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답사기 ①

BoardLang.text_date 2007.07.19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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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답사기 ①


남무희(고대사 분과)


  이번에 나는 한국역사연구회의 여름 수련회를 처음으로 다녀왔다. 2007년 한국역사연구회의 여름 수련회는 <대마도 역사 탐방>이라는 주제로 기획되었다. 대마도 역사 탐방의 전체적인 일정은 2007년 6월 22일(금)부터 24일(일)로 조금은 빡빡하게 진행된 2박 3일의 여정이었다.

  이번 <대마도 역사 탐방>이 처음으로 겪어보는 해외여행은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하였다. 우선 해외여행을 염두에 두고, 일찌감치 여행용가방을 장만해 두었다. 답사를 떠나기 1주일 전쯤에는 인터넷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고, 시험삼아 경기 북부의 연천과 포천지역의 고구려성곽유적을 답사하면서 열심히 사진도 찍어보았다. 또한 대마도의 더운 날씨를 대비하여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도 몇 벌 구입하였다. 아무튼 대마도 답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 성실하지도 꼼꼼하지도 않은 성격으로 지금까지의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 대마도답사에서는 나름대로 성실한 척, 꼼꼼한 척 했던 것 같다. 이런 나의 모습에 속아 넘어간 웹진위원장님으로부터 답사기를 써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첫날은 거절했는데, 이후 한번 더 계속되는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서 쓰겠다고 하였다. 이후부터 부담에 시달리는 하루 하루를 보내다가, 이제야 겨우 답사기를 쓰게 된다.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답사기가 늦어진 저간의 사정에 대해서 굳이 변명하자면, 본인의 불성실한 성격 탓도 있었지만 대마도 답사를 다녀온 이후부터 여러 가지로 바쁜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또한 답사지역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다시 하나하나 공부해가면서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답사기 중간 중간에 보이는 내용들은 연구회에서 준비한 <답사자료집>과 이훈(<대마도, 역사를 따라 걷다>, 역사공간, 2005)의 책에 전적으로 의지하였다. 이렇게 공부하면서 쓰다 보니,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나름의 구차한 변명을 해본다. 어찌보면 자유로운 답사기가 아니라 무슨 보고서처럼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조금 지루한 감이 있더라도 독자들의 양해를 구할 뿐이다.

  2007년 6월 22일(금)에는 약간씩 비가 내렸다. 서울역에 모인 일행들은 KTX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부산역에 내린 나는 이영학, 이경미 선생님과 함께 조금 우회하는 택시를 타고 항구로 이동하였다. 이런 저런 절차를 밟은 후, 10시 21분부터 우리가 타고 갈 SEA-FLOWER호에 승선하였다(나의 좌석번호: A-030).

  승선하자마자, 10시 30분에 부산을 출발한 배는 이즈하라(嚴原)로 향하였다. 점심은 관광회사에서 제공한 도시락으로 간단하게 때웠다. 부산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 배가 망망대해로 나선 이후, 12시 무렵부터는 휴대폰이 통화권을 이탈했으므로 오랫동안 꺼두었다. 지루한 시간이 흐른 뒤, 오후 1시 50분에 우리는 이즈하라에 도착하였다.


대마도 도착


사진 115; 후쿠오카(福岡)↔이키(壹岐)↔이즈하라(嚴原)↔하타카츠(比田勝)를 왕래하는 배.  우리가 도착한 곳이 이즈하라(嚴原)라면, 부산으로 출발할 장소는 하타카츠(比田勝)이다.

  부산에서 대마도의 중심지인 이즈하라까지 직접 들어가는 고속페리는 1999년부터 생겼다고 한다. 이러한 이즈하라는 1997년 11월에 국제항으로 승격되었다. 아무튼 우리가 첫날에 답사하게 될 이즈하라는 대마도에서는 가장 큰 도시로서, 15세기 후반 대마도주 소오 사다쿠니가 대마도의 본거지를 사카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부터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토쿠가와 막부시대에는 대마도와 일본 중앙정권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면서 중심지로서 더욱 확고해지게 된다. 이러한 이즈하라는 그다지 넓지 않으므로, 특별히 버스로 이동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말하자면 걸어 다니면서 답사를 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즈하라의 좁은 골목길과 차량, 깔끔하게 정리된 개천

  이즈하라에 도착한 이후부터 숙소에 짐을 풀기까지,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면서 다니는 본격적인 답사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답사한 곳은 슈젠지(修善寺)이다. 슈젠지는 백제의 비구니인 법묘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그가 순국했을 때 장례를 치른 곳이므로,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비를 세웠다.  자료집에 의하면, “그 비문 한켠에 일해재단이 ‘기여’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찍어온 사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눈밝으신 홍자선생님께서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다. 




