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ㆍ부안 일대 답사기 : 산ㆍ바다ㆍ들판의 어울림

BoardLang.text_date 2009.08.13 작성자 강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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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여름수련회 답사기】

고창ㆍ부안 일대 답사기 : 산ㆍ바다ㆍ들판의 어울림


강혜라 (중세사 1분과)


  지난 7월 4일 나는 전북 고창ㆍ부안 일대로 한국역사연구회 여름 수련회를 다녀왔다. 2007년 대마도 답사에 참가한 적이 있었지만 신입회원 자격으로는 처음 가는 답사였다. 그래서였을까. 답사 전날 나는 꼭 소풍 가는 초등학생마냥 설렘 반 떨림 반 하는 마음으로 ‘내일 비가 오면 어쩌나, 처음 뵙는 선생님들과 많이 어색하면 어쩌지’하는 걱정을 하며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답사 당일, 다행히 수련회의 출발 예정 시각인 9시에 딱 맞추어 합정역에 도착했다. 벌써 도착하신 선생님들께서는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날씨도 맑고 일정도 예정대로 진행되어 무사히 출발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문제라면 답사 장소에 관한 것이었다.

  참가 자체에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있었는지 장소에 대해서는 흘려듣고 말았는데, 내가 잘못 전해들은 곳은 한산도였다. 따라서 세병관, 충렬사, 해저터널, 포로수용소 등 통영ㆍ거제도 일대 답사를 상상했던 나의 기대는 참으로 허망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당황하는 사이 버스는 달리기 시작했고, 목적지인변산반도로 향했다. 
1. 추억을 담는 바다, 채석강

  버스 안에서 전날 설친 잠을 자다 보니 어느새 변산반도 부안군 곰소에 도착해 있었다. 점심식사를 위해 들른 곰소에서 매운탕과 함께 먹은 오징어젓, 가리비젓, 토하젓, 어리굴전 등은 과연 명성 그대로 반주를 부르는 맛이었다. 식당 바로 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는데, 채석강처럼 화려한 맛은 없었지만 한적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곰소에서 버스를 타고 조금 더 가자 첫 번째 답사지인 채석강(彩石江)이 나타났다. 변산반도의 가장 서쪽에 위치했다는 이곳은 탁 트인 바다와 침식작용으로 인한 절편 모양의 바위가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었다. 바로 위쪽 격포해수욕장에는 벌써부터 여름을 즐기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와 있었는데, 그 틈에서 답사를 한다는 것이 조금 이색적이었다.


<사진 1> 채석강

  해안을 거닐면서 채석강의 명칭에 대한 의문과 추측들이 제기되었는데, 그 경치가 당나라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물 위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비슷하다 해서 이름 붙었다 한다. 그러나『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문집들을 찾아보아도 이백의 채석강 얘기만 나오니 확실한 유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격포진(格浦鎭)에 대해서는「서쪽에 있으며 변산(邊山) 서쪽 기슭 끝 바닷가에 있다. 조수가 차면 호수를 이루고 썰물 때는 갯바닥이 된다. 인조 때에 처음으로 진(鎭)을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었으며, 숙종 4년 성을 쌓은 후에 감영(監營)에 속하게 하였다. 제방(堤坊)을 쌓아 물을 막았는데, 헌종 9년에 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新增東國輿地勝覽』卷34, 全羅道 扶安縣).

  여튼 우리나라의 채석강에서 나름 발을 담그고 ‘벌써 이곳만 7번째 방문이라 지루하다’거나 ‘첫사랑과 연애할 때 왔던 장소라서 그런지 애잔하다’하시는 선생님들의 소소한 추억담을 본의 아니게 엿들으며 유쾌하게 첫 코스를 마쳤다.
2. '화려하지만 시끄럽지 않은'

  다음 답사지는 전나무 길과 꽃살문으로 유명한 내소사였다.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600m 가량의 전나무 숲길은 청신함 그 자체였다. 일주문에서 경내까지의 거리는 마음의 먼지를 떨고 부처의 세계로 가는 마음을 가다듬는 데 필요한 만큼이라고 하는데, 이 길만 같으면 나 같이 미혹함 많은 속인도 충분히 부처님을 뵐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천왕문에 이르자 좌우로 둘린 야트막한 담이 비로소 경내에 들어섰음을 알린다. 절 안은 낮음직한 축대와 계단이 몇 차례 거듭되면서 조금씩 높아지는 구조였다. 특히 두 번째  계단 바로 옆의 아름드리나무가 눈에 띄는데, 언뜻 보아도 수령이 엄청날 듯 굵고 잎도 복슬복슬 나 있어서 그저 농을 해 볼 심산으로 '유한양행 나무(이 회사의 로고와 비슷하게 생겼다)'라 칭하며 '귀엽게도 생겼네'하고 놀리면서 지나갔다.

