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리사 평전 - 일제 강점기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푸른역사, 2008)

BoardLang.text_date 2008.07.29 작성자 한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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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
『차미리사 평전』(2008,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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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


한상권(중세사2분과)




올해 7월 출간한『차미리사 평전-일제 강점기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푸른역사)는 『조선시대 사회문제와 소원제도』(1996, 일조각)를 집필한지 10년이 넘어서 낸 책이다. 이 두 책은 친연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 문제의식이 서로 다르므로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시대연구자가 일제 강점기 인물 평전을 출판한 데 뜬금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기에 집필 과정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겠다.

이 책은 나의 해직을 계기로 집필되었다. 따라서 먼저 복직투쟁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복직투쟁 과정에서 한국역사연구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이번『차미리사평전』 출간을 계기로 뒤늦게나마 연구회 회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복직운동에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셨던 많은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말씀을 드리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1. 개학과 함께 날아온 해직 통지서

  1997년 3월 1일 아침, 나는 아침잠이 덜 깨인 상태에서 부인이 학교로부터 왔다면서 건네주는 한통의 속달편지를 뜯어보았다.

제목: 임기만료 통보
귀하는 1997. 2.28자로 본 대학 교원직의 임기가 만료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덕성여자대학교 총장


  개강 하루 전날 통보받은 이 문서 한 장으로 나와 덕성여대와의 인연은 끝나는 듯싶었다. 지난 10여 년간 학교 당국으로부터 갖은 박해와 불이익을 받아 왔기에 학교에 대한 미련도 그다지 없었다. 내 발로 걸어 나가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까지도 하였다.

해직통보서를 받은 그날은 딸 예선이가 중학교에 입학하여 교복을 맞추러 가는 날이기도 했다. 학교가 보낸 해직통지서를 한 번 더 읽어본 후, 딸과 부인의 교복 맞추러 간다는 인사말을 뒤로 한 채,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에서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이 날의 해직이 차미리사 평전을 집필하는 계기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2. 뒤늦게 밝혀진 재임용탈락 사유

  나는 1991년 “학교와 재단의 전복을 기도하였다”는 이유로 정직 3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1989년 덕성여대 평교수협의회 2대 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재단이사장의 일방적 총장 선임 기도에 저항하며 총장직선제를 주장하는 등 인사행정의 부당성에 항의하였으며, 1990년 동료교수가 강제해직되자 복직투쟁을 위하여 장기간 농성에 참여하는 등 사학민주화 활동에 참여한 사실을 이유로 1991.7.24 교원징계위원회로부터 중징계처분을 받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임용기간이 만료되는 1993년에 해직되는 것은 예견된 사실이었다.

  그러나 운 좋게도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학의 비리를 뿌리 뽑겠다며 사정 1호로 상지대 이사장을 구속하는 바람에 나는 재임용되었다. 재임용기간이 다시 만료된 1995년(나는 서명교수로 낙인찍혀 1987년 6월 항쟁 덕분에 조교수로 승진한 후 계속 승진대상에서 배제되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 사립대학은 조교수 재임용 기간이 4년인 반면 당시 덕성여대는 2년이었다.)에는 이사장의 측근 교수가 반기를 드는 바람에 다시 재임용되었다. 그리고 1997년 마침내 해직된 것이다. 총장, 교무처장, 인사위원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재임용탈락 사유를 확인하였으나 “미안하게 되었다”는 답변뿐이었다.

나의 재임용탈락 사유는 학교 측이 국회 설훈 의원실에 제출한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학교측이 제출한 경과서에는, “1997년 2월 25일 교원인사위원회에서 임기만료 교원에 대한 재임용 여부를 심사하였으나, 한상권 교수는 1991년 7월 31일 교내질서를 문란케 하여 3개월 정직의 중징계를 받았으나 이후 계속 반성 및 개전의 뜻이 보이지 않아 재임용대상자로서 부적절하므로 임기만료자로 재임용 제외를 제청하였다”라고 적혀 있었다. 1991년 중징계 처분을 받은 이후 “개전의 정”이 없어 재임용탈락 되었다는 것이다.

