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의 도시 인천에서 본 근대의 풍경[1]

BoardLang.text_date 2009.10.29 작성자 김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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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의 도시 인천에서 본 근대의 풍경


김항기(근대사 분과)


  나는 인천에서 초ㆍ중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시리즈에서 인천 야구팀인 와이번스가 우승하기를 기원하는 인천사람이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개항기 역사를 공부하면서 개항장 인천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고 언제 한번 개항장 일대를 답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좋은 기회가 생겼다. 연구회 근대분과의 답사지가 인천 개항장 일대로 결정된 것이다.

  2009년 8월 29일 토요일, 분과답사가 있는 날이지만 11시를 넘긴 늦은 오전에 눈을 떴다. 답사장소가 내가 살고 있는 인천이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모이니 좀 더 여유를 부려도 된다는 생각에 눈을 다시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늦었다. 서둘러 씻고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다행히 약속시간인 2시를 넘기지는 않았다.

  집합장소인 인천역 광장에 도착하니 이미 분과장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선생님들이 계셨다. 잠시 후 이번 답사의 안내를 맡으신 이영호 선생님과 안내 보조 황은수 선생님길민정 선생님이 앙증맞지만 알찬 답사집과 함께 등장하면서 답사가 시작됐다.

  답사의 첫 번째 코스는 월미산이었다. 월미산은 월미도의 가운데에 솟은 작은 산(108m)이다. 한국전쟁 이후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으나 군부대가 이전하면서 2001년 일반에 개방되었다. 월미산에 오르니 왜 군대가 주둔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인천항과 영종도를 비롯한 해안 일대의 모든 섬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위에서 보니 역시 인천은 항구였다. 인천항 특유의 갑문식dock도 보였다.


<그림 1> 인천항 내항


<그림 2> 갑문식 도크 : 해사고등학교 뒤편에 보이는 시설물이 갑문식 도크다.

  동쪽의 조계지일대를 바라보았다. 영국공사관이 있었던 파라다이스 호텔과 언덕위의 자유공원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인천이 제물포라는 이름을 갖게된 이유는 제물진이라고 하는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물진은 강화도 방어를 강화하면서 광성보로 이전하였고 인천지역은 제물이라는 지명만 이어받게 된 것이다.


<그림 3> 조계지 일대 : 가운데 보이는 산이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한 조계지 일대이다.

  남으로 눈을 돌리니 멀리 송도일대의 높은 건물과 곧 개통을 앞둔 인천대교가 보였다.  이영호 선생님께서는 송도라는 지명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계셨다. 일본에도 경치가 좋은 해안 송도라는 지명이 많고 일제시기를 거치며 전국곳곳에 송도라는 지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송도고를 다니던 친구가 송도라는 지명은 한국전쟁 때 개성에 있던 송도고등학교가 옮겨오면서 생겼다고 주장을 한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확인 결과 송도고의 송도는 松島가 아닌 松都였다.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도일대에 국제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송도라는 지명이 문제가 됐다. 백제가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던 능허대등이 대안으로 제시됐지만 국제도시인 관계로 외국인이 발음하기 편리한 송도로 결정이 됐다고 한다.


<그림 4> 월미산에서 본 송도 : 멀리 송도신도시의 높은 건물들이 보인다.

  월미산을 내려와 이민사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이민사 박물관에는 약속시간에 늦은 선생님들이 기다리고 계셨다. 이민사박물관에는 1902년 첫 공식이민이 이루어질 당시의 황성신문 기사를 비롯한 이민 모집 광고, 이민을 담당한 유민원에서 발행한 여권인 집조등이 전시되 있었다.

  최초의 이민선인 갤릭호 모형이 인상적이었다. 사탕수수농장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걸었던 반고라는 신분증과 그들의 고된 노동생활을 담은 영상을 통해 초기 한국인 이민자의 고된 삶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림 5> 이민사 박물관의 내부 : 최초의 이민선 Gaelic호의 모형이다.

  이민사 박물관을 나와 조계지로 향했다. 조계지의 답사는 차이나타운을 거쳐 자유공원을 오르며 시작됐다. 자유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존스턴 별장과 세창양행 사옥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그 자리에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과  인천상륙작전의 지휘관 맥아더의 동상이 서있다.

