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최충헌의 여종 동화는 미인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많이 통정했고, 최충헌과도 통정했다. 하루는 최충헌이 장난 삼아 ‘너는 누구를 지아비로 삼겠느냐?’라고 물으니, 흥해의 공생(貢生)이던 최준문이라고 대답했다. 최충헌이 즉시 최준문을 불러다가 가노로 삼고 대정(隊正)에 임명했다. 최준문은 대장군까지 승진했는데, 나날이 최충헌의 신임이 두터워졌으므로 최충헌에게 청탁할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청탁했다. 그는 최충헌의 집 옆에 큰 집을 짓고 살면서 최충헌의 오른팔이 되었다.”


최충헌이 국왕을 능가하는 권력자가 되자 수많은 사람이 그의 오른팔이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최준문은 진정한 오른팔이었다(그는 최충헌이 죽자 바로 최우에게 죽음을 당했다). 최준문이 최충헌의 신임을 얻는 과정은 엽기적이었지만, 당시 관료들이 최충헌에게 청탁할 일이 있으면 그에게 청탁했으므로 그 덕에 권세를 부렸다. 최충헌의 의중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서 누리는 지위였다. 그 청탁이란 대개 관직이었을 것이니, 이렇게 해서 고위 관직에 오른 사람을 상관으로 인정해야 했던 문무 관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려시대에 권력이 사유화된 또 하나의 시기는 단연 고려 말 우왕 때였다.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 출생의 석연치 않음 때문에 늘 불안해했다. 게다가 자신을 왕으로 세운 이인임이 정치를 좌우했으므로, 왕은 할 일 없이 노는 게 일이었다. 왕이 정치에 무관심하자 이인임은 자기 친·인척들로 조정을 채우는가 하면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관리들이 권력자의 집을 찾아다니며 관직을 구걸하는 행위를 ‘분경’(奔競)이라고 하는데, 우왕 때 “분경이 풍속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공공연하게 성행했다. 분경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이인임이 있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은 정치의 공공성을 회복하려 했다. 대표적으로, 정도전은 권력이 국왕에게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국왕이 존재하는 한 폐행은 언제나 출현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왕을 없애지 못한다면 그 권력을 최소화하고, 청렴하고 유능한 재상이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담당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언관(言官)의 기능을 강화하여 깨끗한 정치가 계속되기를 바랐다. 그의 꿈이 이루어져 조선은 오랫동안 환관은 물론 폐행이 출현하지 않는 역사를 갖게 되었다.


폐행이 성할 때


폐행은 언제나 국왕이 무능하거나 정치에 무관심할 때 출현했다. 그래서 자격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오로지 국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고, 그들의 폭정은 나라를 망치고 국왕도 망쳤다. 실제 중국에서는 환관이 발호할 때마다 왕조가 멸망했다. 고려에서도 폐행이 성할 때마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났고, 결국 고려가 망한 것도 권력의 사유화 때문이었다. 그런 세상에서는 유능한 사람들이 인정받지 못하고, 강직한 사람들은 쓰이지 못하며, 뜻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등지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도 정치는 공공의 것이어야 했다. 하물며 지금은 2016년이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