3. 교수, 시한부 임시직

  정부는 교수재임용제도를 도입하면서 근본취지가 교수들의 연구 활동을 촉진하고 향상시켜 대학교육의 질을 높인다는데 있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일부 사립대학에서는 교수재임용의 기준과 절차가 법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법률상의 허점을 악용하여 재단의 비리와 전횡을 비판하는 양심적인 교수를 강단에서 축출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었다. 재임용 요건과 거부당한 교원에 대한 구제절차를 법률로 마련하지 아니한 채 재임용권한을 학교법인과 총ㆍ학장의 자유재량에 맡긴 결과 임명권자가 교수재임용제를 멋대로 악용하게 된 것이다.

교수재임용제의 공식명칭은 ‘기간제임용제’다. 교육공무원법 및 사립학교법 등에 “기간을 정하여 임용”이라고 규정하고 있어 ‘기간제임용제’라고 칭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교육부의 공식입장이다. 교수재임용제와 기간제임용제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내포되어 있다. ‘교수재임용제’라고 칭할 경우, 재임용기대권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교수들은 누구나 대학의 규정에서 요구하는 일정한 기준(연구, 강의, 봉사)에 합당하면 재임용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재임용기대권을 갖고 있다.

  어느 교수도 임기만료가 되면 자신이 당연퇴직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즉 교수재임용제라는 명칭 속에는 이 제도가 ‘심사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기간제임용제’는 심사제가 아닌 계약제다. 계약제는 심사제와는 달리 재임용기대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계약제일 경우 약정된 임용기간이 만료됨으로써 대학 교원으로서의 신분관계는 당연히 종료된다. 심사제는 기간이 만료된 교원에 대해 대학교수로서의 연구 능력 및 자질 등을 검증해 재임용 여부를 결정해야 할 의무가 있는 반면, 계약제는 기간이 만료되면 당연히 퇴직되며 대학교원으로서의 신분은 당연히 종료되므로 심사할 필요가 없다. 교육부는 물론 사법부에서도 교수재임용제를 계약제로 해석하고 있었다. 재임용의 의무나 절차와 조건 등이 법률적으로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수재임용의 기준과 절차가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교수의 지위가 법률적으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재임용관련 법규가 없으므로 재임용시비를 둘러싼 재판이 성립될 수 없다. 재임용탈락자가 사법부에 소(訴)를 제기하면 재임용여부는 사법부의 심사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동 각하되었다. 게다가 대학교수는 근로기준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였다.

  재임용은 민법상의 계약관계인데, 교수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였다. 교육부 교원징계재심위원회에 소청을 하여도 재임용탈락은 징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역시 자동 각하되었다. 대학교수의 법률적 지위는 시한부 임시직에 불과한 것이다. 대학교수는 재임용탈락시 사법부에 재심청구조차도 할 수 없는 무권리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이 때문에 인사권자인 이사장과 총장은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며 얼마든지 마음에 안 드는 교수를 솎아낼 수 있었다. 이는 헌법에서 보장하는 ‘교원지위법정주의’에 위반되는 것이지만 재임용탈락자가 전체 교수의 0.1%도 안 되므로 좀처럼 사회문제화 되지 않았다. 학교측이 “학생 소요 선동”, “근무자세 불량”, “교원 품위 손상”, “교수 자질 부족”, “연구 능력 부족”등 추상적인 용어를 동원하여 재임용탈락처분을 합리화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재임용탈락이 법적ㆍ제도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수 개인의 자질문제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보통 재임용탈락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면 학교 측의 부당함을 인정하면서도 한편 교수에게도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양비론적인 평가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문제의 본질은 비켜가고 당연히 논의는 상대적 약자인 교수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1980년 전두환정권 하에서 부활된 교수재임용제도는 대학사회에 재갈을 물리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었다.

