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주의 역사학과 그 후계, 사이비 역사학

BoardLang.text_date 2016.10.26 작성자 강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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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원·기경량(고대사분과)



※ 이 글은 기경량, 2016 「사이비 역사학과 역사 파시즘」 『역사비평』 114 ; 강진원, 2016 「식민주의 역사학과 ‘우리’ 안의 타율성론」 『역사비평』 115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이상의 원고는 경희대학교 한국고대사ㆍ고고학연구소(IKAA) 웹진()에도 게재되었다.



‘식민주의 역사학’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와 정책에 기여하기 위해 한국사를 왜곡한 역사학”을 일컫는다. 식민주의 역사학의 주요 내용은 타율성론·정체성론·만선사관·반도적 성격론·당파성론·사대주의론·일선동조론 등이다. 이를 총론적인 것과 각론적인 것으로 나누어 보자면, 전자는 타율성론·정체성론이요, 후자는 나머지라 할 수 있다. 전자는 후자의 논의가 성립함에 기본적 토대를 제공하였고, 바꿔 말하자면 후자를 통하여 전자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고도 하겠다.

그 가운데 타율성론은 한국사의 전개 과정이 한국인의 자주적 역량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세의 간섭과 영향에 따라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관점이다. 타율성론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고 이해되어왔던 것은 만선사관과 반도적 성격론이다.

만선사학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만한경영(滿韓經營)’이 전면화하면서 ‘만선사학’이 등장한다. 일제의 영향력이 조선을 넘어 남만주까지 미치게 되자, ‘만선(滿鮮)’을 하나의 역사적·문화적 지역으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만선사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주 지역으로 진출하는 일제에 학문적인 기여를 함에 있었다. 만선사는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에 의해 주창되었고,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에 의해 체계화되었는데, 주된 관심 대상은 고대사였다.

만선사관은 만선사학의 관점을 일컫는다. 주지하듯 만선사관에서는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가 하나의 단위로 파악된다. 즉 만주의 역사가 중국으로부터 분리되어 한반도의 그것과 관련성을 맺게 된 것이다. 단, 그렇다고 하여 만주사와 조선사가 하나로 통합된 것은 아니었으며, 양자는 병렬적으로 존재하였다. 더욱이 만주사와 조선사가 동등한 지위를 점하고 있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만주사가 중심이었고, 조선사는 종속된 위치였다. 한국사 전개의 주도 세력을 일선동조론에서의 일본에서 만주로 바꿔놓은 것인데, 조선사가 만주사에 종속된다고 인식한 이유는 조선이 만주에 부속된 반도라는 지리적 특징 때문이다. 즉 만주가 조선에 영향을 끼친다는 만선사의 관점은 반도적 성격론과 맥이 닿아 있다.

만선사 연구에서 가장 중시된 국가는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영역을 보면 그 역사는 만주사이면서도 조선사에 속하였기에, 만선사 개념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만선사 연구자들은 고구려가 중국과의 대립 및 전쟁을 통하여 발전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고구려는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대상이었고, ‘만선일여(滿鮮一如)’를 실현한 국가였으며, 조선을 병합한 일제의 만주 진출은 고구려의 발자취를 뒤이어 새로운 발전을 하는 것이라고까지 이해되었다. 그리고 만주와 반도를 아우르던 고구려의 멸망은 만선일가(滿鮮一家)가 파탄을 맞이한 사건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만선사는 사실에 근거한 치열한 논쟁이나 확고한 학문적 정의가 결여된 채, 일제의 대륙 침략이라는 현실의 수요로 인하여 급조되었다. 따라서 논의 전개 과정에서 모순된 면모도 드러났다. 첫째, 만주사와 조선사의 구분이 모호하였다. 만선사의 연구 내용은 한반도와 만주에 있었던 각 공동체들의 역사를 취합하였을 뿐, 어떠한 하나의 세계를 연구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사와 만주사는 병존하였고, 고조선사나 발해사를 어디 역사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 뚜렷한 입장이 서지 못하였다. 둘째,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대한 영향력을 긍정하였다. 이는 조선사가 만주사에 종속된 존재라는 만선사의 기본 이해와 배치된다. 셋째, 만선사의 시기적 범주가 분명치 않았다. 신라가 반도를 통일한 이후, 한반도와 만주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즉 만선사의 기본 전제가 무너졌다. 그럼에도 만선사 연구자들은 청-조선시대까지 다루고 있다.

