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개성답사기(1)

BoardLang.text_date 2006.04.09 작성자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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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오랜 꿈이던 개성답사를 다녀왔다. 11월 18일부터 21일까지 4일 동안 「개성역사지구의 세계문화유산등록을 위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와 유적답사」가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와 남측의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주최로 개성에서 열렸다. 이 행사에는 남측에서 모두 44명이 참가하였는데, 다행히 나를 비롯하여 한국역사연구회 개경사연구반원 6명이 그 안에 포함되어 개성답사를 할 수 있었다. 고려사연구자로서 또 개경반의 일원으로 10년 가까이 고려왕조의 수도 개경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 왔던 나로서는 더 이상 기쁜 일이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3박 4일 일정의 개성 답사는 전례가 거의 없는데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어려울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답사는 우리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개성에 다녀온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간다.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당시 다녀와서 작성한 답사기를 몇 차례에 나누어 싣는다. 이 답사기는 유물 유적에 대한 소개보다는 주로 산과 길 등 그곳의 자연지리를 묘사하려고 노력하였다.

송송악산 만월대

(1) 드디어 개성으로

2005년 11월 18일 오전 7시 쯤 서울 광화문 앞 세종문화회관 앞을 출발한 버스는 자유로를 따라 달렸다. 행주산성, 오두산전망대를 지나고 임진강을 건너 8시 쯤 도라산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하여 간단한 수속을 밟았다. 8시 30분 도라산출입사무소 주차장을 떠난 금강산관광 지정버스인 대화관광버스는 군사분계선을 지나 약 10분만에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했다. 차가 달리는 길  옆에는 남북분단의 상징인 녹슨 기차가 덩그러니 풀숲에 서있었다.

북측출입사무소에서 입경 수속을 마친 후 마중 나온 민화협 사람들이 타고 온 북측 버스로 갈아탔다. 드디어 북녘 땅에 온 것이다. 버스는 사천유역에 난 길을 따라 서북으로 향한다. 곧 왼쪽으로 높지 않은 산줄기가 나타난다. 지도를 꺼내 이것이 최영의 사당이 있었던 덕물산(덕적산, 288미터) 줄기로구나 하는 사이 오른쪽으로 개성공단 시범단지가 지나간다. 우리은행과 훼미리마트 등 간판이 보인다. 그곳부터 넓은 지역이 바로 개성공단지역이다. 여기저기서 공사가 한창이다.

 



봉동관에서 본 덕물산과 공단 공사 현장(2006.3.18)

버스가 공단지역을 통과할 때 앞쪽으로 병풍처럼 산들이 나타난다. 바로 송악산, 천마산, 오관산 등으로 이루어진 개성 북쪽의 산세이다. 감격이 가시기도 전에 버스는 개성공단 안에 있는 현대아산 노동자 숙소로 들어선다. 바로 덕물산 북서쪽 기슭이다. 숙소 바로 북서쪽으로 진봉산(310미터) 줄기가 지나간다. 진봉산 남쪽 기슭에는 마을이 있고, 그 아래로 길이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흥왕사 터가 있을 것이다.



송악산 동북쪽의 산세(정학수 사진)

(2) 진봉산의 동쪽 마을 봉동을 지나다.

숙소에 짐만 내려놓고 곧 남북공동토론회가 열리는 개성시 자남산 여관으로 향한다. 작은 길옆에는 거름기가 없어 보이는 작고 좁은 밭이 이어진다. 한쪽 밭은 막 배추를 수확했고 또 아주 작은 언덕의 계단식 밭에는 파릇파릇 보리가 크고 있다. 전체적으로 토질은 척박해보인다. 사천이 달리 사천이 아닌가보다.

버스는 곧 공단지역을 빠져나가 봉동읍을 지난다. 처음 만나는 북쪽 마을이다. 크지 않은 마을이지만 학교와 가게 등이 보이며, 여러 가지 구호를 적은 구조물이 서있다. 여기서부터 길을 오가는 북녘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대개 걷거나 자전거를 끌고 있으며, 소달구지나 손수레에 물건을 싣고 움직이는 사람도 있지만, 자동차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리 차가 지나가면 길을 가던 이들은 멈춰 서서 신기한 듯 처다 본다. 자동차가 드믄데다 남측 사람을 태운 평양차이기에 이들에게는 더욱 신기하리라. 도시의 색도 사람들의 옷차림도 어둡고 침침하지만 사람들의 움직임은 계속 이어진다.

봉동읍을 지날 즈음 송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 드디어 개성에 왔구나. 감격을 다시  한번 느낀다.