  그런데 이런. 내소사를 나오면서 보니 일주문 바로 밖에 인줄을 친 똑같이 생긴나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이 나무는 수령이 950여년 된 입암마을의 할아버지 당산으로 일주문 바깥에 선 할머니 당산나무와 짝을 이루는 것이라 한다. 또 해마다 정월 보름에는 할머니 당산나무 앞에서 내소사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당산제를 지낸다 하니 얼마나 큰 무례를 범한 것인가. 절 안에 칠성각과 산신각이 있는 것이야 흔한 일이지만 당산나무가 들어와 있는 일은 거의 본 적이 없어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몰라서 한 농이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리라 믿는다.



<사진 2> 할아버지 당산나무



<사진 3> 할머니 당산나무

  당산나무를 뒤로 하고, 높이가 높았다 낮았다 일정하지 않은 주춧돌을 맘껏 그랭이질 하여 기둥을 얹은 봉래루를 오르자 대웅보전(보물 제291호)삼층탑, 설선당, 요사채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조선 인조 11년(1633)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는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집의 모습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성행한 다포계 건물이라고 하는데 쇠못 하나 쓰지 않고 모두 나무로만 깎아 끼워 맞추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러나 단청이 퇴락하여 나무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화려함 속에 고풍스러움을 담고 있는 듯했다. 혹자의 말대로 '화려하지만 시끄럽지 않은' 내소사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사진 4> 내소사 대웅전


<사진 5> 대웅전 꽃살문 : 불성을 깨우치는 단계를 꽃봉오리와 활짝 핀 꽃에 비유하여 표현했다 한다.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각각 봉안하였다. 불화로는 영산회후불탱화(보물 제1268호)와 지장탱화를 그렸다고 하는데, 영산회후불탱화는 다른 곳에 보관해놓았는지 볼 수 없었다. 또한 불상 뒤편의 후불벽에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 중 규모가 가장 크다는 백의관음보살좌상이 있다고 하는데, 기도를 올리시는 보살님들과 스님을 방해할까 염려되어 들어가보지 못했다.

  대웅보전 앞에 놓인 날렵하고 아담한 삼층석탑을 보고 다시 봉래루를 내려오니고려동종(보물 제277호)이 한켠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종은 전형적인 고려 후기 종으로, 특히 명문이 남아 있어서 주목되었다. 범종을 주조한 직후 새긴 원명과 후에 추기한 명문을 당좌와 당좌 사이 세 군데에 나누어 새긴 것이 그것인데, 명문에 따르면 이 종은 본래 고려 고종 9년(1222)에 청림사 종으로 주조되었으나 청림사가 없어진 후 조선 철종 4년(1854)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한다.

  부회장님과 고려시대 수공업사를 전공하시는 이충선 선생님이 열심히 판독하시는 것을 눈동냥, 귀동냥 한 결과 명문에 나타난 종의 주조 목적, 시기, 무게, 동량(棟梁), 장인(匠人) 등의 내용을 어렴풋이나마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중 원명(原銘)에 새겨진 장인 한중서(韓仲敍)는 주금장(鑄金匠)으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여러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남겨 놓았다 한다.

  숭경(崇慶) 2년(二年, 1214) 고령사 반자(高嶺寺 飯子: 일본국립동경박물관 소장), 무술명(무술명, 1238년) 신룡사 소종(神龍寺 小鐘: 부산박물관 소장), 무술명(戊戌銘, 1238년) 복천사 반자(福泉寺 飯子: 부산박물관 소장), 임자명(壬子銘(1252년) 옥천사(玉泉寺) 안양사(安養社) 반자(飯子: 고성 옥천사 소장) 등이 그의 작품으로 청림사 종까지 총 5점에 그 이름이 전한다.

  한편 대장경 판각에도 그의 이름이 보이고 있어 경판 각자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 주금장의 행적과 배경ㆍ사회적 신분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는데, 정작 보종각 안에서 동전 투척이나 당하고 있는 동종의 처지를 보니 문득 안쓰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진 6> 내소사 동종

  돌아나오는 길에는 도토리묵과 파전을 곁들인 동동주 파티가 한바탕 벌어졌다. 달짝지근한 동동주의 맛이 꼭 내소사를 닮은 것만 같았다.
3. 돌을 인 여인의 마음으로

첫째 날의 마지막 답사지는 고창읍성이었다.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 이 읍성은 전국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자연석 성곽으로, 단종 1년(1453)에 세워졌다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고 한다.


  읍성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띈 것은 여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고 있는 동상이었다. 무얼까 하고 보니 고창읍성에 전해오는 풍속으로, 윤삼월에 돌을 이고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저승길이 환히 트여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 한다.