이상과 같이 만선사는 그 파급력에 비해 상당히 허약한 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나마 체계화를 시도한 이나바마저도 역사적 고찰에 의해 그러한 인식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만선 지배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만선불가분’의 역사를 제창한 것을 보면, 이는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점은 일제의 팽창이 지속됨에 따라 또 다른 역사 연구가 본격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몽골 방면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만주와 몽골을 묶은 ‘만몽사’가 나타났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국 내륙으로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동아사’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전략적 범위가 남태평양까지 확대됨에 따라 ‘대동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만선사가 만몽사·동아사·대동아사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의해 창조된 자의적·편의적인 역사단위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아울러 일제의 한국사·동양사 인식 자체가 현실적 필요에 따라 변모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만선사관은 ‘당면한 현실이 창출한 과거’라 하겠다.

한편 반도적 성격론은 한국의 역사가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특히 대륙과 해양에 위치한 외세의 영향에 의해 수동적으로 변화해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반도적 성격론의 본격적인 전개는 1930년대부터 이루어진다. 반도적 성격론은 지정학, 그중에서도 환경결정론의 기초 위에 서 있었다.

지정학에서 환경결정론적 경향이 강해진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인데, 그 핵심에는 국가의 자연적 특성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지정학에서의 국가는 유기체적 존재였다. 때문에 환경결정론적 시각을 따를 경우, 국가의 흥망성쇠는 그 나라가 처한 환경에 의해 결정되며, 지리적 위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일본에 그러한 흐름이 유입된 것은 1925년 이후 독일로부터다. 일본이 보다 넓은 영토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가 지정학적으로 뒷받침되었고, 특히 만주사변 이후에는 만몽(滿蒙)을 잇는 지역이 일본의 생명선으로 강조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환경결정론적 시각에서 반도적 성격론이 가시화된다.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는 한국사가 대륙 세력(중국 본토·만주)과 해양 세력(일본)의 소장(消長)에 따라 영향을 받아왔다고 여겼다. 보다 대표적인 논자는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이다. 그는 한국사는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외세에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파악하였다. 나카무라 히데다카(中村榮孝)는 한반도가 대륙에 부속된 반도였기 때문에 중국 문화의 영향이 짙었으며, 그 역사는 대륙국가에 대한 종속적 체제 확충으로 점철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들은 한국사의 전개에서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을 특히 중시한 것이다. 지리적 여건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한국사는 시종 타율적인 숙명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리적 요인은 역사 전개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동체의 운명에 결정론적인 파급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영구적인 속성을 확정해주지도 못한다. 반도적 성격론에 따르자면 반도에 자리한 국가들은 모두 타율적이고 종속적이며, 결국 외세의 영향 아래 놓여야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반도의 로마나 대항해시기 이베리아반도의 에스파냐·포르투갈만 보더라도 반도적 성격론에 부합하지 않는 역사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서남아시아 산유국들이나 근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흥망성쇠에서 보이는 것처럼 지리적 요인의 영향이 크다 한들, 그 또한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갖는다.

실제 한국사를 살펴보아도 외세에 대한 주체적인 항전 태도는 물론이요, 외래 문물의 영향 또한 국내 정치 세력의 역학관계나 사회·경제적 구조에 따라 변화하였다. 반도적 성격론에 부합하지 않는 양상이다. 실제 1816년부터 2007년까지 국가 간 발생한 전쟁들을 분석해보면, 비반도국이 반도국을 침략한 경우보다 반도국이 비반도국을 침략한 경우가 더 많다. 반도에 있어서 외세가 침입한 것이 아니라, 여러 여건에 따라 반도가 전장이 될 때가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단적인 예가 한국전쟁으로, 다른 변수가 동일하다면 열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환경결정론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팽창과 독일 제3제국 침략 전쟁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면모는 반도적 성격론도 마찬가지다. 반도에 위치한 조선은 자력으로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일제의 지배는 정당화되었다. 반도적 성격론은 환경결정론과 일제 군국주의와의 만남이 낳은 사생아라 하겠다.

한국 학계에서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식민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타율성론을 포함한 식민주의 역사학은 상당부분 그 힘을 잃어버렸다. 다만 아직까지 그 그림자가 말끔히 거둬졌다고는 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사례가 재야사학, 이른바 ‘사이비 역사학’의 대두이다. 사이비 역사학은 “한국 상고사를 주된 연구 대상으로 하며, 과거 국가의 영토와 이상에 집착하는 일련의 비합리적 행위”를 일컫는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역사 연구에서 ‘사이비’라는 용어로 해당 움직임을 명명한 이유는 그 행태가 학문적 범주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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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대표적인 상고사 관련 위서들

극단적인 쇼비니즘에 심취한 이들은 『규원사화』와 『단기고사』, 『환단고기』 등의 위서(僞書)를 기초로 웅대한 고대사를 창조하고자 한다. 그런데 식민주의 역사학 청산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사고를 ‘민족주의 (역)사학’이라 칭하는 이들이 특히 염두에 둔 것은 타율성론, 그 가운데서도 반도적 성격론이었다.

