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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발표회 후기 - 식민주의 사학의 실상과 허상

BoardLang.text_date 2014.05.06 작성자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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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발표회 후기]

고대사와 근대사 연구자가 함께 바라본
식민주의 사학의 모습 :


"식민주의 사학의 실상과 허상" 학술회의 후기


고태우(근대사분과)







일시 : 2014년 3월 22일(토) 13시 30분~18시
장소 : 연세대학교 교육과학관 강의실 303호
주최 : 한국역사연구회ㆍ연세대학교 역사문화학과 BK21+사업팀
후원 : 한국연구재단
발표
사회 : 1부 발표. 이정빈(경희대학교)   2부 토론. 박준형(연세대학교)
1. 총론 : 식민주의 사학의 실상과 허상
발표 : 박준형(연세대학교)
2. 문명과 제국일본 - 戰間期 津田左右吉의 중국·아시아론 -
발표 : 이석원(미국 로즈대학교)   토론 : 이태훈(연세대학교)
3. 일제말기 내선일체 정책과 同根同祖論
발표 : 장   신(성균관대학교)   토론 : 정상우(서울대학교)
4.『만주역사지리』의 현도군 연구와 식민주의
발표 : 이준성(연세대학교)   토론 : 박찬흥(국회도서관)
5. 池內宏의 대방군 위치비정과 만선사관
발표 : 위가야(성균관대학교)   토론 : 윤용구(인천도시공사)


 






   식민사관은 극복되었는가? 1960년대 이후 식민사관의 성격과 그 문제가 학술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민중사학이나 ‘아래로부터의’ 역사학 등이 제창되면서 현재는 그것이 극복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대다수이다. 하지만 최근 재야사학계와 보수 정치권(나아가 정부)에서의 움직임을 보면 그들이 쓰는 식민사관에 대한 정의 자체가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재야사학계 일각에서는 오래 전부터 한국사학계(특히 고대사 분야)를 ‘강단사학계’로 호칭하며 ‘식민사학의 후예’로 규정해왔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현재까지 보수 우파가 득세하면서 역사학을 권력의 도구로 만들려 하는 작업이 줄곧 진행되었다. 특히 박근혜 정부 들어서면서 보수 우파세력은 기존의 역사학계를 ‘좌편향적 역사관’으로 매도하였고 교육부가 나서서 역사교과서 파동을 일으켰다. 여기에 기존 역사학계에 비판적이었던 재야사학계 일각에서 그 비난의 행렬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이다.




   재야사학계의 동참은 양자 사이의 ‘공모’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년 광복절 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환단고기」의 한 구절을 인용한 점, 국회 내 동북아역사왜곡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여기에 소속된 새누리당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역사 바로쓰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간한 한사군 연구서에 대한 비판을 계기로 지난 3월 19일에 민간에서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되었고, 이런 비판을 염두에 두면서 재단이 비주류 학자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상고사에 대한 강연회, 토론회를 정례화하고 있는 점, 재단뿐만 아니라 각종 국책연구기관에서 상고사 관련 연구비를 대폭 책정하고 여기에 재야사학계가 참여하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점 등등에서 그러하다. 이렇듯 식민사학, 식민사관은 학술적 차원을 떠나 정치적 논란이 되고 있다.


   그 와중에 지난 3월 22일, “식민주의 사학의 실상과 허상”을 주제로 연구발표회가 개최되었다. 이 발표회는 보수 우파세력이나 재야사학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의 차원에서 마련된 것은 아니다. 발표회의 모태는 ‘일제시기 고대사연구 검토반’(반장: 이정빈 선생님)이다. 이 모임은 일제시기 일본인의 한국고대사 연구, 사학사 연구 성과를 검토하여 한국고대사 연구를 새롭게 바라보기 위한 차원에서 지난 2010년 결성되었다. 이 모임의 결과물 중 하나로서 이번 발표회가 개최된 것이다. 식민사학이 논란이 되는 상황에서, 발표회는 식민주의 사학의 실상을 세밀하게 살펴보는 시도로서 주목받을 수 있었다. 실제 발표회장은 많은 사람들의 참석 열기로 뜨거웠다. 연구회에서 준비한 발표집이 모자라 추가로 복사해서 배포할 정도였다.



