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林川澤 : 封禁과 與民共之 ③ 천택과 어량(2)

BoardLang.text_date 2016.10.18 작성자 김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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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진(중세2분과)




11.어물고(魚物庫)와 빙고(氷庫)


 

15~16세기 연해의 진황지와 무너미의 땅이 개간되면서 해변과 하천으로의 접근이 용이해졌고, 사람들은 어물의 생산과 이용을 크게 늘렸다. 이에 따라 어물의 보관을 위한 창고의 시설이 크게 확대되었고, 물고기를 잡기 위한 어량(魚梁)·어전(魚箭)이 곳곳에 설치되었고, 그 수가 크게 늘었다.

15~19세기에 어물의 사용량 변화는 어물고(魚物庫)와 빙고(氷庫)를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어물고는 국가가 설치하여 운영하는 창고였으며, 빙고에 보관된 어름은 어물의 보관과 유통에 널리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어물고는 왕실과 국가에 쓰이는 어물을 보관하기 위해 사재 설치 운영하는 창고였다. 고려시기에 개경에 설치되었던 어물고의 규모가 단층 3칸에 지나지 않았지만, 세종 7년(1425) 무렵 2층 창고가 3~4채였고, 더 많은 수의 가창고(假倉庫)를 설치하여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어물의 사용량이 늘어나면서 생선을 보관, 운반, 유통하기 위해 얼음을 사용하는 예도 많아졌다. 고동환의 연구에 따르면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조선은 국초에 동빙고와 서빙고를 운영했는데, 17세기 중엽에는 동서빙고와 내빙고 2곳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도성에 설치된 국영의 빙고는 농사의 풍흉에 따라 4~8채가 운영되었는데, 평균적으로 6채 가량 운영되었다.

그러나 얼음의 사용량을 크게 늘린 것은 사빙고와 각 지방에 설치된 비고였다. 단종 2년(1454)에 사대부에게 장빙을 자유롭게 허용한 바 있다. 이후 권세가들이 사빙고 설치를 주도하는 가운데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한강가에 설치된 사빙고가 30여 곳에 이르렀고, 한강가에는 사빙고로 가득할 정도로 많아졌다고 한다.

지방 각지에도 오랫 동안 빙고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는데, 특히 생선이 운반되는 역로의 주변에 빙고를 설치하였다. 이는 어물의 생산지에서 도성에 이를 때까지 계주하는 말이 운반하는 생선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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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어물고(좌)와 빙고(우)의 규모 변화

 

12. 어량(魚梁)에서 어전(魚箭)으로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는 시기에 물고기 잡이는 그물질 하는 배로 잡는 어장(漁場), 고기떼가 다니는 길목에 배를 세워두고 잡는 어수(漁隧), 큰 배의 좌우에 작은 배를 날개처럼 벌려 세워 잡는 어종(漁䑸), 대나 나무로 발을 엮어서 물속에 함정을 만드는 어홍(漁篊), 혹은 어전(漁箭)의 방법이 있었다.

어전은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가장 널리 이용된 어로 방법이었다. 하천이나 바다의 얕은 바다에 나무·대나무·갈대 등으로 발[簾]을 엮어 물의 흐름과 물고기의 이동습성을 이용하여 발이 모이는 한 가운데[袵桶] 물고기가 모이게 하여 잡는 방법이었다. 세종대까지 어량(漁梁)과 수량(水梁)으로 불리던 이 어로법은 점차 어전(魚箭) 혹은 어전(漁箭)으로 쓰이다가, 성종대 이후 어전(魚箭)으로 통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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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남해 멸치잡이 어전(죽방렴, 좌:창원일보 2014. 7. 10, 우:http://sato721.blog.me/130191033235)과 김홍도의 어살 그림(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어전의 이익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세종 22년(1440) 의정부 좌참찬(左參贊) 하연(河演)은

나라가 3면이 바다가인지라 좋은 물고기[水族]가 철따라 생긴다. 상등 어전(上等魚箭)의 한물[一水]에 잡히는 것은 언제나 목면(木棉) 5백여 필에 팔린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익은 19세기가지 지속되었는데, 19세기 후반 이유원(李裕元 : 1814~88)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어염의 이익이 산택(山澤)보다 낫다.” 라고 했다.

어염은 그 이익이 막대했기 때문에 권세가와 부상대고들이 차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산림천택의 이익을 백성과 같이 누린다[山林川澤 與民共之]’를 표방한 조선 국가는 이들의 사점을 배제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어전을 재분배하는 정책을 강력히 시행하였다.

태조 6년(1397) 간관이 주부군현에서 산장과 수량을 조사하여 특정 개인이 독점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까닭이었다. 당시 간관은

산장과 수량은 한 나라의 인민이 함께 이익을 누리는 것[山場水梁, 一國人民所共利者也]

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국초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과 『속육전(續六典)』 등에서 법제와 이념으로 천명된 이러한 원칙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다시 정리되었다.

