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을 위한 역사 12] 일제강점기 토건 피라미드

BoardLang.text_date 2016.09.30 작성자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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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토건 피라미드


 

한국역사연구회는 <시민의 한국사> 출간에 앞서 <한겨레21>에 15회 분량의 ‘시민을 위한 역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근대사분과 고태우 선생님이 기고한 글입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2223.html)


 

1932년 6월 조선을 뒤흔든 건설 비리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경성 토목 담합 사건’이다. 사건은 전 경성부 영선계장(영선계는 건축업무 부서)이 토목업자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면서 시작됐다. 경성부 전·현직 관리들은 영선계 야구부의 경비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토목 청부업자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착복했다. 그들은 관급 공사를 담당하는 직위를 배경으로 수십 차례 돈다발과 양주, 상품권까지 받았다. 토목업자에게 특혜를 주는 대가였다.

조선 경제계 중핵, 토목 청부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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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2년 11월1일치에 보도된 ‘경성 토목 담합 사건’ 관련 주요 검거 인물.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전 경성부 영선계장 고마다, 전 경성상업회의소 회두 와타나베, 조선상업회의소 회두 진나이, 조선토목건축협회장 아라이(동그란 사진 위), 충남토목협회장을 지낸 스즈키. 한국언론진흥재단


경성부 관리의 스캔들은 재계의 유력 토목업자들까지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로 확대됐다. 현재 대한상공회의소의 식민지 버전인 조선상업회의소 회두(회장), 전 경성상업회의소 회두, 조선토목건축협회(오늘날 대한건설협회에 비견. 이하 토건협회) 회장이 모두 기소되고, 주요 토목회사 사장과 간부들이 체포됐다. 그들은 모두 일본인으로서 당대 조선 건설업계를 주름잡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뇌물 제공뿐만 아니라 담합 혐의까지 받았다. 청부업자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며, 담합은 또 무엇일까?




조선 말 일본은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를 부설했다. 일본인 청부업자 가운데는 이때 철도공사에 참여하며 조선에 건너온 이가 많았다. 말 그대로 이들은 이후 조선총독부 등 관에서 발주하는 공사를 청부받아 성장했다. 청부업자들은 일본 정부와 정계, 총독부에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각종 관급 공사를 수주해 이윤을 추구했다. 또 그들은 토건협회 같은 이익단체를 결성해 일본 정계와 식민 당국을 대상으로 토건사업 예산 증액을 요청하는 등 로비 활동을 벌이며 사업을 확대해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선 내 경제계의 중핵을 차지했다.


일제 치하 공공 공사는 입찰 공고가 나면 최저가를 적어낸 업체에 낙찰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오늘날 한국에서 경쟁입찰시 최저가낙찰제가 통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토목 청부업자들은 미리 모의해 입찰가를 정한 뒤 특정 업체가 낙찰받을 수 있게 했다. 그들은 최고액 입찰가를 제시한 이를 공사 수주자로 삼고, 그로 하여금 입찰에서 최저액을 적어내도록 합의했다. 이때 담합에 참가한 업체들은 각자 담합금을 거둬 적립하고, 그 돈을 낙찰받은 업체를 제외한 나머지 업자들끼리 나눠 가졌다. 입찰에 떨어질 것을 만회하려는 수법이다. 당시 건설업자들은 최저가낙찰제 상태에서 입찰가를 일부러 높게 책정해 자신들의 이윤을 추구했다. 이는 공공 공사를 위해 조성된 세금, 국고가 낭비되는 것을 뜻한다.


담합은 단순히 권력자들의 금고만 채운 것이 아니었다. 채운 자가 있으면 빠지거나 빼앗기는 자도 있는 법이다. 담합을 통한 일본인 청부업자들의 공사 수주 독점은 조선인 업자를 소외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더구나 유력 토건업자들의 낙찰이 두드러지면 같은 일본인 기업 사이에도 차별을 낳을 수 있었다. 이처럼 건설업자 사이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발생했다.


