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밀사: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 외교(1925∼1926년)』(푸른역사, 2012)...

BoardLang.text_date 2013.03.02 작성자 임경석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모스크바 밀사: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 외교(1925∼1926년)』(푸른역사, 2012)


임경석 (근대사분과)


   이 책은 1925-1926년 시기에 조선공산당 대표자들이 모스크바에서 행한 정치․외교적 활동상을 재현한 글입니다. 코민테른(국제공산당)에 파견된 밀사들의 언행을 자초지종 추적했지요. 천신만고 끝에 모스크바에 도착한 밀사들이 외국인 맑스주의자들과 만나 조선공산당을 국제공산당에 가입시키기 위해서 동분서주한 경과를 기록했습니다.




등장인물이 꽤 많은 편입니다. 한 나라의 공산당을 국제당에 가입시킨다는 과제가 결코 만만한 게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제당에 연관을 맺고 있는 외국인들도 다수 출연합니다. 서사도 복잡합니다. 한 사람의 밀사가 한번 걸음 끝에 단숨에 과제를 달성한다는 단선적인 줄거리가 아닙니다.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다수의 사건들이 중첩되어 있고, 사건 상호간에 복잡한 연계가 숨어 있습니다.

이처럼 복잡한 대상을 글로 재현하려는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다 겪는, 의미 있지만 힘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서사 구조를 짜는 일이지요. 이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좋은 글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서사 구조가 허약한 책을 읽는 독자들은 사람 이름과 사건들이 뒤섞인 요령부득의 글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시간 순서에 따라서 사건을 배열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 시간 순서야말로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를 용이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니까요.

다만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등장인물의 경중을 나눴습니다. 역할이 무겁고 정보량이 많은 인물을 부각하고 그렇지 않은 인물을 소략하게 다뤘습니다. 주인공을 세웠습니다. 모스크바에 파견된 조선공산당의 두 밀사, 조봉암과 조동호가 그들입니다. 이들의 행적을 뒤쫓았습니다. 마치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카메라가 등장인물의 동선을 집요하게 추적하듯이 말입니다. 주인공의 말과 행위에 관한 자료를 낱낱이 수집하고 분석했습니다. 그들에 관련된 기록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소홀히 대하지 않았습니다. 편지에 남긴 사적인 소감이나 전보 쪼가리 한 장에 담긴 정보도 눈여겨 살폈습니다.

주인공들만 줄곧 등장한다면 이야기가 지루하겠죠. 그래서 그들과 대립되는 입장에 놓인 사람들도 주목했습니다. 반대파가 있었습니다. 1925년 4월 창립대회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이 국제당에 가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창당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당 외 공산주의 그룹 사람들이 그러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저는 두 패를 대비시켰습니다. 모순된 위치에 있는 쌍방의 행위와 사유를 십자로처럼 교차시켰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야기 전개에 긴장감을 넣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대립하는 쌍방의 동선을 충돌시키고 그들의 논리와 심리를 대비함으로써 역동적인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등장인물들의 대립과 모순을 중충화시켰습니다. 조선공산당의 국제당 가입을 둘러싼 의견 차이는 조선인들 내부에서만 생긴 것이 아니라, 국제당의 외국인 공산주의자들 속에서도 표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쌍방의 대립과 긴장을 이중으로 묘사하고자 했습니다. 단층집이 아니라 2층집을 지은 셈입니다.
이야기를 짜는 방법만이 아니라 의미를 제시하는 데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저는 이 책이 역사학 학설사의 전개과정에서 일보라도 의미 있는 전진을 이룩했다고 평가받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기존 연구 성과 속에서 오류의 정정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들였습니다. 그 결과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 사이의 상호관계에 관한, 오랜 고정관념에 대해 이견을 제시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양자는 전적으로 지배․종속 관계에 놓여 있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조선공산당은 국제당의 하부기관이었고 그 결정과 지시에 무조건 복종해야만 했다는 관념이지요. 게다가 국제당의 결정은 조선인의 참여가 배제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이뤄져 왔다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허수아비 이미지입니다. 어리석고 피동적인 인간상입니다. 냉전 시대와 분단 체제가 낳은 이데올로기적인 역사상입니다만, 뜻밖에도 학계 안팎에 널리 유포되어 왔습니다. 이념에 치우치지 않은, 성실한 일부 연구자들마저 이러한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데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 관념은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고정관념이 실제에 부합한지 여부를 문제시 삼았습니다. 근거가 충분히 제시되어 있는지 따져 보았고, 논리적 짜임새가 적절한지도 살펴보았습니다. 1925∼1926년 모스크바 밀사들의 언행을 현미경 들여다보듯이 상세히 관찰함으로써 기존 고정관념의 진위를 따지는 단서를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국제당의 어떤 결정이 실행에 옮겨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조선혁명운동의 실제 요구에 부합했기 때문임을 밝혔습니다. 하나의 결정이 실제로 집행되는지 여부는 국제당의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혁명운동의 현장 적합성에 따라서 좌우되었던 것이죠. 국제당의 결정이라 하더라도 조선 혁명운동의 구체적 실정에 부합하지 못한 탓에 폐기되거나 실행 지체된 사례를 제시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더군요.