4. 복직추진위 구성

  나의 재임용탈락 사실은 한겨레 사회면 톱기사로 보도되면서 운 좋게도 사회문제화 될 수 있었다. 1997년 3월 8일(토) 종로 계동에 있는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 사무실에서 안병욱, 박종기, 김인걸, 안병우, 이세영, 이영호, 김성민(철학) 교수 등이 모여 「덕성여대한상권교수재임용탈락처분철회추진위원회」(추진위)를 결성하고 복직운동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해직된 교수의 재임용탈락처분을 무효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었다. 재임용탈락처분이 부당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불법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현행법상 학교나 재단에게 해직된 교수의 재임용을 법률적으로 강제할 수단은 없었다.

추진위에서도 재임용탈락처분을 철회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덕성여대가 재임용제를 악용한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사회적인 공분을 불러일으키기로 하였다. 그리고 한상권 교수가 덕성여대에서 억울하게 재임용탈락 되었다는 사실을 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 서명 작업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추진위는 한국사학계 원로교수들을 추진위 대표로 모시기로 하고 접촉한 결과, 한영우(서울대), 이태진(서울대), 김정배(고려대), 이만열(숙명여대), 조동걸(국민대), 이범직(건국대) 교수 등을 공동대표로 모실 수 있었다.

추진위는 1차적으로 전국대학 사학과 교수를 대상으로 한상권 교수 재임용탈락처분철회를 촉구하는 서명을 받기로 하였다. 한국역사연구회가 서명 작업을 추진하는 기간조직이 되었다. 한역연 소속의 각 대학 교수들이 헌신적으로 서명을 받은 결과, 서명 작업에 착수한지 열흘 만에 역사학 전공자 서명교수가 600명이 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서명 작업이 역사학계에 뜨거운 호응을 얻자, 언론에서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덕성여대 한상권(韓相權)교수 재임용탈락 파문으로 학계(學界)집단 반발’(문화일보), ‘사학자 한상권교수 재임용탈락 철회 서명확산’(동아일보), ‘덕성여대 한상권 교수 재임용 탈락 항의 서명 - 64개 대 619명’(중앙일보) 등으로 보도하였다.

1차 서명운동의 열기에 고무된 추진위는 학계전체로 서명운동을 확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진보적인 연구단체를 망라한 학단협과 민교협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나는 1996년부터 학단협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었고 민교협 회원이기도 하였기에 이들 두 단체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기에 유리하였다.

  이처럼 싸움의 구도가 「학계 ↔ 사학재단」으로 설정되자 언론들도 커다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학계의 서명운동 움직임에 대해 주요 일간지에서 잇따라 보도하였으며, 방송에서도 뉴스와 특집방송(추적60분:「교수직이 불안하다-악용되는 교수재임용제」)으로 교수재임용제의 문제점을 방영하였다.

  내가 2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거대한 사학재단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재임용탈락 문제가 학계전반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의 해직문제를 학계로 확산시키는 데에는 한역연과 학단협과 민교협의 조직적인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5. 투쟁백서의 발간

1997년 5월 7일(수)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서울대성당 강당에서 첫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문은 추진위 공동대표인 이만열 교수가 직접 참석하여 낭독하였다. 추진위는 그동안 전국 80여개 대학 2,500 여명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서명운동에 동참하였음을 밝히며, ① 한상권 교수 재임용탈락처분 즉각 철회 ② 덕성여대 비리 의혹에 대한 교육부의 전면 감사 ③ 사학재단에 의해 악용되는 교수재임용제의 폐기 또는 합리적인 개정 등 3개항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지난 2개월간의 활동 자료를 모아 발간한 『덕성여대한상권교수재임용탈락철회투쟁 백서』(Ⅰ)을 공개하였다.


