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구박물관을 다녀와서

BoardLang.text_date 2013.05.24 작성자 인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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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구박물관을 다녀와서


인용식(고대사분과)

   지난 4월에 1학기 학부답사가 경남 가야문화권을 주제로 진행된다기에 코스에서 아쉽게 빠진 곳을 먼저 가볼 요량으로 지도교수이신 이순근 선생님, 고현아 선생님 그리고 허남팔선생님과 오붓하게 경남 답사를 갔다. 완연한 봄에 차량운전은 춘곤증을 유발시키니 첫 코스는 경남에 진입하기 전에 대구에 들르기로 했다.


낙동강의 지류인 금호강이 흐르고, 또 그 지류인 산천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지하도를 내려갔다가 올라오기를 반복해서 대구에 처음 와보는 이에게 어리둥절함을 주었다. 지하도에서 나와 바라보는 도심에는 아파트들이 올라가고 있어서, 전국에서 식은 건설경기가 대구에서는 ‘아직’인지 ‘다시’인지는 모르지만 피어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국립대구박물관은 피어오르고 있는 건설경기와는 상반되게 그 크기가 그리 웅장하지는 않았다. 대구박물관은 1989년부터 그 설립이 추진되었고 6년여의 긴 준비기간 끝에 1994년 말에 개관하였다. 처음에는 선사시대에서 고대까지의 유물들을 고고실에 전시하고, 불교 관련 유물을 전시한 미술실 그리고 양반문화와 주거문화를 전시한 민속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2010년도에 재편공사를 하면서 고고실을 고대문화실, 미술실을 중세문화실, 민속실을 섬유복식실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고대문화실과 중세문화실의 전시는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이나, 섬유복식실은 대거 수정되어 섬유와 의복에 대한 전시가 주를 이루고 있다. 대구지역이 섬유산업을 기반으로 근대도시로 성장하였기 때문으로, 대구지역의 특성을 살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

대구에 대해서 사료로 접한 것은 『삼국사기』에서 문무왕과 신문왕에 이은 달구벌 천도계획이었다. 실패로 돌아간 계획이었지만 고구려 장수왕과 같이 성공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상상을 해본 기억이 남아있었다. 신라는 이 대구 지역에 일찍이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첨해니사금 15년(261)에 달벌성 축조기사는 그러한 정황을 보여준다. 고분문화를 살펴보아도 4세기에 이르면 경주와 같은 공통양식의 문화가 성립되며, 5세기대에는 경주에서 신라토기 및 금공예품이 다량 생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구 지역도 신라적 문화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전시실에 들어오기 전까지 오랜 운전으로 인한(?) 가라앉음은 유물들의 향연으로 Bounce되기 시작했다. 신석기시대의 토기들과 청동기 시대의 곡옥이나 관옥들, 마제석검들은 여느 박물관에서 본 것 보다 그 질이 뛰어났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은 유물은 경북 의성군 탑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이었다.



[그림 1] 의성 탑리 금동관 (대구박물관 소장)  ⓒ인용식



이 금동관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出자형 금관이나 山자형 금관과는 다르게 입식 가장자리를 끌로 오려 꼬아서 만들어 깃털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새깃 모양의 금동관은 경주 황남대총남분에서 출토된 은제관과 동일한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졌다. 비록 관식(冠飾)과 관(冠)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제작기법은 길림성 집안현 출토의 금동관식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며, 의성 탑리 고분군의 연대를 5세기 중엽으로 볼 때,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400) 이후 고구려계 문물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 대해서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신라나 가야의 유물에서 고구려의 향기를 느끼는 것은 그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그림 2] 금동여래입상(국보182호),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183호),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184호) (대구박물관 소장)  ⓒ인용식 


다음으로 중세문화실로 들어가 보면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불교문화에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무래도 대구박물관이 자랑하는 국보급 유물들이 눈에 먼저 들어오게 된다.  이 금동불상과 보살상들은 1976년에 경북 선산군 고아면 봉한 2동 뒷산에서 공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전하는 이야기에는 약 70여년 전에 어느 농부가 부근 대밭골이라는 곳에서 발견하고, 몇 년 뒤 76년에 발견된 장소에다가 다시 묻었던 것이라 한다.

이 불상과 보살상들은 모두 한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시대를 모두 달리한다. 우선 국보 182호인 금동여래입상은 다소 경직된 자세와 고졸한 미소가 남아있는 얼굴, 우전왕식의 착의 법, 뒷면에 작은 틀잡이 구멍이 있는 중공식 주조법 등을 보고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국보 183호인 금동관음보살입상을 보면, 전체적인 균형과 조각수법이 뛰어난 이 보살상은 삼국시대 후기 금동보살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어 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국보 184호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중국적인 요소가 강한 복잡하고 화려한 장신구의 표현이 매우 특이하여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 금동보살상으로서는 유례가 드문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한다.

이 세 불·보살상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끌리는 것은 국보 183호의 금동보살상이었다. 약간 숙인 머리에 어깨선이 자연스럽고, 날씬하게 균형이 잡힌 모습이 흡사 불국사의 석가탑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식견이 넓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관음보살상은 매력적이어야 더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림 1] 인물토우 (대구박물관 소장)  ⓒ인용식


섬유복식실을 지나서 다시 고대문화실로 들어가는데, 무심코 지났던 유물이 눈에 띄었다. 세 치가 못되는 듯 보이는 삼국시대 인물토우였는데, 대구 칠곡지구에서 발굴된 것이다. 경주박물관에서 본 아기자기하고 해학적인 토우들과 사뭇 다르게 이 토우는 무심히 바라보는 표정에서 무언가 마음으로 말해주는 듯 보였다. 마치 ‘현대의 산물이 너를 실망시키더라도, 유물은 너를 속이지 않지..’ 라고 말하는 듯 했다. 나오는 길은 무슨 욕구가 해소된 것 마냥 가벼운 발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