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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발표회 후기 - 여말선초 금석문과 불교

BoardLang.text_date 2013.06.11 작성자 강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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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발표회 후기]

여말선초 금석문과 불교


강재구(중세사 1분과)






일시 : 2013년 6월 1일 토요일 오후 2시~6시
장소 : 대우학술재단빌딩 7층 1세미나실
주최 : 한국역사연구회 중세1분과 여말선초 금석문 연구반


발표 :
사회 : 박광연(동국대)


1. 보우의 삼산비명 비교‧검토
발표: 김흥삼(한국불교역사연구소) 토론: 곽승훈(충남대)
2. 불사리신앙 - 진신과 분신사리 신앙 -
발표: 김혜완(한역연 여말선초 금석문 연구반) 토론: 김영미(이화여대)
3. 고려후기 어대제(魚袋制)의 변화
이현숙(연세대 의학사연구소) 토론: 김보광(고려대)


 






   역사학에서 ‘사료’의 가치는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학이 문학과 차별되는 부분이 바로 ‘사료’를 통해 사실을 복원하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사료’의 종류에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과 같은 사서류를 비롯해, 최근에는 문집류가 주목받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료’로서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단연 ‘금석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금석문’이야말로 당대에 제작되어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는 사료로서 역사학자들에게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석문’을 수십년간 집중적으로 다뤄온 금석문반의 발표가 주목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여말선초 금석문반’(이하 금석문반)은 2010년 12월 발족하여, 2013년 5월말까지 30개월가량을 15명의 연구자들이 참여하였다. 금석문반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나말여초부터 여말선초에 이르기까지, 고려시대 전체를 관통했던 금석문반의 연구역량은 참여한 연구반선생님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노력, 희생이 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금석문반이 이날 발표를 끝으로 ‘해소’하기로 결정했다. ‘해체’가 아닌 ‘해소’. 말 그대로 더 이상 다룰 자료가 없기 때문에 끝맺어진 금석문반의 대장정에 마음속으로 깊은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하고, 또 연구발표회 후기라는 중임(?)을 맡게 되어 행여나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글을 시작한다.


   이날 발표는 총 3개의 발표로 구성되었다. 박광연 선생님의 사회로 차분한 분위기속에서 시작된 발표회의 첫 발표는 금석문반의 반장이신 김흥삼 선생님께서 시작하셨다. 개인적으로 처음 뵙는 김흥삼 선생님의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짧은 머리가 인상적이셨던 김흥삼 선생님은 대단히 의지가 강한 분처럼 보였다. 그런 강한 의지로 장기간 금석문반을 이끌어오셨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첫 번째 발표인 김흥삼 선생님의 “고려말 보우의 삼산비명 비교·검토”에서는, 고려말 국사를 지냈던 원증국사 보우와 관련된 3개의 금석문을 분석하였다. 보우의 삼산비명은 각각 1285년 이색이 지은『太古庵圓證國師塔碑』, 1386년 정도전이 지은『舍那寺圓證國師石鐘碑』, 1387년 권근이 지은『小雪山庵圓證國師舍利塔銘』를 의미한다.


발표자는 삼산비문이 각각 다른 글쓰기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보우 생전의 업적과 입적 후에 만들어졌다는 사리에 의한 신비성을 유포하기 위한 목적에서 찬술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또한 이색은 자신의 사상을 개입시켜, 유창이 지은「행장」의 일부를 왜곡해『태고암비』를 찬술했다는 것, 특히『태고암비』의 ‘任性養眞’의 구절을 맹자의 ‘存心養性’과 관련해 해석한 점이나, 신돈과 관련된 내용이 부정적으로 찬술되어있다는 점 등이 흥미로웠다. 뿐만 아니라 삼산비명의 건립참여자가『태고암비』의 경우엔, 왕명에 따라 국가 주도로 승려와 관료들이 대거 참여했으며,『사나사비』는 중앙의 하위 관료와 양근지역의 향리가,『소설암비』는 제자들로 구성된 문인들이 주도하고 있었다는 점을 밝혔다. 지정토론자인 곽승훈 선생님은 전체적으로 발표자의 논지에 동의하시면서도,「행장」과 삼산비가 분량과 성격에서 차이가 있음으로 구분하여 대조할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또한 이 연구가 후학들에게 학문하는 자세로서 깊은 가르침을 줄 것이라는 의미도 부여했다.