  이날 기자회견장에는 김진균(서울대), 장임원ㆍ이재윤(중앙대) 등 원로교수를 비롯하여 김상곤(한신대), 박진도(충남대), 강정구(동국대), 박거용(상명대) 등 학단협ㆍ민교협 대표, 그리고 한역연에서 안병욱, 박종기, 김인걸, 이세영, 이영호, 주진오, 박종진, 박진태, 정연태, 이세영, 노영구, 배경식 등이 참석하였으며, 이 밖에도 이헌창 교수와 덕성여대 졸업생 등 40명가량이 참석하였다.

서명운동의 확산과 투쟁백서의 발간은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투쟁백서의 발간은 복직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추진위는 나의 재임용탈락 사건이 한 개인의 문제로만 또 단순한 일회적인 사건에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투쟁의 전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하였다. 그 결과 1997년 재임용탈락 이후 1999년 복직까지 매일매일 사건의 전개상황을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하게 되었다.

나는 복직투쟁을 시작하면서 타협이나 협상을 통해서는 절대로 복직이 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나의 복직은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비타협, 불복종, 투명성의 3원칙을 세웠다. “나의 복직이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이 되려면 ‘언제’ 복직되는가 보다 ‘어떻게’ 복직되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하였다. 그것이『덕성여대한상권교수재임용탈락처분철회투쟁백서』였다.

  복직투쟁 2년간 투쟁백서를 다섯 권 발간하였다. 투쟁백서에는 덕성여대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에서 나온 자료들과 언론보도, 통신자료 그리고 학교측이 교육부나 정부에 제출한 자료들까지 사건 전반에 대한 모든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사건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효과적인 대응을 하는데 투쟁백서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6. 복직의 기쁨

  2년간의 복직투쟁 동안 80여개 대학의 3,000여 명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두 차례에 걸쳐 서명운동에 참여하였고, 덕성여대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농성이 계속되면서 나의 복직여부가 사학민주화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만큼 부각되었다. 마침내 1999년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해찬 의원이 초대 교육부장관에 임명되는 등 기득권층의 지형에 변화가 생기면서 나는 해직된 지 2년 만에 특별임용형식으로 복직되었다.

  그동안 복직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추진위 명칭도「덕성여대한상권교수재임용탈락처분철회및교수재임용제도개선추진위원회」로 바뀌었고, 공동대표도 이재윤(전국사립대학교수협의회연합회회장, 중앙대), 권광식(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서울지회장, 방통대), 강정구(학술단체협의회상임공동대표, 동국대), 안병욱(한국역사연구회전회장, 가톨릭대), 이석태(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전사무처장, 변호사), 장운(전국대학노동조합연맹위원장), 박원순(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사무처장, 변호사) 등 각 조직의 대표가 맡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나의 복직은 사학재단의 교수재임용탈락처분을 학내 구성원과 사회 민주세력이 연대하여 뒤집은 성공사례로 많은 해직교수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복직투쟁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립재단 전체와 교수 전체와의 싸움에서 교수사회가 승리했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나는 해직 전만해도 학자는 연구실이 우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직은 우주의 개념을 사회로 확대해야 함을 절실히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2년간 재단과의 싸움은 가치관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한 인간의 양심을 금력, 권력, 물리력으로 훼손하려 할 경우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에게도 커다란 불행을 안겨다 준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나의 해직은 개인적으로는 분명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불행도 대처하는 방식에 따라 행운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나는 복직투쟁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실례로 1997년 3월 이후 1999년 7월까지 모인 성금만 해도 4,384 만원이었는데, 이중 잘 모르는 분들이 보내준 성금도 꽤 많다. 그리고 2005년 10월 11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1997.2.28 해직된 사실은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해직당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통보받음으로써 징계건도 명예회복 되었다.