   먼저 박준형 선생님은 총론에서 만선사관과 식민주의 사학의 연구사를 정리하고, 극복된 것으로 보이는 식민주의 사학이 당시부터 ‘다양한 얼굴’로 경합하고 있었고, 정책에 따라 선택되고 소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그 실상을 분명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식민주의 사학에 대한 연구가 주로 근대사 연구자들에 의해 진행되다보니 주요 쟁점이었던 고대사 인식에 대한 엄정한 비판이 부족했고, 따라서 고대사와 근대사 연구자의 공동 연구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시도가 바로 이번 발표회로서, 고대사 이외에 한국근대사(장신 선생님), 일본근대사 연구자(이석원 선생님)가 공동으로 참여하게 된 사정이 여기에 있다.



이어서 이석원 선생님은 한국학계에서 전형적인 식민사학자로 명명되는 쯔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일본학계에서는 ‘천황제를 정면으로 마주한’ 과학적 역사학의 창시자로서 적극적으로 평가되는 등 현저한 시각차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양쪽의 수식을 걷어내고 쯔다사학의 유산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연구에 따르면 쯔다는 평민의 삶과 문학을 통해 원형질적인 ‘일본적인 것’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이때 ‘일본적인 것’의 이면에는 ‘비일본적인 것’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쯔다는 1930년대 중국과 아시아에 관한 글들을 통해 중국문명으로 대표되는 ‘동양’이라는 범주와 일본을 분리시키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면서 쯔다는 조선을 중국문화에 완전히 흡수당한 민족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예로서 설명하였다. 결국 쯔다사학의 핵심은 비일본적인 것의 준별을 통한 일본국민공동체의 창출이었고, 그가 주장한 국민주의에는 동양으로부터의 분리를 통한 세계문명의 보편자로서 일본을 강렬하게 지향하는 의식이 존재하였다. 여기에서 제국화하는 일본에 대한 자기긍정으로서 쯔다사학의 식민주의를 엿볼 수 있다는 흥미로운 분석이다. 이에 대하여 이태훈 선생님은 쯔다가 비일본적인 것을 끊임없이 지우고 남긴 일본적인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일본의 특수성이 세계사적 보편성으로 전환될 수 있는 논리가 무엇이었는지, 세계사적 보편성을 지향한다고 할 때, 동아협동체마저도 부정적이었던 쯔다에게 아시아와 조선은 다시 어떤 논리로 연결될 수 있는지 등의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두 번째로 장신 선생님은 일제말기 내선일체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했던 ‘동조동근론’의 등장과 확산 과정에 주목하였다. 학계의 통념과 다르게 일선동조론과 동조동근론은 조선총독부조차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인의 전쟁동원이 불가피해지면서 동근동조론이 부상하게 되었다. 경성제대 등 학계에서는 여전히 동조동근론을 반대했지만, 이를 주창한 자들은 미나미ㆍ고이소 등 조선총독과 황국신민화정책의 핵심 이데올로그였던 시오바라 학무국장이었다. 결국 총독의 명령으로 교과서에 동조동근론 내용이 실리지만, 무리하게 개재된 내용이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한국의 많은 학자들은 일선동조론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식민사관의 극복 대상으로서도 취급되지 않게 되었다. 이에 토론자로 나선 정상우 선생님은 동조동근과 같이 동일성을 강조할 때 현실에서의 차별이 오히려 부각될 수 있었던 어려움을 식민권력이 어떻게 처리해갔는지, 당시 내선일체정책에서 천황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동조동근론이 역사학계가 아닌 다른 학계에서의 영향력을 볼 필요는 없는지 등을 질문하였다.