버스는 사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서쪽으로 향한다. 문득 길 왼쪽으로 철탑이 세워진 부드러운 곡선의 산이 나타났다. 개성의 남산 용수산(해발 178미터)이다. 개성의 지도를 보면서 상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개성을 둘러싼 산들은 모두 송악산 같은 바위산으로 상상했기 때문이다. 개성의 산은 송악산을 비롯한 북쪽의 높은 산들은 바위가 많지만 서쪽과 남쪽의 산들은 대개 부드럽고 완만한 육산이다. 게다가 나무까지 없어서 산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만월대 북쪽에서 본 남쪽의 용수산(정학수 사진)

(3) 개경 나성 동남쪽의 장패문(보정문)과 수구문을 통과하여 개경으로 들어서다.

버스는 다시 고속도로 밑을 지나고 철도 건널목을 건너고 다리를 건넌다. 이 근처에 나성의 수구문이 있었으리라. 다리를 건너자 갈림길이다. 동쪽으로 난 길이 예전 개경에서 임진나루로 가던 길이다. 그 길 바로 동쪽에 개국사가 있었고, 좀 더 가면 천수사가 있었으리라. 지금도 그 근처엔 취적교가 남아 있겠지?

우리가 탄 버스는 갈림길에서 좌회전해서 개성시내로 들어선다. 바로 나성의 동남문인 장패문(보정문)을 들어서는 것이다. 근처에는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낮은 구릉이 사천을 사이에 두고 보이는데, 북쪽의 낮은 구릉이 개성의 좌청룡 맥인 덕암봉 줄기이다. 산이라기보다는 구릉에 가깝다.

이제 고려 현종 때 완성된 나성의 동남쪽 문을 막 들어서는 것이니 이제부터 바로 개성 답사가 아니라 고려왕조의 수도 개경 답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고려 태조가 이곳(장패문 밖)에 개국사를 세웠는데, 고려후기의 학자 이제현은 “이곳은 오고가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끄러운 길목이며 개경내부의 물줄기가 모여 들어 물의 흐름이 순조롭지 못한 곳인 동시에 주변의 산이 몰려 산세가 충돌한 곳이어서 이것을 비보하기 위해서 개국사를 세웠다”(「개국율사중수기」)고 하였다. 이곳이 개성의 물이 빠져 나가는 수구인 동시에 교통의 요지인 것은 분명하지만 산세의 충돌 운운할 정도의 험준함은 어디에도 없다. 개경의 산세가 그만큼 약하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개성 동남쪽 갈림길에서 좌회전한 버스는 사천 북쪽에 사천과 나란히 난 길을 따라 달린다. 서쪽으로 조금 가자 오른쪽(북쪽)으로 얕은 구릉이 나타나는데 이것도 덕암봉의 줄기이다. 지금 이곳엔 식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고려후기에는 묘련사가 있었을 것이다.

(4) 개경의 중심지, 십자가를 지나다.

차는 어느덧 개성의 남쪽 중심까지 와서 오른쪽으로 꺾어든다. 앞에 보이는 언덕이 자남산(103미터)이다. 자남산은 높지 않은 산이지만 개성 분지 중심부에 있기 때문에 예전부터 중요시되던 산이다. 지금 자남산 남쪽엔 김일성 주석 동상이 우뚝 서있다. 주민들이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도 보인다.

차가 다시 오른쪽으로 돌자, 뒤쪽(서)으로 그 유명한 남대문이 보인다. 이제 고려시기 개경의 중심지 십자가 근처에 들어온 것이다. 본래 개성의 중심거리는 지금 남대문이 서있는 십자가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가면 선의문을 지나 벽란도로 갈 수 있었고, 동쪽으로 가면 숭인문을 지나 철원 쪽으로 갈 수 있었다.

또 십자가에서 북쪽으로 난 길이 시전거리가 있던 남대가인데, 이 길은 개경의 심장부인 궁궐로 가는 길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 개성의 중심축은 그전과 조금 다르다. 남대문이 있는 곳에도 4거리가 있지만 지금 그곳은 큰 길이 아니다. 지금은 자남산 김일성 주석 동상에서 이어진 길이 남쪽으로 동서간선도로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나있다. 이 길은 남대문이 서있는 사거리보다 조금 동쪽에 있는데, 개성에서 남쪽으로 나갈 때 이용하며, 고속도로로도 연결된다. 일제 때 자남산에 신사를 세우면서 개성의 중심축이 바뀌었다고 한다.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신사자리에 김주석 동상이 들어서 있는 셈이다.

 

(5) 개성의 호텔, 자남산 여관

버스는 자남산 남쪽으로 난 동서대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한다. 지금도 이 길이 개성이 중심가로 백화점 등 비교적 큰 건물들이 보인다. 차는 수신호를 받고 좌회전하여 북쪽으로 난 시멘트로 포장된 길로 들어서는데, 이 길에는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일종의 통제구역이다. 차는 선죽교를 지나 행사장인 자남산 여관에 멎는다. 그 유명한 선죽교를 차안에서 본다.

