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논문 -「고구려 진파리1호분 연구」

BoardLang.text_date 2016.03.03 작성자 전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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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고구려 진파리 1호분 연구
(『역사와 현실』95, 2015.3 )


 

전호태(고대사분과)


 

1.고구려 고분벽화 읽기는 어렵다!

금석문이 아닌 한 한국 고대 유적에서 문자 기록을 찾기는 극히 힘들다. 드물게 명문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사례에 속한다. 120기를 넘어선 고구려 벽화고분도 마찬가지이다. ‘글’이 별로 없다. 357년 묵서명이 있는 안악3호분, 408년 묘지명이 있는 덕흥리벽화분은 기년 확인이 가능한 경우이나 모두루총은 묘지명이 있음에도 기년이 확실치 않다. 그나마 묵서명을 통해 무덤의 주인공이나 그의 가문에 대한 정보가 전해지는 까닭에 연구자들의 눈길을 한껏 받는 유적들이다.

어떤 이는 부장되었던 유물이 거의 완벽히 사라진 석실분에 벽화라도 남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한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시라. 아예 벽화도 없다면 그저 수많은 석실분 가운데 하나이다.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상대 편년으로 끝난다. 그뿐이다. 벽화가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해석해야 한다. 문화사적 자리 매김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시대의 사람, 생활, 제도, 역사에 대해 유적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듣고 다른 이에게도 알려야 한다. 이것이 문제다. 정말 머리에 쥐나는 일이니까. 고분벽화 연구자가 잘 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2.진파리1호분은 6세기 유적일까?


진파리1호분을 6세기로 편년하는 데에는 대부분 연구자의 의견이 같다. 무덤의 구조와 규모, 무덤 축조 재료에 대한 1차적 평가에서 사실상 6세기로 결정이 났다. 문제는 6세기의 어는 시점인가이다. 편년의 폭을 넓게 잡아 6세기로 보는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렇게 길게 잡으면 벽화의 문화사적 자리 매김에 어려움이 생긴다. 필자는 벽화의 이모저모를 이웃 중국의 회화사적 동향,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개과정, 고구려 국내외의 정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끝에 6세기 중엽 정도로 결론 내렸다.

겨우 10여 기에 불과한 6~7세기 편년 벽화고분. 그나마 편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기년명 유적이 전무한 상황에서 고분 한 기, 한 기에 ‘어느 시기의 유적’으로 라벨을 붙이는 것이 무리로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미술사학적 견지에서 위치, 규모, 내용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유적의 시공간적 자리를 정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마지막 관문은 결국 해석이다.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의 유적 해석을 통해 벽화가 그려지던 시대를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유적의 편년이 정말 합리적이었는지를 검증 받게 되며 시작과 끝이 하나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림1] 중국 호남 양양 가가충화상전묘  ⓒ 전호태


[그림2] 진파리 1호분 벽화 '백호'  ⓒ '고구려고분벽화연구'(전호태), 289쪽


 [그림3] 강서대묘 벽화 '백호'  ⓒ '고구려 고분벽화연구'(전호태), 292쪽


3.벽화가 내는 멋과 맛이 있다!


진파리1호분 벽화의 주인공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이다. 진파리1호분은 사신도 벽화고분이다. 그런데 그 사신이 충분히 고구려적이지 않다. 특히 백호는 유려한 필치로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남북조시기 백호와 사촌간이다. 6세기 고구려에서 백호는 상상의 괴수 머리를 지닌 존재로 모습을 바꾸어간다. 그 완성형이 강서대묘 벽화의 백호이다. 그러나 진파리1호분의 백호는 표범의 머리를 지닌 신수로 묘사되었다.

이외에도 진파리1호분 벽화의 제재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구려 회화 특유의 맛을 내지 못한다. 구성방식에서도 짜임새가 약해 안정감이 없다. 두광이 표현된 사천왕상 형상의 무덤 문지기는 극히 불교적인 존재이다. 반면 널방 천정석에는 연꽃 대신 해, 달, 별자리를 묘사되었다. 벽화구성과 표현에서 나타나는 전반적인 불안정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가 의문으로 떠올랐다. 결국 그 시대의 흐름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4.유적은 역사의 산물인가?

안원왕(재위531~545) 말년 평양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세력 다툼이 치열했다. 추군과 세군으로 나뉜 고구려의 귀족세력은 결국 참혹한 살육전으로 결론을 내렸다. 북위의 분열을 계기로 중국의 남북조시대가 종막을 향해 다가가고 신라와 백제가 군사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를 상대로 한 판 크게 전쟁을 벌이려 칼을 갈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대외진출이 어려워진 문자명왕(재위491~519) 이후 한 세대 만에 고구려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라는 형식을 통해 ‘한정된 부와 권력’을 어떻게 나눌지가 사회적 과제로 떠올랐다고 할 수 있다.


평양에서 벌어진 이런 정치적 변란, 그 바탕에 깔린 사회적 갈등과 불안이 진파리1호분 벽화의 구성, 제재의 표현 기법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정이 가능할까? 필자는 한 시대의 정치사회적 흐름, 종교신앙적 태도, 문화 활동과 내용은 서로 얽혀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 위에 고분벽화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다. 물론 개별 유적이나 유물 하나하나에 한 시대를 관류하던 사회문화적 흐름이 그대로 배어든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현실을 보는 눈, 내세에 대한 소망을 복합적으로 담게 되는 고분벽화가 한 시대를 지배하던 분위기와 동떨어져 구성되고 그려지기도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에 안정되고 번영을 누리던 사회, 동아시아 강국으로서의 입지가 1세기 가까이 지속되던 나라의 도성에서 어느 날 갑자기 지배계층 대부분이 참여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오히려 그 이면에서 쉼 없이 확대되던 불안, 분리, 분열이 표면화된 사건이라는 해석이 더 정확할 것이다. 진파리1호분은 구조적으로 안정된 후기 석실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화는 제재 구성이나 표현기법상 충분히 안정되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고구려식 회화’로 명명할 수준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한 시대의 정치사회적 흐름, 개인과 집단의 인식과 대응, 문화 활동과 결과 사이에는 여러 방식으로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선후도 강약도 일률적이지 않으므로 이를 읽어내는 방식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고분벽화와 같은 특별한 장르에 대한 접근방식도 연구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필자의 방식이나 결론 역시 그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고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 한국역사연구회는 소속 연구자들의 학술연구 활성화를 위해 2007년부터 매년 심사를 통해 ‘최우수 논문’ 및 ‘신진연구자 우수논문’에 대한 수상을 해오고 있다. 위에 소개된 논문은 편집위원회의 엄밀한 심사를 거쳐 ‘최우수논문’으로 선정되었으며, 수상은 2015년 한국역사연구회 정기총회에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