미개척의 처녀지를 개간하는 데에도 공을 들였습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조선공산당의 국제당 가입이 언제, 어떻게 이뤄졌는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 관한 정보는 코민테른 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러시아 국립 사회정치사문서 보관소(РГАСПИ) 외에는 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인 학자들이 모스크바의 문서 보관소에 출입할 수 있게 된 것은 냉전이 끝난 뒤였습니다. 되돌아보니 냉전이 종료된 이후로 벌써 20여년이 지났군요. 그 사이에 국제당의 한국관련 문서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국내로 반입되었고, 그중 상당수는 한국어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무대 뒷면에 감춰져 있던 미지의 역사를 밝은 조명아래 환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연구사상 제가 비로소 밝혔다고 자부할 수 있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먼저 조선공산당의 국제당 가입이 두 단계를 거쳐서 이뤄졌음을 확인했습니다. 1925년 9월 결정서와 1926년 3월 결정서가 그것입니다. 두 결정서의 내용과 의미를 해명했고, 각 결정서가 채택되는 과정이 단순치 않음도 밝혔습니다.

조선공산당 창립을 둘러싼 복잡한 내부 갈등도 드러냈습니다. 1925년 4월 창당대회를 준비한 사람들이 왜 블라디보스톡에 소재하는, 국제당 직속의 고려 공산당 창립대회 준비위원회(당준비회)를 배제했는지를 해명했습니다. 또한 당 외 3개 공산주의 그룹(고려공산동맹, 까엔당, 스파르타쿠스당)이 조선공산당의 국제당 가입을 반대한 까닭도 설명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국제당에 소속된 외국인 공산주의자들이 조선 문제에 관해서 단일한 입장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음을 밝혔습니다. 보이틴스키와 쿠시넨을 중심으로 하는 두개의 그룹이 국제당 비서부와 동방부 주위에 포진해 있었고, 이들이 조선공산당의 가입 문제에 관하여 갈등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 의문들을 해명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한국역사연구회가 기획한 대중화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3년 전에 우리 연구회 집행부가 채택한 출판 기획안에 따라서 준비되고 집필된 책입니다. 원고지 분량이 500매입니다. 문고본 크기의 약 200쪽 분량의 책이지요. 문학 장르에 비하자면 ‘중편’에 해당합니다. 채웅석 전 회장을 비롯한 집행부 성원들은 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함으로써 역사 대중화의 새로운 모델을 창출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 기대가 실현 가능할 뿐 아니라, 머지않아 실제로 구현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서점을 찾는 젊은 독자들이 호주머니 사정을 그다지 걱정하지 않은 채, 또한 완독 부담감을 덜 느끼는 심리 상태에서 손쉽게 꺼내볼 수 있는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구회 회원 한 사람이 한권씩 쓰는 걸로 추산하면 머지않아 200∼300권의 한국사 관련 중편 단행본들이 서가에 빼곡히 꽂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중 몇몇은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것들도 있겠지요. 아무튼 제 글이 우리 연구회의 새로운 역사대중화 프로젝트를 성공의 궤도로 올려놓는 데에 작으나마 기여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책장》시리즈는 그간 역사의 대중화에 매진해왔던 연구회의 노력의 결실이다. 본《역사책장》시리즈는 대중들이 손쉽게 구입, 읽을 수 있도록 문고본 형태로 출간되고 있다. 더불어 대중들에게 쉽게 읽힐 수 있도록 연구자 특유의 딱딱한 서술이 아닌 현장감을 살리는 생생한 대중적 서술을 도모하고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임경석 선생님의《모스크바 밀사》(한국역사연구회 역사책장 03)는 바로 이러한 출간 취지에 부응하여 ‘일제 강점기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 외교’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쉽게 풀어낸 역저라 할 수 있다. 현장감 있는 생생한 서술에 일반 대중들도 자연스럽게 몰입해 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역사연구회 연구위원장 전덕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