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복사지와 진평왕릉

BoardLang.text_date 2012.10.14 작성자 하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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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복사지와 진평왕릉



 하일식(고대사분과, 연세대 교수)


 

  대릉원과 첨성대, 월성을 휙하니 둘러보고 자리를 뜨는 것이 가장 흔하고 초보적인 경주답사이다. 수학여행이나 관광 정도로 지나가는...


그러나 지금은 답사객들의 수준이 왠만한 전문가 못지 않게 높아져서, 구석진 유적지를 찾아가더라도 어디서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종종 아이들을 데리고 온 아빠와 엄마를 볼 수도 있다.

황복사지와 진평왕릉은 보문들판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마주한다.
가을녁, 추수가 끝나기 전에 찾아가서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보문들판 사잇길을 거닐며 두 군데 유적을 한가로이 돌아보는 것은 인상깊은 답사길이 될 수 있다. 추수가 끝나면 횡~하니 뿌리만 남은 삭막한 논바닥을 볼 것이므로, 그 전에 가는 것이 좋을 지 모른다.

2012년 10월 6일.
그 전날 대구에 일정이 있어서 갔다가 경주에 와서 하루를 자고, 느즈막히 일어나서 진평왕릉과 황복사지를 들렀다. 대구까지 갔다가 바로 상경하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직접 운전을 하며 대구로 갔다가, 다시 경주로 향했던 것이다.

예상했던대로 누렇게 익은 벼가 사진찍기에 딱 좋다. 얼마전 지나간 태풍으로 경주 포항 근방도 꽤 피해가 있었다는데, 이곳의 논들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은 듯하다.


[그림 1] 황복사지 석탑

황복사는 언제 세워져서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신라의 고승 의상(625~702)이 이 절에서 출가한 것으로 알려지므로, 그 이전에 창건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1930년대에 낭산 동쪽 기슭에서 '황복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으므로, 그때부터 이곳을 황복사지로 판단하게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이 절에 머물면서 탑돌이를 할 때, 계단을 밟지 않고 허공으로 올랐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유명한 승려를 떠받드는 이들이 만들어낸 재미 있는 이야기일 뿐...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황복사는 신라 경덕왕 때의 고승 표훈(表訓)이 머물며 화엄을 강의한 곳이기도 하다. 760년(경덕왕 19)년 무렵에 현직에서 은퇴한 김대성(金大城)이 표훈을 찾아와 화엄을 배운 적이 있었다. 김대성은 뒤에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을 창건한 주역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황복사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순금으로 만든 여래입상(如來立像)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나왔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을 통해 692년(효소왕 1)에 효소왕과 신목태후(신문왕의 왕비)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탑을 세웠고, 706년(성덕왕 5)에 성덕왕이 석탑의 2층에 불사리 4개와 순금 아미타불상,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넣으면서 왕실의 안녕과 중생의 구제를 기원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사리함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탑이 있는 곳에서 조금 내려와, 동쪽으로 논두렁길을 걷다보면 곧 아래와 같은 파손된 귀부가 보인다. 이 절에 세워진 것인지, 아니면 인접한 다른 유적지에 세워진 비석이 있었는지는 잘 판단하기 어렵다. 이 부근에서는 2종류의 작은 비석 파편이 4개 발견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 2] 황복사지 동쪽 논두렁의 귀부

귀부가 있는 곳에서 200m 쯤 더 동쪽으로 걸어가면 논 한 가운데 이런 석재들이 박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경운기로 농사짓기에 꽤 곤란한 장애물이다. 경주에서 집짓고 살고 농사짓고 살기가 불편하다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추수가 끝나고 난 빈 논이라면 석재들을 더 뚜렷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논 속에 절반 가량 묻힌 것들이 많아서, 이들 석재들이 어디에 쓰인 것인지를 판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일부 석재에 표면이 둥글게 깎인 것들이 있고, 석재들이 원형을 그리며 놓여 있어서, 능묘에 쓰인 돌들이 아니었겠는가 추정하기도 한다.


[그림 3] 황복사지 동쪽 논 가운데 박혀 있는 석재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1968년에 황복사 금당터를 발굴할 때, 12지신상들이 불규칙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들 12지신상은 원래 사찰 건축물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능묘에 사용되었던 것이라 추정된다. 바로 위 사진에서 보는 것과 맥락이 같은 석재일 듯하다.

그래서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강우방 선생은 원래 이곳에 능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문왕을 "낭산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했는데, 지금 신문왕릉으로 알려진 곳은 낭산 동쪽이 아니라 남쪽이다.
그리고 강우방 선생은 황복사지 금당터에서 나온 12지신상들도 봉분이 사라진 뒤에 옮긴 것이라 추정한다.