그 결과 조선국가는 전국의 어전을 관어전과 사어전으로 편성하여 호조의 사재감에서 관할하게 하였다. 관어전은 수령과 진장이 소속 공노비·인리·수군 등을 부리고, 결전과 어전 운영에 필요한 재원과 물자를 부담하여 어물을 생산하였다. 이와 달리 사어전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설치와 운영을 맡겼다. 그리고 국가는 3년마다 다른 가난한 백성에게 교체하여 주었고, 사어전을 분급받은 백성은 잡은 물고기의 1/10만을 세로 바치면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국가에서 파악한 어량 어전 등은 주로 호조의 사재감에서 직접 관할하는 관어전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재된 전국의 어량(魚梁) 331개소가 바로 그러한 곳이었다. 이들 어전은 주로 바닷가의 고을에 속했다. 이는 고려 이래의 어량소를 계승한 것으로 국가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많은 어획량을 가진 어량들이 대상이었다.

15~16세기에 가용공간에 우선적으로 편입된 무너미의 땅은 주로 큰 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작은 지천이었다. 무너미의 땅이 개발된 이후 가용공간으로 편입된 크고 작은 하천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어로할 수 있게 되었고, 특정지역에서 일정한 때에 많아지는 어종을 잡기 위한 어전이 설치되었다.

무너미의 땅이 개발되자 전국의 토산에 다양한 물고기가 등장했는데, 그중 은어는 단연 돋보인다.

은어(銀魚), 은구어(銀口魚), 은순(銀脣)으로 불리는 은어는 한반도 연안의 바다에서 어느 정도 자란 후, 번식을 위해 전국 각지 하천의 최상류 지역까지 올라 오는 회유성 어종이었다. 따라서 하천의 길이에 따라 은어의 크기가 달랐다. 이러한 특성에 대해 허균은 <屠門大嚼>에서 “영남에서 나는 것은 크고, 강원도에서 나는 것은 작다.”라는 간단한 표현으로 그 특성을 표현하였다.

수박의 향기가 가득한 은어의 맛은 조선시대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이 맛에 매혹된 것은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국가에서는 은어를 잡기 위해 전국 곳곳에 어전을 설치하였고, 이곳에서 잡은 은어의 일부를 진상 등의 명분으로 거두어들였다.

은어의 포획이 어전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전이 설치된 곳은 다른 곳에 비해 많은 은어를 잡을 수 있었다. 따라서 국가와 지방관은 이러한 곳에 관어전을 설치하여 진상 등 국가의 수요에 충당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각 지방의 토산물로서 은어의 채포지와 채포 여부를 조사하여 세를 정한 후에 장적에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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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15~18세기 은어 산지의 변화(좌상: 국립중앙과학관,  세지 :『世宗實錄』地理志, 신증 :『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 :『輿地圖書』 ,( ) : 편찬이 이루어진 시기)

<그림 5>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은어가 생산되는 고을의 수는 15~16세기에 급격히 그 수가 늘었다. 16~18세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전국적으로 큰 변화는 없지만, 지역적으로 다소 차이가 있었다.

즉, 15세기에 은어가 생산되는 지역은 하삼도 중에서 고려시기 이래로 농업 개발이 가장 진전된 경상도와 전라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흔히 하삼도라 불리는 곳 중에서 전라도와 경상도는 이미 15세기 중엽에 무너미 땅의 상당 부분이 개발되었고, 이곳에서 은어가 채포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다른 도에서는 은어가 본격적으로 잡히지 않았는데, 이는 이 지역 무너미의 땅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데 15세기 말~16세기 초에 조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은어 생산지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도 은어 생산지가 다소 늘었지만, 나머지 6개 도에서 은어 잡이를 하는 고을이 크게 늘었다. 이는 15 중엽~16세기 초에 무너미의 개발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특히 6개도에서 현저한 정도로 천변 무너미의 땅이 농경지로 개발되어 가용공간에 편입된 결과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16~18세기 사이에 함경도에서 은어 채포지가 늘어난 것과 달리 다른 7개도에서는 은어 채포지가 다소 줄었다. 이에는 몇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강 하류에서 성장한 은어가 강줄기를 따라 올라오는데, 곳곳에서 은어를 채포함에 따라 일부 지역에서는 더 이상 은어를 잡을 수 없는 곳이 생겼다. 또한 17~18세기에 화전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18세기 무렵에는 은어가 더 이상 산란을 위해 올라올 수 없는 곳도 생겼을 것이다. 여기에 전국의 토산물이 변화하였고, 이에 조응하여 수취체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누락되기도 하였다.


13. 성주와 예안의 은어(銀魚) 잡이


 

그러하다면 실제로 은어는 어디서 어떻게 잡고 있었을까? 은어잡이의 구체적 모습이 잘 그려진 개인일기를 살피면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실록에 따르면 이미 문종 즉위년(1450) 무렵에 천방이 설치된 전국의 각 고을에서는 은어 잡이가 성행하였다. 그렇지만 대부분 은어 잡이가 새로운 일이었던 탓으로 어로 기술과 도구를 마련하지 못한 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천의 상류에 설치한 천방에 가득찬 은어를 잡기 위해 천방에서 물을 빼거나, 물에 독약을 푸는 등의 가장 조악한 방법으로 은어를 잡으려 했다.