쥐꼬리 임금 전표, 헐값에 내다 판 노동자


입찰 과정에서 불균형 문제뿐만 아니라, 건설청부업 내부의 ‘피라미드’ 구조가 가진 문제도 있었다. 공사를 수주한 청부업자는 직접 시공도 했지만, 공사의 일부나 전체를 다시 하청 형태로 다른 청부업자에게 넘기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에도 오늘날 한국 건설 현장의 하도급이 횡행했던 것이다. 이때 ‘원청’ 청부업자는 담합 과정에서 입찰에 응한 다른 업자들에게 분배할 담합금을 남겨야 했고, 담합금 손실에 따른 이윤을 확보하려면 공사대금의 일부를 담합금 이상으로 떼어냈다. 따라서 하청받는 청부업자에게 전달되는 공사비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원청과 하청 밑에 재하청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곧 원청-중간청부-하청부의 피라미드 구조였다. 이 경우 중간청부업자는 원청업자와 마찬가지로 이윤 획득을 위해 공사비를 떼어가기 일쑤였고, 하청부업자에게 주어진 공사대금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 구조에서 자금 부족으로 인한 부실공사는 불 보듯 뻔했다.


이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는 누가 있을까?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바로 공사 현장의 노동자다. 하청부업자는 공사를 하기 위해 현장감독을 두고, 노동자를 모집·통제하는 십장을 배치했다. 그 아래에 비로소 노동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노동자 사이에도 위계가 있었다. 소수의 숙련된 기술공과 대다수 비숙련 막노동꾼이 있었고, 일본인 노동자는 대체로 숙련공 비중이 높았다. 막노동꾼 조선인 가운데 대부분은 농촌에서 지주의 등쌀에 땅을 잃고 쫓겨나거나 돈 한 푼 손에 쥐어보려 공사장을 찾은 이들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각종 차별과 저임금 노동에 신음했다. 일본인 감독의 엄한 감시 아래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이중삼중의 하청 구조에서 공사대금이 줄어 착취당한 임금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심지어 하청부업자마저 자금이 부족해 공사임금을 체불하고 야반도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총독부 공식 통계에 하루 80전~1원으로 조사된 막노동꾼의 임금은 실제 하청 구조 속에선 40~60전 내외였다. 더구나 당시 건설 현장에선 임금을 현금으로 주지 않고 금액을 적은 쪽지인 전표로 대신해 월 2~3회 전표를 현금으로 교환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는 청부업자들이 노동력을 통제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전표제 아래에서 당장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급전이 필요한 가난한 노동자들은 전표를 헐값에라도 팔아야 했다. ‘초’저임금 상태에서 삶은 더욱 팍팍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유의 대의옥 사건,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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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말 한강개수공사 구역 내 용산 방면 방수제 설치 공사 현장. 한국언론진흥재단


때로 노동자들은 일본인 감독의 횡포와 청부업자의 착취, 임금 체불 사태 등에 저항했지만, 이민족이 지배하는 식민지의 경찰과 통치 당국은 그들을 도리어 탄압했고 그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할 제도는 부재했다.




다시 1932년 여름으로 돌아가자. 토목 청부업자들은 경성부 관리들의 묵인 아래 경성에서 인천에 이르는 도로 개수공사 입찰 과정에 담합한 혐의를 받았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담합 행위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러났다. 총독부 철도국에서 시행하는 강원도~함경도 일대의 철도공사, 각 도가 주체인 도로 및 교량 공사, 각 지방의 수리조합공사 등 수십 곳의 공사의 담합 행위가 탄로됐다. 여기에 조선의 주요한 토목업자들이 모두 가담해 있었고, 이들은 공사 계약금의 10~15%에 달하는 금액을 담합금 보전 목적으로 취득했다.