  두 번째 발표는 김혜완 선생님의 “고려 후기 불사리신앙-진신과 분신사리 신앙”으로 이어졌다. 이 발표에서는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와 통도사 계단에 보관한 사리가 몽골의 3차 침입이 경상도지역으로 확대되자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당시 발견된 4개의 사리가 다시 통도사에 봉안된 이후 진신사리신앙의 본거지로 인식되었다는 것, 불(골)아사리는 분신하지 않는 순수한 진신사리로서 충렬왕대 국청사 금탑에 낙산사 수정염주와 여의주와 함께 봉안되어 왕실 진신사리 신앙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 이러한 신앙은 불국토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또한 통도사 사리가 진신사리로 인식되면서 분신(변신)사리를 생성하였고, 고려말에는 승려들에서 왕실이나 고관까지 통도사 분신사리를 얻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靈異를 경험한 범위는 확대되었으나 그 신이성은 많이 저하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김혜완 선생님의 발표에 대해서는, ‘나말여초 금석문반’의 창립멤버이신 김영미 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 김영미 선생님은 사리신앙을 통도사 진신사리신앙, 불아 진신사리신앙, 분신사리 신앙으로 나누어 고찰한 점에 연구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존재하지 않던 사리가 출현한 진신사리와 불아·불골신앙은 고려 전기부터 있었다는 점, 분신사리 신앙과 유가업과 관련성, 그리고 통도사 진신사리의 분신이 몽골의 3차침입과 관련이 있을지 등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이 있었다.


  마지막 발표는 이현숙 선생님의 “고려후기 어대제(魚袋制)의 변화”였다. 이현숙 선생님은 최근 ‘의학사’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魚袋制’는 발표자의 석사학위 연구주제였다고 한다. 최치원의 사산비명과 최언위의 비명을 읽으면서, “賜緋銀魚袋”, “賜紫金魚袋”라는 표현이 최치원과 최언위의 관직명에 붙어있었다는 점에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어대제’라는 주제가 다소 생소했지만, 사료를 대하는 꼼꼼한 자세가 석사학위논문을 준비하는 필자를 부끄럽게 했다.


이 발표에서는 최치원이 자금어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에서 어대제를 수용했기 때문이며, 이는 중국과 신라·고려가 호환이 가능한 동아시아 세계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신라와 고려 초에도 어대제가 수용되었고, 9품관제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는 것이다. 4품과 6품이상 관직에 보임되면 자금어대와 비은어대를 하사받고, 3품과 5품이상의 문산계를 받으면 더 이상 표기하지 않는다는 어대제의 원칙은 고려 전시기에 걸쳐 준수되었지만, 고려 후기에는 내시·무반 등도 어대를 패용하는 사례가 많아졌고, 충렬왕 이후 관계와 관품의 불일치 현상이 줄어들면서 자금어대를 하는 현상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관계와 관품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품계와 행수제가 철저히 지켜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 지정토론은 최근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김보광 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 김보광 선생님은 충렬왕대를 기점으로 고려의 관제가 크게 변화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등 무신정권기와 원간섭기를 아우르는 변화상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또한 발표자의 해석에 대해 부가하여 다채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등 마지막 발표의 흥미를 돋우어주었다. 지정토론 외에 청충에서도 활발한 토론이 오고 갔다. 중국의 9품관제 수용에 대한 하일식 선생님의 반론이 있었으며, 이에 대한 발표자의 답변 등이 있었으며, 수준 높은 토론으로 인해 발표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었다.


  모든 발표와 토론을 마친 후, 반장이신 김흥삼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으셨다. 오랜 시간동안 함께 했던 금석문반을 떠올리셨는지,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금석문반은 ‘해체’가 아니라 ‘해소’라는 것, 그 점이 앞으로의 금석문반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