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2010, 너머북스)

BoardLang.text_date 2011.01.10 작성자 한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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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2010, 너머북스)

 

한상권(중세사2분과)



<그림 1>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2010, 너머북스)


 

1. 이 책은 필자가 덕성여대에서 해직된 1997년부터 박원국 덕성여대 이사장의 연임이 좌절된 2001년까지 5년 동안 일어난 일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기간에 덕성여대에는 교육부 특별감사 두 차례,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 네 차례, 관선이사가 세 차례 파견되었다. 또한 직무대행을 포함해 이사장이 일곱 명, 총장이 다섯 명 교체되었다. 덕성학원 이사장 임기가 5년인 점을 감안할 때, 직무대행을 제외하고 이사장이 다섯 번 교체된 5년의 기간은 평화로운 시기의 25년에 해당한다.그만큼 덕성민주화운동은 치열했다.

2-1. 덕성민주화운동은 빼앗긴 권리를 되찾으려는 ‘권리투쟁’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기억 투쟁’,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내가 해직된 후 ‘동토의 왕국’이라 불리던 덕성에서 기본권을 되찾으려는 ‘권리투쟁’이 일어났다. 사회의 공기公器인 대학을 사유물로 여긴 이사장의 그릇된 교육관 때문에 일어난 저항이었다. 재단 이사장에게 초법적인 권한을 부여한 사립학교법이 그의 일탈된 행동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어느 사립대학보다도 낮은 급여와 열악한 근무조건, 끊임없이 발생하는 부당한 해직, 비싼 등록금에 턱없이 못 미치는 낙후된 교육시설, 무분별한 학부제 시행 등 암울한 교육환경에 맞서 교수, 직원 그리고 학생은 빼앗긴 교육권․ 학습권․ 노동권을 되찾기 위해 일어섰다.

2-2. 권리투쟁은 절대화된 권력에 맞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양심적이며 이성적인 개인은 절대화된 권력을 비판하기 마련이다. 절대 권력과 타협하는 순간 이성과 양심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덕성인들은 현실에 맹목적으로 순응하거나 이기적으로 적응하기를 거부하고, 창조적인 의식을 바탕으로 기본권을 되찾기 위해 싸웠다. 그 과정에서 대학 본연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맞닥뜨렸다. 이사장은 자신을 ‘교주校主’, 즉 학교의 주인이라고 일컬었다. 학교가 자신의 사유재산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립학교의 자주성을 확보하고 공공성을 앙양할 목적”으로 제정된 사립학교법에는 설립자의 소유 관념이 없다. 교육은 공공재公共財이기 때문이다. 덕성민주화운동은 대학을 사유물로 볼 것인가, 공공재로 볼 것인가라는 가치관 사이의 갈등이기도 했다.

2-3. 기존의 질서에 대한 도전은 그 지배질서에 내재하고 있는 가치 체계나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억투쟁’은 중요하다. 덕성학원은 모자 세습에서 형제 세습으로, 형제 세습에서 다시 부자 세습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족벌 세습재단이었다. 게다가 덕성학원 설립자라고 일컬어지는 송금선은 친일파, 즉 반민족행위자였다. 덕성학원은 단순한 족벌 재단이 아니라 친일 족벌 재단이었던 것이다.

덕성인은 기억을 둘러싼 투쟁 끝에 덕성학원 설립자가 친일파 송금선이 아니라독립운동가 차미리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 결과 덕성여대는 친일 족벌 사학의 오명을 벗고 정통 민족 사학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차미리사 가치’와 ‘송금선 가치’ 사이의 대립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간의 반세기가 넘는 긴 싸움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덕성민주화운동은 우리 사회가 친일파에 의해 오염된 역사를 청산할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3-1. 자신의 ‘소극성을 자책하는 깊은 수치심’이 덕성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었다. 맹자가 일찍이 설파한 것처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의로운 행동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羞惡之心 義之端也]. 일반 학생들은 ‘나는 약하다. 평범하다. 그러나 나는 약한 대로 평범한 대로 무엇을 하고 싶다.’라는 소박한 마음으로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상식에 배치되는 힘 앞에 굴하지 않겠다.’라는 학생들의 의지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결의대회에 5,000여 명의 전교생 가운데서 1,000명 이상이 모이곤 하여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름 없이 행동하는 학생들이 모여 거대한 ‘사회적 힘’을 형성한 것이다.

