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조선초기의 對外征伐과 對明意識」

BoardLang.text_date 2014.04.15 작성자 이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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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조선초기의 對外征伐과 對明意識」



(2013. 8.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이규철(중세2분과)


처음 박사논문을 구상할 때는 석사학위논문의 주제로 다뤘던 ‘조선 초기의 정보’에 관한 내용을 확대해서 글을 쓰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석사논문을 쓰고 나서 가장 많이 받았던 ‘조선이 수집했던 대외정보를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학위논문 준비를 위해『조선왕조실록』을 다시 읽다보니 조선초기의 대외정보 활동 기록이 ‘정벌(征伐)’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크게 늘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더라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결론이었지만 그동안 사료를 단편적으로 해석하고 정리하는 작업에 급급하다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조선초기의 대외활동에서 정보수집과 분석, 정벌이 갖는 중요성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갖는 연관성을 잘 생각하지 못했다.


   조선의 대외정벌에 대한 관심은 세종대 대마도 정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처음 실록을 읽을 때 대마도 정벌이 단순히 왜구의 침입에 따른 보복성 군사 활동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또 당시 대마도 정벌이 조선과 대마도 혹은 일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중국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의 대마도 정벌이 동아시아의 15세기 국제관계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고 싶었다. 아울러 대외정벌이라는 외교 활동이 결코 짧은 준비를 통해 이루어질 수 없었고, 오랜 준비를 통해서만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결국 이와 관련된 연구를 2009년『역사와 현실』에 발표했다.


   하지만 이때는 ‘정벌’을 크게 다룰 생각이 없었다. 대마도 정벌에 관한 논문을 썼던 것도 당시 개인적으로 다루고 싶었던 주제였기 때문이지, 보다 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초기의 정보활동과 15~16세기의 대외관계, 정벌에 관련된 실록의 기사들을 살펴보면서 이 문제들이 큰 틀에서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조선초기에는 유독 활발한 대외정벌 활동이 이루어졌다. 대외정벌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병력과 군수, 작전과 이동 시간 등을 모두 고려해서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더욱이 다른 정책과는 달리 실패했을 때 감당해야 할 정치ㆍ사회적 위험성 등을 생각한다면 순간적인 판단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은 아니라고 보았다. 또 정벌이라는 방식의 공격적 대외정책은 주변국과 대립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림 1]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사본  ⓒ일본 류코쿠대학 소장



조선에서 가장 공격적인 대외정책이었던 정벌을 자주 선택했던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외부 세력의 행동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대외정책에 따라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기 때문에 정벌이 자주 시행될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15세기의 조선이 정벌을 자주 추진했던 논의과정과 각각의 정책들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할 수 있다면 당시 조선이 가지고 있었던 역량과 대외의식의 실제 모습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조선의 국왕들은 항상 대외정벌을 추진하고 실제로 시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조선전기에 정벌이 갖는 의미와 조선의 정치ㆍ외교적 목표를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대외정벌의 주류를 점했던 여진(女眞) 정벌은 명목상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명(明)과 이해관계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조선이 건국과 함께 내세웠던 사대(事大)는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결국 조선은 사대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치로 인식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대외관계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용어를 중심으로 설명돼 왔다. 그리고 조선의 외교 방식 역시 ‘사대’와 ‘교린’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사대교린으로 조선초기의 국제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15세기의 조선은 주변 세력에게 공격적인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태조에서 성종까지의 집권기에는 국왕들이 누구보다 사대를 강조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사대에 구애받지 않고 대외정책을 결정했던 상황들이 자주 나타났다.

   특히 조선의 대외정벌은 명과의 의견대립을 부를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고, 실제로 명은 조선의 여진 정책들을 견제했다. 이 점에서 주목되는 부분이 바로 조선의 대명의식이다. 조선의 여진 정책과 명의 견제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조선이 자신만의 정책을 고수한다는 것은 사대명분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15세기의 조선은 사대보다는 여진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더욱 자주 보였다.


   이 같은 조선의 외교적 태도가 가장 직접적으로 표출되었던 정책이 바로 대외정벌이었다. 정벌은 한 국가의 대외정책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외교 활동이다. 정벌의 시행은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변 국가와 세력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15세기의 조선은 정벌을 자주 시행하면서 국제관계를 정립하고자 했다. 따라서 조선이 정벌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대명의식을 설명하는 것은 당시의 국제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조선 초기 대외정벌의 원인과 결과, 이를 둘러싼 조선과 명ㆍ여진의 의식 등을 살펴본다면 14~15세기 동아시아 대외관계의 실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울러 정벌을 둘러싼 국내외의 정세와 국왕과 신료들의 의식을 살펴봄으로써 조선 초기 대외의식의 의미와 변화상을 설명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