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기 민족운동의 순교자들』(신서원, 2013)

BoardLang.text_date 2013.07.29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여명기 민족운동의 순교자들』(신서원, 2013)



반병률 (근대사분과)

1

   역사 발전은 희생과 투쟁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그나마 자유와 독립을 누리고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역사의 진전을 위해 투쟁한 이들의 희생 덕분이다. 비록 우리가 자력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을 축출하지 못하고 외세의 도움으로 광복을 맞았지만, 이 땅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스러져간 이들을 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역사공부를 시작하면서 냉전과 남북분단체제의 영향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학계와 대중들의 역사인식과 이해가 지나친 편중과 불균형의 상태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 동안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지역, 인물, 단체에 보다 큰 관심을 두게 되었다. 지역적으로 해외, 특히 러시아 원동지역과 중국 동북지방의 한인사회와 민족운동, 이념적으로는 왼편에서 활동한 인물이나 단체를 발굴하고자 노력했다. 이 책은 이러한 학문적 노력에 대한 중간적 결산이라 할 수 있다.


   인물사 연구는 역사학을 전공한 이래 필자가 일관되게 노력을 기울여온 분야 가운데 하나이다. 거대담론이나 이론보다는 구체적인 인간들의 삶의 모습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1980년대 한국사회과학계를 풍미했던 사회구성체논쟁도 필자에게는 그다지 큰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학부시절 변혁운동과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졌던 입장에서 이들 논쟁의 의의를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현란하고 복잡 난해한 이론적 치고받기의 논쟁과정에서 격동의 역사과정에서 전개된 사람들의 삶의 궤적과 고뇌가 빠져버린 건조함을 느꼈다.


   되돌아보면, 한국근현대사의 인물들 가운데서도 특히 남북분단과 냉전으로 인해 잊혔거나 과소평가된 이들에 우선적으로 주목하고 이들에 대하여 보다 큰 관심과 애정을 쏟아왔던 것 같다. 한국근현대사에서 적지 않은 족적을 남겼음에도 알져지지 않았거나 잘못 인식되고 있는 인물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일을 역사학자로서 담당해야할 사명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2


   이 책에 수록된 글 8편은 발표된 시기로 보면 1990년부터 2012년에 이르는 긴 세월에 걸쳐 있다. 개인적으로 박사과정으로부터 대학 현직에 이르기까지 신분상의 변화가 있었고, 활동공간도 해외에서 국내로 옮겨왔다. 수록된 글들 가운데 6편은 개별 인물을 다루고 있지만, 1편은 두 분, 나머지 1편은 네 분을 함께 다루었다. 이 책에 소개된 열 분은 이념과 노선, 활동지역과 분야, 심지어는 국적을 달리하였지만, 전쟁과 혁명의 시대였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기에 이르는 시기에 조국의 주권 회복과 자주독립, 그리고 국제연대를 위한 투쟁의 전선에서 싸우다 희생된 이들이다. 이른바 한국 민족운동의 여명기를 개척한 선구적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림 1]  김알렉산드라(맨왼쪽)와 사범학교시절의 조선인 학우들  ⓒ반병률



이들 가운데 이범진과 이위종은 부자관계로 모두 외교관으로 러시아에서 주권회복을 위해 활동했고, 특히 이위종은 러시아혁명이후 시베리아내전에도 참여한 점에서 특별한 주목을 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난 한인2세인 김알렉산드라 외에 이들은 모두 국내에서 태어났고 최재형은 9살의 나이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들의 국적은 대부분 한국 국적을 가졌으나, 김립이나 이위종은 활동의 편의상 주재국의 국적을 취득했고, 최재형, 김알렉산드라는 러시아국적의 소유자였다. 