[그림 4] 동쪽 논두렁에서 바라본 황복사지 석탑.

강우방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지금의 신문왕릉은 효소왕릉일 가능성이 높다(현재 효소왕릉으로 전해지는 곳은 낭산 부근이 아니라 불국사 쪽으로 훨씬 더 가서, 성덕왕릉에서 8시 방향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그러나 이곳이 효소왕릉이라는 확증은 없고 그냥 그리 전해올 뿐이다). 그리고 실제 신문왕릉은 황복사지 탑 동쪽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결과적으로는... 무슨 이유에선가 이곳에 있는 신문왕릉을 옮기거나 없애고, 그 석재들을 황복사에서 사용했다는 것인데,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

황복사가 창건된 것은 신문왕대보다 훨씬 이전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무슨 이유로 옛 신문왕릉에 사용된 석재들이 황복사지 금당 터에서 나오게 되었을까?
또 왕릉의 석재들을 일부 들어내서 사찰에서 사용하고, 나머지를 방치했다는 것인데,

어떤 이유로 이장을 했다면 석재들을 완전히 정리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물론 일부를 방치했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의문은 꼬리를 물고 생겨난다.

강우방은, 낭산 서쪽의 능지탑에 박혀 있는 12지신상들이 2군데 이상의 장소에서 옮겨진 것들이라 추정한다.

옳은 이야기이다.
능지탑에는 2종류 이상의 12지신이 있기 때문이다. 무복(武服)을 한 것과 평상복(平常服)을 한 것이 섞여 있고, 그들 중에서도 조각 수법이 다른 것들이 있기 때문에 '2종류 이상'이라고 한 것이다.
어쩌면 그 중의 일부가 황복사지 동쪽에서 가져온 것일 수도 있으리라.
이렇게 황복사지는 여러 의문을 안고 있는 유적이다.

황복사지에서 멀리 동쪽을 바라보면, 보문들판을 가로질러 반대쪽에 고목들이 우거진 곳, 그 한 가운데 큰 봉분이 보인다.

진평왕릉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진평왕릉이다. 이곳이 진평왕릉이라는 확증이 없고, 오히려 당시 왕릉의 입지 변화 추세를 고려하면, 진평왕릉이 이곳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에 논란의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림 5] (전)진평왕릉,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보문들판 논두렁길을 가로질러 가면 이런 모습. 수년전에 주변을 정비하여 제법 깔끔한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예전의 풀숲 우거진 모습 그대로가 더 나았다는 생각도 한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이 무덤 주위에는 제법 울창한 고목들이 들어 서 있다. 오랜 세월, 주변의 농민들이 무덤 주위의 나무들을 함부로 베어가지 않고 보호했기 때문에 남겨진 풍경이다. 그래서 단풍이 들 무렵에 와서 보면, 고즈녁한 분위기가 무척 마음을 끄는 곳이기도 하다.


[그림 6] (전)진평왕릉.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예전에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던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 이는 유홍준 선생이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정양모 선생에게서 들은 이야기 즉 "경주를 알려면 진평왕릉, 장항리 절터를 가보고, 성덕대왕신종 치는 소리를 직접 들어보라"는 이야기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여러 차례 진평왕릉을 가보았으니 잘 공감이 안되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 그윽한 분위기와 함께, 신라 문화의 대부분이 창조된 그 시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내 기억에는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듯...

유홍준 선생은 통일신라 왕릉처럼 장식이 화려하지도 않고, 소박하면서도 위엄이 있는 큰 봉토분의 모습을,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의 분위기와 함께 잘 설명한다. 6세기 말 ~7세기 중반까지의 신라사회의 분위기랄까... 하는 것과 연결지어서.

그러나 나는 역사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오늘날 남아 있는 고목들이 주는 그윽한 분위기... 주관적으로 이런 느낌을 사실처럼 전달하는 내용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예전에는 (전)진평왕릉 부근은 물론, 황복사 탑쪽에서 봉분까지 걸어가는 농로 부근에 더 많은 고목들이 있었고, 농수로를 내면서 많은 나무들을 베어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봉토 부근에만 일부 고목들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그러나 어쨌든, 지금 고목들과 어우러진 고분의 분위기가 신라 시대 당시의 것이 아님에랴. 다만, 그 아득한 옛날, 왕릉급 고분 주위에 심어진 나무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도 농민들이 함부로 베어내지 않아  보존되었고, 고목이 쓰러지고 다시 새 나무가 고목이 되는 긴 세월을 반복해왔을 수는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이 분위기가 1천 5백년 전의 그 분위기일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봉분은 진평왕릉이라고 전해지는 것일 뿐, 진평왕릉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림 7] 바람에 흔들리는 황복사지 앞의  코스모스, 가을 한복판에 서 있음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