반도에 위치한 국가의 역사가 시종 수동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는 점은 앞서 언급하였다. 그런데 사이비 역사학계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반도적 성격론을 극복하려 하였다. 바로 한국사가 반도에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대륙에서 이루어졌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결과적으로 반도적 성격론의 극복이 아니라 내면화였다. 겉으로는 식민주의 역사학을 비판하고 거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이론을 그대로 자기화환 기괴한 쇼비니즘이 탄생한 것이다.

사이비 역사학의 특징은 한국인의 우월성 강조, 광대한 영토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음모론이다. 자신들의 역사상을 뒷받침하는 문헌적․고고학적 증거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일본인들과 현재 학계의 주류인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은폐되거나 제거되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또한 자신들의 주장을 부정하는 수많은 반증 자료들에 대해서는 일본인이나 ‘식민사학자’들이 날조해 낸 가짜라고 주장하거나 거론 자체를 거부한다. 이러한 사고 구조 하에서는 어떠한 대화나 학문적 검증도 불가능하다.

사이비 역사학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위대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인과 머나먼 상고사 속에서나마 강대국의 구성원이 되고픈 욕망이다. 민족의 우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타국에 대한 비하와 적대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전문가 집단인 역사학계 전체를 ‘식민사학’으로 매도하며 그 권위를 깎아 내리기 위해 대중 선동을 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반지성주의와 파시즘의 양상을 보인다.

사이비 역사학은 수십 년에 걸친 지속적인 선전․선동으로 광범위한 대중화에 성공하였다. 예컨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의 공식 서포터즈인 붉은 악마의 엠블럼인 ‘치우천왕’은 사이비 역사학계가 만들어낸 가짜 역사서 『환단고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소설․만화․드라마와 같은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환단고기』의 내용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부 천문학자들이 위서에 실린 천문 기록을 ‘사실’로 소개하고 있다. 모 신흥 종교 단체에서 교세 확장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그들이 운영하는 케이블 방송을 통해 관련 내용이 상시적으로 방영되고 있기도 하다.

문제의 심각성은 대통령의 연설문에서조차 사이비 역사학의 그림자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광복절 축사에서 『환단고기』(1979)가 독립 운동가 박은식이 쓴 『한국통사』(1915)의 문장을 베껴서 변용한 부분을 인용하여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14679544424_f3dcd3fa0c_b[그림2] 축구 국가 대표 서포터즈인 ‘붉은 악마’의 엠블럼인 ‘치우 천왕’. 위서인 『환단고기』의 내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이비 역사학이 대중들에게 수용되는 양상을 보면 특이한 지점이 확인된다. 명백하게 파시즘을 기반으로 한 주의․주장임에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없다. 이는 사이비 역사학이 표면적으로 ‘민족주의’와 ‘반식민사학’을 내세운다는 점에 기인한다. 사이비 역사학자들은 역사학계의 주류를 친일파로 매도하고 그 대척점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며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때문에 실제로 친일파 청산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기 쉽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들의 사고가 이러한 주장에 쉽게 동조할 만큼 쇼비니즘에 취약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들 상당수는 식민주의 역사학을 부정하면서도, 다른 면에서 그것의 계승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관점을 지닐 것인가? 첫째, 넓은 영토에 대한 집착의 지양이다. 설령 과거 영토 확장과 지리적 위치가 중요한 변수였다 한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오히려 다른 측면에서의 개발과 확장을 통해 진보해야 할 것이다.

둘째, 역사란 다양한 요인이 얽혀 전개된다는 점의 인지이다. 어떤 시기 두 공동체의 우열관계는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며, 또 그 원인이 지리적 조건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도 않는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관련 사실을 취합하여 진실에 도달하는 자세, 혹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아울러 지정학적 위상 또한 시대에 따라, 대상국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셋째, 일관성 있는 관점의 견지이다. 한국사의 영역을 축소한 만선사관은 비판하면서도, 중국 동북방 제족(諸族) 대개를 한국사의 범주에 포괄하려 한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역사학 연구자들의 견해에 찬동하는 것. 그리고 반도적 성격론은 부정하면서도 일본이나 중국·미국의 국민성을 섣불리 판단하고 찬양 내지 혐오하는 것은 그다지 건강한 태도가 아니다.

넷째, 당면한 현실에 부응하기 위한 학문 연구에 대한 경계이다. 역사학은 어떠한 담론을 먼저 세우고 그 틀에 사실을 조립해 넣는 학문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여 한 시대의 구조와 체계를 논하는 경험론적 사고에 기인한 학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시민들은 정부나 국가권력이 뜻하는 바를 연구자들에게 강요하지는 않는지, 학문 연구가 정책적 목표에 좌우되지 않는지 지켜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