   이 책에 등장한 열 분의 애국지사들은 그 활동무대가 국내, 중국 관내, 중국 동북지방(만주), 러시아, 몽골 등으로 다양하다. 이들은 크게 보면 조국을 사랑한 애국자였으며 민족주의자였으나, 정치이념은 군주론자로부터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이범진은 순국까지 근왕주의적인 군주론자의 면모를 유지했고, 이위종 역시 부친 이범진의 영향 아래서 군주론자로 활동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말년에는 러시아 볼쉐비키당에 가입하였다. 김립이나 이태준은 민족주의자로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김알렉산드라은 청년시절부터 사회주의적 활동에 참여하였고 러시아 원동지역 볼쉐비키당의 핵심간부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림 2]  상해시절의 이동휘와 고려공산당 핵심간부들. 앞줄 맨오른쪽 김립. 오른쪽으로 박진순, 이동휘, 신원미상인물, 뒷줄 맨왼쪽  김철수, 가운데 계봉우, 신원미상인물  ⓒ반병률



이들이 희생된 방식 역시 일본의 강제병탄에 절망하여 자결순국한 경우(이범진), 일본정부의 재판에 의해 처형된 경우(안중근), 체포된 후 재판절차 없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경우(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러시아 백위파에 의해 피살된 경우(김알렉산드라, 이태준), 같은 독립운동세력에 의한 정치적으로 피살된 경우(김립) 등으로 다양하다. 이위종의 경우 1924년까지 생존한 사실만 확인될 뿐 안타깝게도 그 말년을 확인할 수 없다.


3


   이 책에 소개된 인물들 가운데는 저자의 글에 앞서 많은 연구를 통해서 이미  학계와 일반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안중근, 이범진, 이위종), 저자의 글을 통해서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된 경우도 있다.(김알렉산드라, 이태준, 김립,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1920년 4월참변 당시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은 2004년에 처음으로 4월참변추모제가 시작되어 현재는 당시 희생된 러시아혁명가들과 함께 한.러 공동추모제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재형의 경우는 많이 소개되어 있는 편이지만,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세 분의 경우는 사진조차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림 3]  몽골 울란바토르 이태준기념공원내의 이태준기념관  ⓒ반병률



김알렉산드라나 이태준의 경우처럼, 필자에 의해서 학계에 처음으로 소개된 이후 다른 연구자들에 의하여 연구논문이나 대중적인 글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경우도 있다. 특히, 이태준의 경우는 저자의 글을 통해서 그의 삶과 활동이 알려지게 되면서 몽골정부, 연세대 의대동창회, 울란바토르의 연세친선병원과 한국주재 몽골대사관 등의 노력으로 2000년 7월 울란바타르에 이태준 기념공원이 세워지고 한국과 몽골의 친선의 상징적인 인물로 감격스럽게 부활하여 연구자로서 큰 감동을 느꼈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의 내용은 일률적이지 않다. 전 생애를 다룬 경우도 있지만(김알렉산드라, 김립, 이태준), 대부분은 생애의 후반에 중점을 두고 서술했다. 글들의 배치 순서는 편의상 글의 주역이 희생되거나 사망한 시점의 선후에 따라 배치하였다.


4


   이 책에서 소개한 열 분 가운데 아홉 분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서 서훈을 받았다. 특히 국제주의적 입장에서 선구적으로 러시아의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였던 김알렉산드라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것은 러시아, 중국, 일본 등 해외에서 전개된 반식민지, 반제국주의운동에 참여한 항일혁명가들에 대한 합당한 평가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유독 김립만이 김구 등 임시정부측 인사들에 의하여 정치적 암살을 당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임시정부측 입장만을 존중하고 있는 학자들의 편파적 인식의 영향으로 항일애국자로서 제대로의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림 4] 『여명기 민족운동의 순교자들』(신서원, 2013)  ⓒ출판사 여유당



선구적인 항일혁명가 김립을 불명예의 굴레에 가두어 두려는 일부 학자들과 보훈당국의  이러한 문제점은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지적되었다. 일찍이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의 박노자 교수가『한겨레 21』(655호, 2007년 4월 12일자)에 기고한 칼럼「‘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에서 ‘동족테러’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한 바 있고, 성균관대학의 임경석 교수가『서울신문』(2012년 11월 19일자) 에 기고한 글(「선택! 역사를 갈랐다(35)-독립운동가 ‘김립’ vs 그를 비난한 ‘김구’)에서 김립이 ‘공금 횡령범’이라는 불명예 속에 지금도 갇혀 있다며, “사후 90년 동안 김구가 찍어 놓은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표명하였던 것이다. 저자의 글이 김립의 역사적 명예회복과 복권을 위한 학문적 근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며, 그때에 가서야 왜곡되고 편향된 한국근현대사가 제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