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황산벌”과 7세기 국제전

BoardLang.text_date 2009.09.13 작성자 정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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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준(고대사 분과)


  영화 “황산벌”『삼국사기(三國史記)』의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에 등장하는 여러 기록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된 역사영화이다. 모티브는 『삼국사기』이지만 기록이 매우 소략하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작가와 감독의 상상에 의존하였고, 특히 코미디라는 코드로 녹여내는 데에 공을 들였다.


<그림 1> 삼국사기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드라마 “서동요(薯童謠)”모티브의 기록적 성격 때문에 퓨전사극을 지향한 면이 강하다면, 영화 “황산벌”은 모티브가 된 기록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측면에서 퓨전을 지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같은 감독이 기록이 비교적 풍부한 조선시대를 대상으로 만든 “왕의 남자”조차도 퓨전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보면, 역사를 다룬다고 해서 반드시 정통사극을 지향하는 것만이 옳은 방법은 아닌 듯하다.

  영화 “황산벌”은 첫 장면에서 코믹한 터치로 황산벌 전투가 그 일부인 7세기 국제전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가 패배한 후 멸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따라서 대상시기는 첫 장면의 배경 부분을 제외하면 660년의 6~7월 정도라고 할 수 있고, 배경 부분까지 포함하면 연개소문(淵蓋蘇文)ㆍ의자왕(義慈王)ㆍ당(唐)의 태종(太宗) 등이 집권하였던 640년대 중반 이후~660년 7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림 2> 영화 “황산벌” 도입부 장면 중 4개국 회담 (출처: 포토야 홈페이지 )

  사실 660년 6~7월이라는 짧은 기간만 가지고는 사료의 부족으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어려운 측면도 있는 데다가, 640년대 중반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를 모르고서는 영화의 내면에 흐르는 주제의식을 이해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640년대 중반 이후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7세기 국제전의 발발과정을 설명함으로써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황산벌”의 주된 이야기는 백제의 계백(階伯)과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대치하는 전투의 장면들이지만, 그 장면들 속에는 양국의 국내정치는 물론 당시의 국제정세까지도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두가지를 하나씩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황산벌”에 등장하는 시기의 백제 국내정치는 의자왕과 직계 왕족들의 권력 독점으로 요약될 수 있다. 무왕(武王)이 적극적인 대당외교(對唐外交) 속에서 체제 개편을 통한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다면, 의자왕은 즉위 초인 642년부터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통해 정변이 엿보일 정도로 인위적인 인사 개편을 통한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특히 많은 학자들은 642년 못지 않게 655년의 정계 개편에도 주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결과가 백제의 멸망으로 이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642년의 정변이 의자왕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왕권 강화를 도모한 것이라면, 655년의 정계 개편은 642년 이래의 정치과정을 통하여 어느 정도의 왕권 강화가 이루어진 후 아예 직계 왕족과 측근세력을 중심으로 권력을 독점하여 나머지 세력들을 정계에서 축출하고자 하는 시도였던 것이다. 이 때에 권력을 독점한 측근세력이 백제 멸망 후 신라에 항복하는 충상(忠常), 상영(常永), 임자(任子) 등이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계백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정계 개편을 통해 축출된 세력으로는 성충(成忠), 흥수(興首)가 대표적이라고 할 것이다. 문제는 후자는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예견할 정도로 국제정세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지만, 전자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후자의 의견이 묵살당했기 때문에 나당연합군의 침입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지 못한 끝에백제가 10여 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멸망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대다수의 655년 집권세력들이 백제 멸망 후 신라에 항복하거나 아예 임자처럼 기밀정보를 넘기기도 하는 등 국제정세에 어두울 정도로 무능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를 저버리는 부도덕한 자들이었던 반면에,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계백만큼은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는 점이다.

  계백은 현재 남아있는 기록으로 볼 때 황산벌 전투의 주인공으로서 백제 16관품(官品) 중 제2품인 달솔(達率)이었음에도 함께 출전한 제1품의 좌평(佐平)인 충상, 상영 등을 지휘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국가 존망의 위기라는 특수상황에서 왕이 가장 신임하는 장수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를 가지고도 가장 중요한 전투의 지휘권을 부여받는 특수사례로서, 그만큼 적어도 군사적인 면에서 계백이 얼마나 신임을 받는 장수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또한 비록 전투가 결국 패배로 끝나기는 했지만, 계백은 5천의 군사로 신라의 5만 대군에게 하루에 4번 싸워 4번 이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기에, 신라인들에게 많은 인상을 심어주어 역사기록에도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림 3> 계백(박중훈)이 의자왕(오지명)에게 임명받는 장면(출처: 포토야 홈페이지)

  다음으로 신라의 국내정치는 647년 비담(毗曇)의 난 이후 김춘추(金春秋)-김유신 연합세력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들은 영화에서 나타나는 김춘추나 김인문(金仁問)의 모습에서 보이듯이 적극적인 친당정책(親唐政策)을 통하여 나당연합을 결성하였고, 그 결과 당군의 백제 침입을 끌어낼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정치ㆍ외교 쪽에서 김춘추-김인문 부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면, 군사 쪽에서는 김유신의 맹활약이 펼쳐진다.