경찰은 150여 명을 검거해 105명을 검사 쪽에 넘기고, 검사국에선 88명을 기소해 재판에 회부했다. 70여 곳의 가택 수색, 130명을 대상으로 한 증인 심문이 이어졌고 취조 기록이 1만5천 장을 헤아렸다. 사법 당국이 넉 달에 걸쳐 전국의 토목공사장을 출장 조사하는 등 실로 “조선 초유의 대의옥 사건”이었다. 담합 사건에 연루된 자들이 워낙 조선 내 거물급이었고, 담합 대상이 된 공사 규모도 컸던 까닭에 변호인단 구성도 화려했다. 피고인들의 재력과 지위, 명망에 걸맞게 일본 법조계 권위자들로 구성된 수십 명의 변호인단이 꾸려졌고, 대학총장과 전직 총독부 관료 등의 변론이 이어졌다.


재판은 3년여를 끌었고, 결국 1936년 2월17일 고등법원은 피고인들에게 사기죄로 유죄판결을 내렸다. 관련자 전원은 징역 3개월에서 1년형을 선고받았다. 청부업자이자 조선상업회의소 회두 진나이 모키치(陣內茂吉)는 옥중에서 회두직을 사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력 건설업자들의 모임이자 토목 담합의 온상으로 지목받던 토건협회가 해산됐다.


그러나 토목 담합 비리가 근절되지는 못했다. 이후에도 경성 이외의 지역에서 담합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일제의 중국 침략을 계기로 1930년대 후반 이후 토건공사가 다시 활기를 띠었고, 여기에 기존 유력 청부업자들이 다시 가담했다. 사실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 중 대다수는 집행유예에 불과했다. 해체된 토건협회의 회원들은 총독부 정책에 협력한다는 방침 아래 새롭게 경성토목건축업협회를 설립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계속 추구했다. 관과 재계의 유착관계도 다시 맺어졌다.


식민 경험은 현대 한국 사회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쳤을까? 이 물음에 답하는 건 쉽지 않지만, 적어도 현재 상황이 식민지 때의 부정적인 모습과 왠지 닮아 보이는 것은 슬픈 일이다. 토건업만 놓고 볼 때도 정경유착과 담합 비리, 하도급 구조와 열악한 노동 상황이 그러하다.


현재 한국의 여러 업종 중 산재율이 가장 높은 것이 건설업이다. 현장에서는 매년 평균 5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수많은 건설노동자를 위험으로 내모는 이유는 악명 높은 다단계 하도급에서 찾을 수 있다. 하청이 많아지고 아래 단계로 내려갈수록 공사자금이 줄어든다. 기업들은 수익을 내기 위해 공사기간을 단축하고 인건비와 안전비용도 삭감한다. 비숙련 노동자가 고용되고 안전장비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 까닭이다.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으며 사회 갈등을 일으킨 4대강 사업은 어떤가. 2016년 현재 금강은 외계 생명체 같아 보이던 큰빗이끼벌레도 살기 어려운 곳이 되고 있다. 정부가 ‘명품 보’라 자랑하던 세종보의 수문은 얼마 전 폭우 끝에 작동을 멈추고 유압시설에서 기름이 유출됐다. ‘녹조라테’ 생산라인은 끊임없이 가동되고 이제는 사람까지 모자라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다. 대기업 건설사들은 입찰 담합으로 부당이득을 취해 적발됐으나 벌금 부과는 미미했고, ‘제재 기간’에도 정부 공사를 수주했으며, 2015년에는 8·15 사면 조치를 받기도 했다. 도대체 이 사업은 왜 추진됐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85년째, ‘토건국가’는 계속된다


지금도 막대한 세금을 쏟아붓는 공공사업이 일자리 창출, 지역 살리기를 명분으로 계속되고 있다. 많은 경우 사회 갈등과 지역문화·자연환경 파괴를 야기하고 있다. 이런 ‘토건국가’적 상황을 벗어나 우리는 어떻게 자원 분배의 민주성과 공정성을 구축하고 인간과 자연생태가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