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을 위한 역사 14] 독재의 본질은 反공감의 정치다

BoardLang.text_date 2016.10.12 작성자 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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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본질은 反공감의 정치다


 

이하나(현대사분과)








한국역사연구회는 <시민의 한국사> 출간에 앞서 <한겨레21>에 15회 분량의 ‘시민을 위한 역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현대사분과 이하나 선생님이 기고한 글입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23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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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박정희 정권은 새마음갖기 국민운동을 시작했다. 국민의 심리를 흔들어 ‘반국가적 행동은 위험한 것’이라는 ‘느낌’을 조작하려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 자격으로 당시 24살이던 박근혜씨가 궐기대회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한겨레)

 





이승만은 할리우드 영화 마니아였다. 개봉된 미국 영화를 빼놓지 않고 보았지만 인디언을 학살하는 비인도적 장면 때문에 서부극만은 보지 않았다고 한다.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 초청된 여배우에게서 영화계의 어려움을 전해듣고는 당장 국산영화 면세 조치를 단행할 정도로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박정희는 트로트 음악의 열렬한 애호가였지만, 당대 최고의 트로트 가요는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했다. 축구광이던 전두환은 국민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스포츠를 육성했는데, 결과적으로 그가 키운 것은 축구보다는 야구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독재자들의 개인적 성향과 문화정책 사이의 상관관계가 아니라, 독재자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문화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968년, 문화공보부가 발족됐다. 이는 종래의 문화부와 공보부를 통합한 것으로 문화가 공보의 하위 개념으로 공식화됐음을 의미했다. 이전까지 국민 계몽의 역할을 담당했던 문화 영역은 이제 정권의 의도와 의지를 국민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홍보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느낌’을 조장하고 ‘마음’을 지배하라


초대 장관 홍종철은 문화공보부 출범 당시 공보 활동의 주된 목표가 “국민에게 어떤 ‘느낌’을 조장하는 것에 있다”고 단언했는데, 이는 논리보다 감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파한 감성정치로서의 유신체제가 이미 이때부터 방향을 잡아나갔음을 보여준다.


이때 ‘느낌’의 조장이란 것이, 정권이 제시한 방향에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반국가적인 위험한 일이며 그 자체로 사회에서 격리, 배제돼야 할 감수성이라는 것을 국민이 은연중에 알아차리도록 유도하는 것이었음이 불과 몇 년 뒤에 드러났다. 유신체제 시기 대표적 관제운동이던 새마을운동이 ‘새마음운동’을 동반해야만 했던 이유는 경제개발계획과 새마을운동의 외형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민 대중의 마음을 얻기 쉽지 않다는 것을 위정자들도 눈치챘기 때문이다.


국민 대중의 느낌을 조장하고 마음을 조종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다. 문화를 지배하려면 대중문화 예술인들을 정권에 협조하도록 길들일 필요가 있었다. ‘심의’라는 칼을 휘둘러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고 보이지 않는 권력의 감시를 시시각각 체감하게 하며 나아가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드는 것은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할 문화예술인들을 길들이는 가장 손쉽고도 확실한 방법이었다. 5·16 군사정변 직후 많은 대중문화 예술인들이 각종 관변 행사와 궐기대회 등에 불려다니며 쿠데타 합리화에 동원된 것도 길들이기의 일환이었다.


문화공보부가 출범한 해에 시작된 음반 사전 심의로 인해 “국위를 손상시키는 음반, 민족 주체성을 해칠 수 있는 음반, 사회 기강과 윤리를 해치는 퇴폐적인 음반, 미풍양속을 해칠 염려가 있다고 보이는” 100여 개의 음반에 대해 제작, 배포, 판매, 공연을 금지한 것은 이후 닥칠 칼바람의 시작에 불과했다.


더 대대적인 대중가요 심의는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 직후에 벌어졌다. 3차에 걸친 심의 끝에 총 222곡이 금지됐다. 금지 노래에는 월북 작가의 노래 87곡을 비롯해 김추자·이미자 등 당대 최고 인기 가수들의 노래, 록과 포크 음악을 선도한 신중현과 이장희의 노래, 대학가를 풍미했던 김민기와 송창식의 노래가 포함돼 있었다.


금지의 사유는 가사 저속, 퇴폐, 불신 조장, 계급의식 조장, 비탄, 불건전, 치졸, 창법 저속, 왜색, 품위 없음 등이었는데 그 자의적 기준과 악의적 해석은 대중문화 예술인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노래의 가사가 유신정권 풍자라거나,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거나, 가수의 율동이 북한에 보내는 수신호라는 식의 믿지 못할 루머와 설명도 입증도 안 되는 ‘느낌적인 느낌’이 횡행했다.