  본래 김유신은 40대 후반인 640년대 전반까지도 신라에서 크게 주목받던 장수라고 보기 어려웠으나, 이후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신라를 대표하는 장수가 되고 나중에는 정치권력까지 잡게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연상하는 ‘용맹한 장수 김유신’은 사료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고대사는 워낙 사료가 적어서 단순히 기록의 누락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김유신 만큼은 『삼국사기』 10권의 열전 중 3권이나 차지할 정도로 풍부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사료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김유신의 열전은 대부분 그에 대한 칭송이라고 할 수 있는 기록이어서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김유신은 전쟁에서 어떠한 장수였을까?

  김유신이 전쟁에서 활약하는 기록들을 검토해 보면, 그가 주로 승리하는 방식은 압도적인 무력도 빼어난 지략도 아니고 대부분 군사들의 사기를 조절하는 방식이다. 별이 떨어져 군사들의 사기가 추락하자 연을 띄워 사기를 높인 비담의 난 진압, 비령자(丕寧子) 일가를 희생시켜 군사들을 분발하게 한 647년 무산성(茂山城) 전투, 일부러 업무에 태만하여 군사는 물론 백성들까지 전의를 끌어올린 648년 대야성(大耶城) 탈환전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즉 그는 영화 “황산벌”에서 묘사하듯이 심리전의 대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660년에 상대등(上大等)이 되는 등 정치적으로도 활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림 4> 김유신(정진영)과 계백(박중훈) (출처: 포토야 홈페이지 )

마지막으로 7세기 국제전의 발발배경은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관련이 깊다. 당이라는 거대한 통일제국이 등장한 이래, 630년 동돌궐(東突厥), 635년 토욕혼(吐谷渾), 640년 고창(高昌) 등의 주변세력들이 차례로 정복당하였고, 마지막으로 고구려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645년 이래 당의 계속된 공격에도 고구려는 정복되지 않았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각국에서 잇달아 정변이 일어나면서 대외정책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집권하면서 영화 도입부에서 나타나듯이 대외강경책을 표방하게 되었다. 백제에서는 앞서 설명한 대로 의자왕 중심의 권력구조가 등장하면서 645년 이후 이전의 적극적인 대당외교를 중단하고 고구려와 손을 잡은 것으로 파악된다.

  신라에서는 앞서 설명한 대로 김춘추-김유신 정권이 등장하면서 백제가 방기(放棄)한 대당외교를 적극적으로 시도하여 나당연합을 결성하였다. 왜에서도 대화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나 백제 중심의 외교노선을 일시적으로 다원화시켰다가 신라와의 갈등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650년대 중반 나당연합고구려-백제-왜라는 대결구도가 노골화하는 쪽으로 진행되었고, 두 세력의 대결은 사실상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첫번째 대결이 백제를 무대로 하여 벌어진 것이었을 뿐이다. 다만 두 세력 중에 나당연합 쪽이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은 당이라는 통일제국의 힘이기도 하지만, 고구려-백제-왜 쪽의 세력이 나당연합처럼 밀착되지 못한 것이기도 하였다.

  패전국의 기록이 누락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시기 고구려-백제 관계나 고구려-왜 관계는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백제-왜 관계만이 나당연합에 근접한 수준으로 파악될 뿐이다. 어차피 나당연합군을 백제 혼자의 힘으로 막는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보면, 고구려나 왜의 구원군이 올 수 있는 시간을 벌지 못한 백제의 방어체계에 1차적인 멸망의 원인이 있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고구려-백제-왜 세력의 긴밀한 연락관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점도 2차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5> 낙화암

이러한 당시의 정세를 볼 때 지금까지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삼국통일전쟁’이라는 관점 아래 파악되어 왔던 7세기 전쟁은, 실제로는 당과 고구려라는 두 세력의 대결이 주변세력까지 끌어들이는 형태의 국제전으로 확대된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였던 신라와 백제의 활동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본질은 역시 당과 고구려의 대결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산벌 전투와는 다소 무관해 보이는 당 태종과 연개소문이 영화 도입부에 등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참고로 황산벌 전투 당시의 당 황제는 태종이 아니라 그 아들인 고종(高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