  성을 다 밟은 후에는 머리에 이었던 돌을 성 입구에 쌓아두도록 했다는데, 이는 겨우내 얼어부푼 성을 다지고 유사시에 대비하려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비록 사적으로 남아 관광객들을 맞고 있지만 조선시대 여인들이 우르르 모여 저마다 돌을 이고 성밟기를 했던 모습은 왁자지껄 활달했을 것이다. 그렇게 돌을 인 여인이 된 심정으로 읍성을 둘러보았다.


<사진 7> 고창읍성 성밟기 풍습 동상

  성 둘레를 다 도는 것은 무리도 무리려니와 관아 내 건물을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따라 북문에서 시작하여 성벽을 따라 반만 걷기로 결정되었다. 성둑에 올라서서 아래를 바라보니 예전에는 평야였을 넓은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것이나 산을 따라 죽 둘러친 것이 읍성이라기보다는 산성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총무부장님으로부터 중간 중간 있는 치(稚), 옹성(甕城) 등의 시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동남치까지 거닐었다.


<사진 8> 고창읍성 성벽과 옹성

그리고나서는 객사, 동헌, 내아, 장청, 풍화루 등의 관아건물을 차례로 둘러보았는데 객사 앞에서는 단체사진을 찍는 시간도 가졌다. 건물의 대부분이 전화로 파괴되었다가 1976년부터 복원되기 시작했다는데 아직도 마무리가 되지 않아 어수선한 감이 있었다. 대원군 척화비와 관아 비석을 살펴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첫째 날 일정이 끝났다.

4. 30년 전통의 그곳

  숙소는 총무부장님이 강조하신대로 30년 전통을 자랑하는 동백호텔이었다. 내부 수리를 했는지 2006년 방문했을 때보다 깔끔해진 것 같았다. 호텔 1층의 식당에서 장어에 복분자로 배를 채우고 얼마 동안의 휴식을 취한 뒤 바로 세미나가 이어졌다.

 「한국역사연구회 창립 20주년 이후의 활동 방향」이라는 주제로 회장님의 발제가 있었고 이후 토론 시간을 가졌다. 특히 신입회원들이 연구회에 기대하는 바를 말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결론은 분과 운영력 강화가 필요하다는 방향으로 모아지는 것 같았다. 세미나가 끝나고는 음주와 대화ㆍ소단위 토론 시간이 아주 장시간 계속되었다.

(참, 빼먹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토론시간 전에 이벤트에서 당첨된 경품을 양보해 주신 중세사1분과장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5. 도솔산 선운사

다음날 숙취가 채 가시지 않은 몸을 떠밀어 아침을 먹고 도솔산 선운사로 향했다. 약간은 불편한 몸 상태와는 달리 하늘은 맑기만 했다. 일주문을 지나 산책로 같이 잘 정돈된 숲길을 지나자 부도밭이 나타났다. 여러 기의 크고 작은 종형 부도와 부도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그 중 유난히 새것인 듯한 부도비가 눈길을 끌었다.


  ‘화엄종주백파대율사(華嚴宗主白坡大律師) 대기대용지비(大機大用之碑)’라고 쓰인 이 부도비는 본래 백파율사의 부도비인데, 원형을 5% 정도 축소 모조하여 그 자리에 세워놓은 것이라 한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 힘입은 것일까. 하도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하고 싶어 하는 바람에 1990년에는 콩기름칠을, 2008년에는 이전을 당한 셈이니 그 인기값을 톡톡히 치르는 것 같았다.

  현재 원형은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부도비와 함께 부도도 있을 터인데, 여러 기의 부도 중 어느 것이 백파율사의 것인지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그저 추측해 보자면 종형 부도들 가운데 홀로 자연석을 기단 삼아 탑 모양으로 세워진 비의 바로 뒤 삼층부도가 그것이 아닌가 싶었다.


<사진 9> 선운사 부도밭


<사진 10> 백파율사 부도비 모조본

  잠시 머물렀던 발걸음을 다시 옮겨 경내로 출발했다. 시간상 낙조대까지는 가지 않고 도솔암만 보고 가기로 했다. 종루를 겸한 천왕문과 투박한 맛의 만세루를 뒤로 하니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대웅보전(보물 제290호)이 나타났다.

  이 대웅보전은 본래 5여래 6보살을 모셨었는데 정유재란(1597) 때 피해를 입고, 광해군 5년(1613) 중창하여 중앙에 비로자나불과 좌우로 약사여래, 아미타불의 삼존불만 봉안한 것이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의 수인이 보통의 지권인이 아니라 한쪽 검지를 꺾어 맞댄 독특한 모양인 것과 잘 그려진 후불벽화가 인상 깊었다.