3-2. 덕성민주화운동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연대하여 투쟁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는 교직원과 학생, 학내 민주세력과 사회민주세력, 졸업생과 재학생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사회 각계의 원로인사를 비롯해 수많은 민주세력이 덕성사태를 보고 연민의 시선을 넘어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들은 기자회견, 서명운동, 성명서 발표, 항의·지지방문, 집회 시위, 성금모금, 항의농성, 공개 강연, 신문 칼럼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덕성민주화운동을 도와주었다. ‘한국역사연구회’, ‘전국사립대학교수협의회연합회’, ‘학술단체협의회’,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전국대학노동조합연맹’, ‘참여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교육·사회·시민 단체들은 ‘덕성여대 한상권교수 재임용탈락처분 철회 및 교수재임용제 개선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덕성민주화운동을 조직적·체계적으로 지원했다.

4. 지난 10여 년 동안 기억과 기록 속에 갇혀 있던 덕성민주화운동을 세상으로 불러내는 계기가 된 것은 2008년 한국역사연구회 운영위원회를 마친 뒤에 가진 회식 자리였다. 그때 나는 한국역사연구회 웹진 ‘나의 책을 말한다’ 란에 『차미리사평전: 일제강점기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를 소개하면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덕성에서의 해직이라고 밝혔다. 식사 자리에서 운영위원들은 해직에서부터 복직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덕성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글로 써서 남기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성민주화운동이 우리 사회에 던진, ‘대학의 자유정신’, ‘법치주의’, ‘교육의 공익성’, ‘친일잔재 청산’, ‘국가권력의 공공성’, ‘공동선의 추구’ 등에 관한 문제제기와 의미는 원칙과 상식이 실종된 지금의 우리사회에서 더없이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국역사연구회 웹진 사이트에 ‘나의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2008년 10월부터 2010년 5월까지 햇수로 3년 동안 연재하였고, 그 글을 가다듬어 이번에 책으로 내게 되었다.

5-1. 역사학자 부르크하르트(Jakob Christoph Burckhardt, 1818-1897)는 역사란“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찾아낸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였다. ‘역사적 의미’라는 관점에서 무수히 많은 과거의 사실로부터 중요한 것을 선별해 재구성한 것이 역사란 말이다. 그렇다면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있어야’ 할 현실의 도래를 절실히 갈구하면서, 그 필연성을 확신하고 투쟁한 덕성사람들의 숨결을 되살리는 작업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역사의 진보를 위해 안간힘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잊혀져버린 사람들의 사회적 투쟁을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평가하는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Eric John Ernst Hobsbawm, 1917~)의 말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되리라 본다.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없이, 자유와 정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 없이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20세기에 실제로 그렇게 살다가 간 사람들을 기억조차 해주지 않고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가 오늘을 올바로 살기 위해 올곧은 세상을 염원하는 수많은 순수한 영혼의 희생을 ‘기억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5-2. 세상을 바꾸려는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민중의 의지를 발굴하는 작업은, 세상일에 대해 앞서의 사람들과 똑같은 문제의식을 느끼면서, 그들과는 달리 자기들의 의분(義憤)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또 그로 인해 좌절감을 느끼는 요즈음 사람들에게 의지와 열정을 불어넣어 주는 일이기도 하다.

홉스봄은 말했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우물물을 마시기 전에 우물을 판 사람의 수고를 기억하자. 저절로 좋아지는 세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