자남산 여관에 도착해서 곧 학술토론회 개회를 했다. 남북 대표의 인사말과 남북 참가자 소개를 끝으로 개회식을 마쳤다. 개회식 후 일행들은 점심식사를 기다리면서 자남산 여관 안의 상점을 기웃거리다가 너나 할 것 없이 여관 뜰로 나선다. 여관 북쪽 담 너머로 송악산을 본다.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가까이서 송악산과의 첫 대면이기에 모두 감격한다. 누군가 송악산은 여인이 누워있는 모습이라 하였는데 과연 그렇다.

여관 동쪽 담 아래로 작은 시내가 흐른다. 그 물은 여관 북쪽 담 뒤에 있는 밭 밑에서 흘러나와 선죽교로 이어진다. 그 시내를 건너서 북쪽으로 가는 길이 나 있고, 다시 그 길옆으로 비교적 큰 물줄기가 지난다.


자남산 여관 담뒤로 보이는 송악산

 

(6) 고려 충절의 상징, 선죽교 밑을 흐르는 물은?


선죽교



선죽교 피자국

점식 식사 후 자남산 여관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선죽교와 표충비를 답사하였다. 고려 충절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것이 선죽교이다. 이곳에서 고려말 정몽주가 피살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정작 [고려사]에는 이방원이 조영규 등 4,5인을 보내어 길에서 만나 쳐서 죽였다고만 되어 있다. 실제 다리의 규모로 보아 자객이 숨어 있을 만 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지금 선죽교에는 핏자국이라고 알려진 짙은 얼룩이 남아있다.

선죽교 밑에는 물이 흐르고 있다. 저것이 중경지에서 말한 선죽교수인가? 너무 물길이 좁다. 또 선죽교 동쪽 큰 길 밖으로 흐르는 큰 물줄기는 무엇일까? 현재로서는 정답을 찾을 수는 없다. 몇가지 들은 이야기로 그 관계를 생각해보자.

본래 개경의 물줄기는 송악산에서 남대가로 내려오는 배천이 중심이었고 여기에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앵계와 선죽교쪽으로 내려오는 물줄기와 합쳐서 오천을 이루어 동남쪽으로 내려갔다. 곧 고려시기 개경내부의 중심 물줄기는 배천이었지만 지금 개성 시내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물줄기는 바로 선죽교 동쪽의 물줄기이고, 이것이 오천으로 연결된다. 이병도에 따르면 일제시기에 개성의 수해를 줄이기 위해서 인공적으로 내성 동대문지 근처의 낮은 맥을 끊어 중앙으로 몰리는 물을 새로 만든 선죽교 방면의 물길로 옮겼다고 한다. 즉 배천 상류와 선죽교수 상류를 연결하여 물의 큰 흐름을 배천에서 선죽교수로 바꿨는데, 지금 선죽교 동쪽의 큰 물줄기가 바로 이 때 만든 물줄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 선죽교 밑은 흐르는 작은 물줄기는 무엇인가? 현재 선죽교 밑을 흐르는 물줄기는 인공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 어쩌면 일제 때 동쪽에 새 물길을 내면서 선죽교쪽 물길이 폐쇄되어 물길로서 기능을 못하다가 최근에야 선죽교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억지로 물길을 만든 것은 아닐까? 일제 말에는 선죽교 아래에 물이 흐르지 않았다는 이번 답사에 함께 참여하신 한 노학자의 증언이나 김일성 주석이 이곳에 와서 선죽교 밑에 물이 흐르도록 지시했다는 북한학자의 설명은 이런 추론에 힘을 실어주지만 이것으로 선죽교와 그 아래 흐르는 물의 비밀이 풀린 것은 아니다.

선죽교 서쪽에는 조선후기 이후에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표충비 2개가 비각 안에 들어 있는데, 모두 듬직한 거북이가 등에 지고 있다. 북쪽의 것은 1740년 영조가, 남쪽의 것은 1872년 고종이 개성에 와서 정몽주의 충절을 기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충렬비(북쪽에서 남쪽을 보고 찍었다.)

점심과 선죽교 답사 후 자남산여관에서 토론회 본 발표가 진행되었다. 남측에서는 나를 비롯하여 서성호, 김영미, 황기원 선생이, 북측에서는 리기웅, 김인철, 리창언 선생이 발표를 하였으며, 발표 후 박용운 선생의 정리가 있었다. 발표회가 끝난 후 바로 그 자리에서 북측에서 주최한 연회가 이어졌다. 우리 테이블에는 문화보존지도국 소속의 리기웅, 김명철, 변룡문 3분이 함께 하였다. 만찬 후 공단 숙소 안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한 뒤풀이를 끝으로 개성답사 첫날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