7. 『차미리사 평전』 집필

  1997년 4월 21일(월) KBS 추적60분:「교수직이 불안하다-악용되는 교수재임용제」와 관련하여 숙명여대에서 이만열 교수의 인터뷰가 있었다. 방송사와의 인터뷰가 끝난 후 이만열 교수는 자신의 해직시절 이야기를 담은 책『한 시골뜨기가 눈떠가는 이야기』를 나에게 건네주면서, 해직을 “어디선가 우연히 날아온 돌에 재수 없어 맞은” 셈 치라며 위로해주었다. 나는 이만열 교수의 세심한 배려와 따뜻한 격려에 고마워하며 그 책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틈틈이 읽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과연 나의 해직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인가”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재임용탈락! 이것은 분명 내가 선택한 삶은 아니었다. 그러나 설사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나에게 닥친 엄연한 현실이었다. 해직이 자의건 타의건 나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분일진데, 이 현실 속에서 합리적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주어진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순종할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황폐화 될지도 모르는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납득할만한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부당한 해직은 교육의 공공성이 파괴되는 가운데서 일어났다는 것이 내가 내린 최종 결론이었다. 덕성여대가 파행적으로 운영되어온 실태는 1997년 7월 교육부의「민원사안감사결과처분서」에 잘 드러나 있다.

  교육부는 감사를 통해 (1) 이사장의 대학학사 제도적ㆍ관행적 간섭 (2) 이사장의 교원 임용 심사ㆍ제청 간섭 (3) 사무관리 인사관리 부적정 (4) 이사장의 교무행정 전반 간섭 (5) 이사장의 대학 예산편성ㆍ집행 및 특별사업적립금 조성 간섭 (6) 이사장의 학교회계 시설공사 간섭 (7) 수익용 기본재산 수익의 학교운영경비 전출 부적성 (8) 학교법인 운영 부적성 등 8개 항목에 걸쳐 146건의 위법적이며 부당한 사실을 밝혀내고 박원국 이사장을 해임하였다. 박원국 이사장은 교육의 공공성을 부정하고 대학을 사유화 하려는 과정에서 나를 걸림돌이라 생각하고 해직시켰던 것이다.

박원국 이사장은 자신이 학교의 주인 즉 교주(校主)라는데 근거하여 대학의 사유화를 정당화하였다. 모친 송금선이 덕성여대를 설립하였으므로 적장자인 자신이 교주이며, 교주가 대학을 자신의 뜻대로 경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나의 복직투쟁을 비난하는 교내 인사들도 이 주장에 동조하여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이사장의 전횡을 합리화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현행 사립학교법상에도 맞지 않는다. 법리상 사학을 운영하는 학교법인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공익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사학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사회의 공기(公器)다. 학교법인의 기본재산은 기본적으로 사회에 환원된 공익재산인 것이다. 사학 재단은 어느 한 개인이 아무리 많은 재산을 투자했더라도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이에 대해 재산권을 주장하는 것은 민법과 사립학교법에 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난해한 법리 논쟁으로는 일반인들을 설득시키기가 쉽지 않다.

그러던 중 국정감사장에서 덕성여대 설립자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1999년 교육부가 제출한 사립대학 역대 이사장 명단에 따르면, 덕성여대의 설립자는 차미리사이며 2대 이사장인 송우영(송금선의 부친)은 설립자와 특수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 덕성여대 설립자 차미리사는 어떤 인물이며 어떻게 해서 친일파 송금선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2000년 [건학 80주년, 덕성여대뿌리찾기대토론회]가 열렸다. 여기서 덕성학원 설립자 차미리사는 역사에서 잊혀진 독립운동가이었으며, 친일파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가 이루어지지 못한 까닭에 친일파의 후예가 민족사학을 차지하고 주인행세를 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국 현대사회의 모순이 덕성여대에도 그대로 농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날 대토론회를 계기로 학교법인 덕성학원을 설립한 차미리사가 어떤 인물인지 사료를 통해 밝혀내고 이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과제가 주어졌다. 나는 이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해직 당시 내가 주장하였던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방향”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작업은 나의 복직을 위해 온갖 희생을 감수하였던 덕성여대 학생들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해서 차미리사평전 집필 작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