<사진 11> 선운사 대웅전의 본존불인 비로자나불

  이외의 당우로는 영산전, 관음전, 팔상전, 명부전, 산신각 등의 건물이 있었다. 특히 관음전에는 성종 7년(1476) 만들어져 선운사가 모두 불에 탄 정유재란 때도 화를 면했고, 일제시대에 일본인의 손에서도 되돌아왔다는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이 있다는데 미처 모르고 돌아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경내에서 도솔암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힘들었다. 그래도 다른 선생님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가다 보니 어느새 선운산 중턱, 칠송대의 암각여래상(보물 제1200호) 앞에 이르러 있었다. 40m가 넘는 깎아지른 암벽에 새겨져 있는 암각여래상은 딱 보아도 여지없는 고려시대 불상이었다.

부드럽고 원만한 인상과는 거리가 먼 이 마애불은 우람하고 장대한 모습을 하고 연꽃무늬의 좌대 위에 앉아 있었다. 투박한 개성을 보여주는 이러한 특징은 신라하대 이래로 지방의 소위 호족들이 발원한 부처님상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머리 위에 군데군데 난 구멍과 나무가 박혀 있는 것은 동불암이라는 누각의 기둥을 세웠던 흔적인데, 마애불에 누각을 세웠다는 것이 참 재미있다. 기록에 의하면 인조 26년(1648)에 무너졌다고 한다.

  또 명치께에는 백회로 봉한 감실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석불비결 전설과 동학도의 비결탈취 사건의 중심이 되는 배꼽이다. 새 세상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던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된 사건일 테지만, 솔직히 난 마애불의 배꼽에서 실제로 무엇이 나왔는지가 못내 궁금하기만 했다.


<사진 12> 도솔암 마애불

  이미 산행으로 지쳐 있던 나에게 마애불 위편의 가파른 계단은 위협적으로 느껴졌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가보자는 생각으로 도솔천 내원궁에 올랐다. 그런데 내부에는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이 봉안되어 있었다. 전각의 이름으로 보면 미륵보살이 봉안되어야 할 것인데 지장보살을 모신 것이 이상했다.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배고픔과 체력저하로 인해 두 다리는 벌써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6. 동암 생가터

  선운사 산행으로 허기진 배를 장어학교 4학년 1반에서 시원한 복분자 냉면으로 채우고서 마지막 답사지로 향했다. 짭짤한 바닷바람과 직접 담근 복분자술의 기운이 두 다리에 힘을 실어 주었다. 

  답사의 마지막 코스를 두고는 의견이 분분했었는데, 결국 인촌 생가와 동암 생가 중 후자로 결정되었다. 반암리에 위치한 백남운 생가는 산과 산이 둘러싼 반암마을에서도 한참이나 구석에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햇볕에 번쩍번쩍 빛나는 검은색 양철지붕이 눈에 띄었는데 바로 그곳이 동암(東岩) 백남운(白南雲) 생가였다(고 생각했다). 2년 전 이맘때만 해도 분명 낡은 기와지붕이었는데 그새 누군가가 양철지붕을 얹어놓았다.

  동암 선생님의 가족들은 6ㆍ25전쟁 당시 뿔뿔이 흩어지고 마을을 지키던 동생과 조카도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었는데 누가 고쳐놓았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 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으로는 ‘집주인이 전주에 사는데 구경꾼들 실컷 구경하고 가라고 고쳐놓고 갔다’고 한다. 여튼 폐가와 다름없는 집에 번뜩이는 양철지붕은 참 아이러니해보였다.


<사진 13> 백낙규 옹 재실

  그리고 답사후기를 쓰면서 알게 된 것인데 여태까지 내가 동암 생가라고 알고 있던 그 집이 사실은 재실(齋室)이었다고 한다. 동암 선생님이 해방 이후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부친 백낙규 옹에게 사사한 문하생들이 계를 만들어 그 분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 한다. 하지만 원래 재실 안에 모셨다던 백낙규 옹의 애서와 글씨들은 행방이 묘연했고, 낙서와 누덕누덕한 벽지만이 붙어있었다. 관리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1947년 건립 당시에는 제법 튼튼하게 만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암 선생님이 살던 집터는 재실 뒤쪽 빼곡히 자란 대나무 근처 어딘가라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일제시기 조선 경제사학을 개척한 지식인이자 해방정국의 주요 정치인 중 한 사람이며, 월북 후 초대 교육상으로서 정권 창설에 앞장섰던 한국 마르크스주의 지성의 원류인 백남운 생가의 이런 처참한 모습을 혹자는 인근 마을 인촌 김성수 생가의 멋들어진 기와집과 대조하기도 한다. 그리고 두 생가의 대조적인 외형과는 달리 역사적 평가는 정반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렇게 백남운 생가터를 마지막으로 산ㆍ바다ㆍ들이 어우러진 1박 2일의 수련회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출발 전의 긴장감과는 달리 여유로움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던 답사였다. 답사 고수 선생님들 틈에 끼어서 답사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답사를 적극 추천해주신 총무부장님과 함께 답사를 갔던 회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후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