   이어서 이준성 선생님은 만선사의 주창자로 일컬어지는 시라토리(白鳥庫吉)의 연구에서 드러나는 식민주의의 구체적인 실상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 발표의 초점은 만철 조사부에서 편찬한『만주역사지리』에서 보이는 만선사관의 성격이었다. 연구를 통해 만선사관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지금의 평북과 의주지역을 한(漢)과 예맥, 조선의 충돌점으로 이해하고 공지(空地)로 놔둔 것은 러일전쟁 이후 만주 상황과 대비시키려 한 것이고, 일본이 여타 세력을 제압하고 이 지역을 장악하려는 현실적인 바람을 학술적으로 보조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고구려에 대한 서술이 매우 소략했던 것 역시 일본이 만주에 진출하는 과정을 합리화하고자 했던 20세기 초반의 상황에서 찾았다. 따라서 만선사는 현재 형세의 ‘유래’를 따져보기 위한 실제적 필요를 ‘순연한 학술적 견지’라는 연구목적으로 치환시켜 진행한 것이라는 결론이다. 이 논문에 대하여 박찬흥 선생님은 구성상의 문제라든가, 연구의 초점을 명확하게 할 필요성 등을 토론하였다.



   마지막으로 위가야 선생님은 정교한 실증을 구사한 실증사학자로서 평가받고 있는 이케우치(池內宏)가 동시에 식민사학자로서의 성격이 논란이 되고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1909년 황해도 봉산군 태봉리 1호분에서 ‘帶方太守 張撫夷’ 명문전(銘文塼)이 발견되면서 대방군 치소가 이 지역임이 밝혀졌다. 그 결과 대방군치 이동설이 제기되었는데, 이케우치는 여전히 서울을 치소로 보았다. 그는 대방군 속현의 함자현(含資縣)을 충주에 비정할 수 있다는 문헌 해석을 존중하며, 고고학 자료를 부정하고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하였다. 연구에 따르면 이케우치의 이런 연구는 그가 평소에 구사한 유연하고 합리적인 실증과는 거리가 있으며, 그 이유를 그가 타율성론에 기반한 만선사관의 자장 속에 위치했을 가능성에서 찾았다. 이에 대하여 윤용구 선생님은 토론을 통해 이케우치 등 일본인 학자들의 한군현 연구의 토대에서 조선후기 실학자와 청말 학자들의 연구를 함께 검토할 필요성, 대방군치 이동설의 부정을 만선사관으로 직접 연결할 수 있는 근거를 더욱 명확히 밝혀낼 필요성 등을 지적하였다.


   식민주의 사학의 내면을 꼼꼼하게 검토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이 전공 시기 연구자가 세분화한 상태를 고려할 때 여러 전공의 연구자들이 공동연구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가령 근대사 전공자인 필자가 시라토리가 분석하는 한사군을 과연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점에서 이 발표회의 기획 의도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사 및 근대사 연구자가 함께 식민주의 사학의 실상에 접근하기 위해 힘을 모은 것이다. ‘일고반’을 중심으로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만 몇 가지 아쉬움과 의문이 남았다. 우선 토론 과정에서도 여러 선생님들이 지적하였듯이, 식민사학자들의 논증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과 이를 식민주의로 연결하는 것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시라토리나 이케우치 등의 연구가 어떻게 일본의 대륙침략을 뒷받침했는지, 좀 더 과정상의 연결고리에 대한 근거가 제시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아가 그 연결을 확실히 했을 때, 식민주의 사학에 대한 ‘새로운 상’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다음으로 기존 연구에서도 지적됐듯이 이제는 민족주의사학(나아가 맑스주의사학)에 대해서도 메스를 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민족주의사학 내에서도 식민사학에 대항하여 만주를 어떻게든 포괄하려고 하는, 시기를 앞으로 연결하려는 욕구가 있었다. 이를 또 다른 식민주의로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욕망이 굴절되어 현재 재야사학이나 보수 우파계열, 대중적인 차원에서의 ‘환빠’ 현상 등이 발생하는 맥락을 제공했던 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는 일제하에서 해방 이후 시기까지 식민사학의 ‘소비’ 문제를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민족의 영광’을 확인하려는 고대사에 대한 관심, 인터넷 공간 등 대중적 차원에서 재야사학의 관점과 내용이 소비되는 부분. 이것까지 건드릴 수 있기 위해서는 식민사학의 유통과 소비에 대한 기초 작업들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는 발표회 당일 장신 선생님의 표현대로 ‘무서워서 못 건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쉬운 얘기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물음과 의문이 어찌 보면 누구나 다 아는 것이고, 참관자로서 너무 쉽게 던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 또 이번 발표회에서만 요구될 문제는 아닐 것이며 역사학계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덧붙임 : 혹시나 ‘할배’들께서 오시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