정권이 보기에 저속하고 퇴폐적인 청년문화의 온상이 된 포크와 록 음악은 불온하기 그지없는 것이었기에, 이를 연행하는 가수들을 대마초 흡연 혐의로 연달아 구속해 권력에 대한 공포를 심어줌과 동시에 대중이 이들을 외면하도록 유도했다. 자유로운 발상과 표현이 생명인 문화예술인들을 정부가 ‘건전’하다고 정해준 노랫말만을 되뇌는 기능인으로 전락시키려 한 것은, 실은 지배세력이 문화에 저항정신이 결합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 통제, 감성의 규율과 훈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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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는 대중의 감성을 가르치고, 규율하려 했다. 당대 최고의 가수 심수봉·김민기(상단 왼쪽부터)의 노래가 포함된 대중가요 222곡을 금지 처분한 것이 대표적이다. 전두환 정부는 1982년 프로야구를 출범시켜 우민화 정책을 폈다(아래쪽). (한겨레)

 




대중문화 통제의 핵심은 대중의 감성 자체를 규율하고 훈육하려는 데 있었다. 대중문화가 쏟아내는 감성에 대한 규율의 논리는 1970년대 대중문화의 중심에 놓인 TV에 집중되어 있었다. 가전산업 육성과 유행처럼 번진 TV 구매 열풍에 힘입어 TV 수상기의 보급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재미난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에 마음을 빼앗긴 대중은 1960년대 대중문화의 꽃이던 영화를 등지고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TV 방송은 지배적인 가치관과 금지된 감수성이 경합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긴급조치 9호 직후 선포된 ‘방송정화실천요강’에는 방송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실천요강과 금지사항이 엄격히 규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제시한 지켜야 할 가치의 대표적인 것은 “국론을 비롯한 공공적인 것, 건전한 것, 질서 잡힌 것” 등이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선도와 순화가 행동 지침으로 명시되어 있다. 반면 금지해야 할 가치와 정서의 대표적인 것은 가족·지역·계층 간의 갈등을 비롯한 “사적인 것, 퇴폐·선정적인 것, 질서가 없는 것”이며, 기존 질서를 문란케 하고 분열시키는 행동은 금지되어 마땅한 것이 된다.


TV는 이처럼 국가가 규정한 공적 감수성과 사적·통속적 감수성의 경합처이면서 늘 한쪽의 일방적인 패배가 예정되어 있는, 그렇다고 결코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리라는 것도 너무나 명확한, 역설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건전한 것이고 무엇이 저속하고 퇴폐적인 것인지, 그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정하는 것일까? 단어의 정의를 독점한 국가는 감성마저 정의하여 독점하려고 한다. 국가가 구현하려는 ‘건전’하고 ‘명랑’한 사회, 공중도덕, 미풍양속 등의 가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지향해야 하는, 그래서 오히려 공허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TV의 연예·오락 프로그램이 기반하고 있는 통속적 감수성은 항상 ‘지금, 여기’ 존재하는 욕망과 관련 있다. 이러한 욕망은 지배층이 허용하는 범위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기에 더더욱 불온한 것으로 간주됐다.


국가가 금지하고 혐오한 통속성 중에서도 가장 백안시됐던 ‘퇴폐’는 명시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 방황을 암시하는 일종의 분위기(풍조)를 뜻하는 것이었다. ‘저속’은 재미만을 추구하고 품위와 현실감각이 없는 것을 뜻했으며, ‘국민총화’의 과제를 안고 있는 유신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민 계몽의 적으로 치부됐다.


감정의 과잉을 나타내는 감상성(센티멘털리즘)은 신파성과 마찬가지로 눈물과 한숨, 체념을 동반하기 때문에 ‘건전’한 국민 정서 함양에 방해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밝고 명랑한’ 사회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슬픈 노래는 환영받지 못했으며,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드러내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말하자면 통속적 감성에 대한 대중의 몰입은 국가가 제시한 공적 목적에 부합하는 ‘국민적 감정이입’(National Empathy)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격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국민이 개·돼지로 보이는 이유 ‘대중 혐오’


1970년 신민당 국회의원 김대중은 개발독재 옹호론자들이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대중정치를 혐오한다고 분석했다. 첫째, 대중은 무식하고 학식이 없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둘째, 대중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셋째, 대중은 선동 정객에게 표를 매수당한다. 넷째, 대중은 언제나 권위지향적이며 자조력도 발전 의욕도 없다. 다섯째,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가 똑같이 한 표씩 갖는 것은 불공평하다.


이같은 대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대중문화에 대한 몰이해를 야기하며 이는 결국 대중에 대한 불신으로 악순환된다. 권위주의 독재정권은 대중이 사적 영역에서 키우는 공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정부가 각종 규제 조치를 통해 대중의 욕망과 불온성을 통제할 때, 지식 엘리트들은 이를 위계적 시각에서 비판함으로써 그 통제책을 합리화했다. 국가의 부름을 받은 각종 심의위원회의 위원들은 완장을 차는 순간, 하루아침에 동료에서 상전으로 돌변해 동료 문화예술인을 궁지에 몰아넣는 데 협력했다.


독재는 권력을 독점한 자와 그가 구축한 지배 시스템에 합류해 이권을 챙기려는 일부 지식 엘리트들의 합작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독재체제의 본질은 논리만이 아니라 감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의’(定義)를 독점함으로써 국민 대중의 열망과 요구를 외면하고 그들의 심정에 공감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문화의 중요성을 잘 알았기에 문화를 두려워하고 억압했던 과거의 독재자들이 지배한 시대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감히 국민 대중을 개·돼지로 표현한 관료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소통과 공감을 거부하는 정치문화와 사회 분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를 뜻한다는 걸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