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연구노트

연구발표회 후기 - 『대명률』의 적용과 집행

BoardLang.text_date 2009.09.20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연구발표회 후기】

『대명률』의 적용과 집행


장경준(대명률 연구반)







□ 일시 : 2009년 6월 27일(토) 늦은 2시
□ 장소 : 대우재단빌딩 8층 제2세미나실
□ 주최 : 대명률 연구반
□ 사회 : 구덕회(고척고등학교)


1. 고려전기 절장법(折杖法)의 도입과 운영
  발표 : 이정란(고려대학교)
토론 : 이정훈(국민대학교)


2. 조선후기 형벌체계와 형량 환산
  발표 : 홍순민(명지대학교)
토론 : 조윤선(청주대학교)


3. 조선초기 친속 용은(容隱) 규정의 수용과 적용
발표 : 박 경(이화여자대학교)
토론 : 조지만(아주대학교)


4. 조선후기 혼인관계 해소와 『대명률』의 적용
발표 : 정해은(한국학중앙연구원)
토론 : 이순구(국사편찬위원회)


 




  대명률 연구반(현 반장: 박경)에서는 2003년 8월부터 『대명률』을 읽기 시작하여 2007년 초에 1차 강독을 마쳤고 2009년 초에 2차 강독을 마쳤으며, 현재 역주본의 간행을 염두에 두고 3차 강독을 진행 중이다.

 

그리고 2006년 10월에 “조선시대 형률 운용과 『대명률』”이라는 주제로 103회 연구발표회를 주최한 데 이어 두 번째로 연구발표회를 주최하게 되었다. (103회 연구발표회의 결과물은 1년 뒤 『역사와 현실』 65호에 실림)

이번 연구발표회에서는 “『대명률』의 적용과 집행”을 주제로 하여 103회 연구발표회에서 발표를 안 한 반원을 중심으로 네 사람이 발표를 맡았는데, 지난 번보다 준비 기간도 짧고 발표자들이 더 바쁘기도 해서 모두들 걱정이 많았다.


발표회 날은 토요일 오후였고 좀 더웠다. 그래도 스무명 남짓 모여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국어학 전공자인 필자로서는 모르는 분이 더 많긴 했지만 그리 낯선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본 김웅호 전 반장님 덕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발표회가 시작되어 구덕회 선생님이 사회를 보셨고 첫 발표는 이정란선생님이 맡았다. 제목은 “고려전기 절장법(折杖法)의 도입과 운영”이었다. 여기서 ‘절장(折杖)’이란 태ㆍ장ㆍ도ㆍ유ㆍ사(笞ㆍ杖ㆍ徒ㆍ流ㆍ死)의 오형(五刑) 중 사형(死刑)을 제외한 4개의 형벌을 장(杖)으로 환산[折]하여 치는 것을 말한다. 고려에서는 당률의 오형을 근간으로 하되 송률의 절장법도 함께 도입하였는데, 그 운용 과정에서 고려 나름의 방식으로 변형하여 적용하였음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토론은 이정훈 선생님이 해주셨다.


두 번째 발표는 홍순민 선생님의 차례로 제목은 “조선후기 형벌체계와 형량 환산”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후기로 내려온 기분이었는데, 여기서는 사회가 더 복잡해짐에 따라 범죄의 처벌 형량도 단지 명률의 오형(五刑)만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하여 세분화되었고, 세분화된 형량이 표로 환산되어 『대명률부례(大明律附例)』,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추관지(秋官志)』 등에 「제율유기(諸律類記)」, 「육장도(六贓圖)」, 「오형도(五刑圖)」, 「징속식(徵贖式)」, 「작목식(作木式)」, 「수속식(收贖式)」 등의 이름으로 실려 있음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토론은 조윤선 선생님이 해주셨다.



잠시 쉬었다가 박경 선생님이 “조선초기 친속 용은(容隱) 규정의 수용과 적용”이란 제목으로 세 번째 발표를 하였다. ‘용은(容隱)’은 가족이나 근친의 범죄를 알고도 숨겨줌을 허용하는 것으로서, 대명률의 관련 조항 가운데 ‘친속상위용은(親屬相爲容隱)조’는 조선초부터 잘 지켜졌고, ‘노유불고신(老幼不拷訊)조’는 잘 지켜지지 않다가 세종 13년에 이 조항을 잘 지키라는 하교 이후에 원칙적으로 준수되었음을 논의하였다. 토론은 조지만 선생님이 해주셨다.

마지막으로 정해은 선생님이 “조선후기 혼인관계 해소와 『대명률』의 적용”에 대해 발표하였다. 대명률에는 혼인관계 해소 관련 규정이 18개 조문에 걸쳐 ‘이이(離異), 출처(出妻), 휴기(休棄), 가매(嫁賣)’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어 있으나 조선의 법전에는 이혼과 관련한 구체적인 규정이 미비했던 점, 조선후기 이혼 관련 사안에서 『대명률』이 적극 활용되지 않아 공식적인 이혼은 극도로 억제되었고, 양반들은 실제적인 혼인 관계 해소를 위해 사적인 해소라 할 수 있는 출처를 활용하면서 칠거지악을 악용하였다는 점 등을 논의하였다. 토론은 이순구선생님이 해주셨다.

필자가 보기에 이번에 발표된 논의들은 그동안 함께 읽어온 『대명률』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구체적으로 적용되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해준 흥미로운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재미있게 들었다. 그러나 이 글을 청탁 받은 지 한참이 지나 당시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데다가 국어학 전공인 필자의 이해 능력 부족으로 인해 발표회 때 이루어진 알찬 성과를 이 글에서 충분히 전달할 수 없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