다음으로는 오래전부터 한국의 인삼을 취급했다는 약국을 찾았다.




옛날부터 한국과의 거래 물품 가운데 대마번이 일본산 은과 동을 주고 한국에서 사들이는 인삼은 중국산보다 비싸기는 해도 약효가 뛰어난 약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17세기 말에는 오사카와 에도 등의 일본 국내 조달을 통해 많은 이익을 보았다.


  이러한 한국의 인삼은 일본에 서양의학이 보급되기 전까지는 강하고 급한 약성 때문에 치료효과가 빨라 만병통치약으로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아주 수요가 높았다고 한다.

  세이잔지(西山寺)로 가기 위해 이동하던 중 골목 담벽에 있는 금석문이 눈에 띈다. 이마야시키(今屋敷)의 방화벽(防火壁)이다.



화재가 옆집으로 옮겨 붙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1844년에 세워졌다. 축조날짜까지 새겨져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나가사키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세이잔지는 9세기 이전에 세워진 오래된 사찰로, 이즈하라 항구의 모습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고우다케(國府嶽)의 언덕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임진왜란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길잡이를 했던 임제종 승려 겐소(玄蘇)가 세운 이테이앙(以酊庵)이 있다.




이곳에는 겐소의 목상과 함께 김성일(金誠一)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정치가의 잘못된 판단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댓가를 치러야 했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주는 곳이라고 하겠다.


  다음 답사지는 나가사키현립(長崎縣立) 대마역사민족자료관이다. 이곳으로 가는 곳의 입구에는 조선의 통신사가 통과했다고 하는 고우라이몬(高麗門)이 있다. 



대마역사민족자료관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자료관에 대한 소개는 팜플렛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곳에는 아메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를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다음 답사지는 대마번주가 머무르던 성곽인 긴세키죠(金石城)이다. 지금은 150미터 정도의 성벽과 성문만이 남아 있다. 




이 문을 통과하자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최근에 다시 세워진 덕혜옹주와 소오타케유키의 결혼기념비가 있는 신지이케(心字池) 공원이다. 제국주의 침략의 논리에 의해, 철저히 희생되었던 두 사람의 일생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다음에는 역대 대마도주의 무덤들이 모여 있는 반쇼인(万松院)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반쇼인의 답사를 마치고, 국분사로 걸어오는 길거리에는 부케야시키(武家屋敷)가 있다.



담벽을 죄다 덮고 있는 담쟁이가 인상적이다. 문득 어느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저것은 벽…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어떤 시인은 천직이라고 여겼던 직장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엄청난 절망 속에서, 이 시를 지으면서 그래도 살아가야만 할 이유와 희망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케야시키의 담벽에 있는 담쟁이를 보았을 때, 어느 시인이 느꼈을 가슴뭉클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왜일까. 부케야시키의 담벽에 있는 담쟁이를 보면서, 외부의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는 폐쇄성과 결벽성만을 느껴야했던 것은 나만의 지나친 상념에 불과한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골목길을 걷다 보니, 우연히 교회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대마도에 몇 개의 교회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외관으로 볼 때, 신도수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얼마 후에 아메모리 호슈(雨森芳洲)의 가족묘가 있는 쵸쥬인(長壽院)을 잠깐 둘러 보았다.




그런 다음 국분사로 향했다. 이 곳은 조선시대에 파견된 통신사들이 머물렀던 숙소였다고 한다.



이상한 점은 내가 참고한 자료 두 곳 모두, 국분사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왜일까. 하나의 의문으로 남겨둔다. 국분사 답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니, 맛있는 저녁 식사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첫날 답사의 공식적인 일정은 끝났다. 저녁식사 이후에는 삼삼오오 흩어져서 나름대로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첫날 답사에서 아쉬웠던 점은 너무나 빠르게 이동하였기 때문에, 느긋하게 유적지를 감상할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저녁식사 이후에도 이번 답사에 참여한 여러 선생님들이 전체적으로 함께 모여 서로 이야기할 시간을 갖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