  몇 해 전 인천에서는 이 맥아더의 동상을 둘러싸고 극심한 좌ㆍ우의 대립이 일어났었다. 인천지역 시민단체가 맥아더의 동상을 이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이른바 보수우파를 칭하는 어르신들이 맥아더 동상의 이전에 반대해 과격한 물리적 행동을 하며 갈등이 빚어졌었다. (맥아더 동상을 보니 학부시절 서울역에서 동상 이전에 찬성하는 서명 하다가 해병대 옷을 입은 어르신들에게 맞을 뻔한 슬픈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에 맥아더의 동상은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으로 이전하고 대신 그 자리에 인천 감리서에서 복역한 김구의 동상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그림 6> 위풍당당 맥아더 : 위풍당당한 모습의 맥아더를 보고 있으니 우울한 하늘처럼 내 마음도 우울해졌다.

  자유공원을 내려오면서 홍예문을 지났다. 홍예문(虹霓門)은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높이 약 13m, 폭 약 7m의 화강암 석축을 쌓고 터널처럼 만든 석문으로 대한제국 시대에 철도 건설을 담당했던 일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하여 1908년 준공하였다. 당시 인천 중앙동과 관동 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수가 급격히 늘자 만석동 방면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이 홍예문을 뚫었는데 일본인들은 혈문이라 불렀다.


<그림 7> 홍예문의 모습

  홍예문 위의 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니 내동성공회성당이 나타났다. 1890년 9월로 고르페 주교가 인천에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인 성미가엘 성당를 설립하고 선교활동에 들어갔는데 이 교회가 바로 성공회 인천내동성당이다. 내동교회는 이듬해 10월 교회 이웃에 인천 최초의 서구식 병원인 聖 누가 병원을 세웠다. 영국은 내동교회를 중심으로 인천과 강화지역에 선교활동을 펼쳤다. 특이한 벽이 흥미로웠다.


<그림 8> 내동교회


<그림 9> 내동교회의 특이한 벽

  내동교회에서 내려와 김구가 복역했던 인천 감리서지를 살펴보고 제물포 구락부를 거쳐 일본 조계지로 향했다.


<그림 10> 감리서가 있던 곳 : 현재는 감리서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그림 11> 제물포 구락부

  일본 조계지의 모습은 흡사 영화세트장 같았다. 정말 성의 없이 조성한 거리였다. 이왕 돈 들이는거 제대로 좀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은행 건물들(58은행, 18은행, 제일은행)은 인상적이었다.

  인천 일본 58은행은 일본 오사카에 본점을 둔 58은행의 인천지점으로 1892년 7월에 개점했다. 1939년 신축된 이 건물은 광복 후 조흥은행 인천지점,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인천 일본 18은행은 1890년 준공되어 그해 10월에 개점하였고 중앙동2가 24번지에 있으며 58은행의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1954년에 상공은행과 신탁은행의 합병으로 발족한 한국흥업은행 지점으로 사용된 이후, 1992년까지는 카페 그 후 중고 가구 도매상이 임대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인천일본제일은행지점은 1883년 11월 일본의 제일국립은행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로 출발했다. 1909년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창립되어 제일은행인천지점이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바뀌었다. 해방 후 조달청 인천 사무소, 동인천 등기사무소 등 주인이 바뀌면서 증축되거나 개축되면서 건물의 외향이 조금씩 변형되었지만 기본골격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박물관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영호 선생님께서는 박물관 보다는 은행으로 사용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말씀 하셨다. 예전의 은행이었던 곳이 지금도 계속해서 은행으로 사용된다면 문화재적 가치가 더 생길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은행으로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12> 인천 58은행

  일본인 조계지에서 다시 차이나 타운의 청국조계로 향했다. 차이나타운 內 화교학교에는 원세개가 머물던 공관이 남아있었다. 원대인(?)의 처소치고는 너무 소박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림 13> 청국공관 : 원세개가 머물던 공관이다. 생각보다 아담하고 소박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보니 너무 배가 고팠다. 차이나 타운에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나는 맛있는 냄새에 허기짐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중화요리 전문점 공화춘을 살펴보고 이영호 선생님의 추천 맛집인 ‘풍미’로 향했다.

풍미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차이나 타운의 대표 맛집답게 정말 맛있었다. 8가지의 코스요리와 중국술을 함께하니 답사의 피로와 배고픔이 눈녹듯 사라졌다. 게다가 답사비 없이 공짜로 즐기니 더 맛나고 좋았다.


<그림 14> 공화춘 : 우리나라 최초의 중화요리집인 공화춘의 모습이다. 맛있는 짜장면을 우리에게 전파해 주신 1대 사장님께 감사를 표한다.

  답사는 신포동에 위치한 한 째즈바에서 맥주와 함께 마무리 됐다. 아리따운 여가수가 노래를 부르며 관객의 호응을 유도했지만 손님의 대다수를 차지한 역사 공부하는 사람들은 별다른 호응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