이러한 방법이 농사에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라에서 이러한 방법의 은어 잡이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아마도 일부 선진적인 지역에서 사용하는 어전, 어량 등의 기술이 수령을 통해 각 지방에 확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중엽 이문건의 묵재일기에 따르면 성주목사와 판관은 성주목에서 다소 떨어진 가천에 행차하여 대가천에서 하는 은어 잡이를 감독하였다.

삼한 이래 경상도에서 가장 번성한 고을 중의 하나였던 성주목에서는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도 전국의 대표적인 은어 생산지로 기록되었다. 성산가야의 세력 중심지였던 성주 지역은 일찍이 농업을 발전시킨 곳으로 상대적으로 천변 무너미 땅의 개발도 가장 앞서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따라서 성주목에서 일찍부터 은어 잡이 기술이 발전했고, 성주목사 등은 이곳에서 잡은 은어를 성주목의 주요한 진상품으로 국왕에게 올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주목의 하천에서 잡히는 은어들은 사족들에게 선물로 보내졌고, 일반 백성들도 은어 잡이를 통해 맛난 은어의 맛을 즐길 수 있었다.

17세기 전반 예안 오천(외내, 烏川)에 우거하던 김령이 쓴 계암일록(鷄巖日錄)에는 예안을 통과하는 낙동강과 그 지류에서 어떻게 은어를 잡았고, 어전을 설치하고, 잡은 은어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이해관계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엿볼 수 있다.

안동의 북부에 자리 잡은 예안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서 지역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가 크게 달랐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 지역은 15세기 이전 예안으로 중심촌락이 자리잡은 곳이었지만, 진성 이씨 가(家)가 자리잡은 온혜, 광산 김씨 가(家)가 자리 잡은 오천 등은 15세기 중엽 이래 새롭게 이거해온 사족들이 개발한 신생촌이었다.

예안 지역에 낙향하거나, 인접한 고을에서 이거한 사족들은 우거진 숲 사이로 흐르는 낙동강의 작은 계류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땅을 일구고, 마을을 만들어 자신들의 새로운 집성촌으로 만들었다. 아울러 고려시대 이래로 낙동강을 거슬러 온 은어를 잡아 중앙에 진상하던 안동부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은어를 잡을 수 있었다.

낙동강의 최상류에 해당하는 예안 일원에서 잡힌 은어는 안동에서 잡은 것보다 크기가 더 컸고, 진한 수박향과 함께 최고의 맛을 가진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광해군 6년(1614) 김령은 덕여라는 인물에게 그물로 은어를 잡게 하였는데, 길이가 무려 1자 7치나 되는 것을 잡았다. 이를 옥척(玉尺)을 얻었다고 하며, 그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은어를 구워먹으며 술을 가져와 번갈아가며 잔을 기울였다. 보통의 은어가 20~30cm 가량인 점에 비추어 길이가 2배, 무게는 8배 가량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실로 특별한 은어였고, 기념하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최고 품질의 은어가 잡히는 예안 일원 낙동강과 그 지류에서 잡히는 은어들은 예안 사람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는 원천이었다. 예안에서 잡힌 은어의 일부가 진상 등에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은어는 예안 일원에 살고 있는 사족과 백성들의 먹거리가 되었고, 또한 상당량은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상품이었다.

일찍이 퇴계 이황이 도산 서당에서 공부하는 이들과 마을 어린이들이 낙동강에 들어가 임금께 바칠 은어이니 잡지 말라고 당부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물에 들어가 맨손으로 잡을 수 있었다. 이는 은어가 떼를 지어 이동하고, 예안 일원에서 엄청난 크기로 자라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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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16~17세기 예안현의 은어 잡이 어전이 설치되었던 곳(1. 명암 어전 2. 비암 어전 3. 비암~지사촌 어전)

그렇지만 많은 양의 은어를 잡을 때는 그물을 치거나, 어전·어량을 설치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그물로 잡았다. 그렇지만 더 많은 양을 상업적으로 포획하고자 할 때는 어전·어량을 설치하였고, 그 이익이 막대하였기에 이에 걸린 이해관계는 당사자간 갈등을 일으켰다.

넓고 평탄한 바위인 비암은 많은 사람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했으며, 바로 그 앞에는 예안현에서 관어전(어량)은 설치하였다. 그리고 은어잡이 철이 되면 장정들을 동원하여 진상 등 고을에서 쓸 은어를 잡아들였다.

그 양이 적지 않았기에 일부는 빙고에 저장하고, 일부는 염장하였다. 예안의 은어는 전국적으로 유명했고, 값비싼 것이었기에 은어 중 최고의 은어였다. 그러기에 예안현에서는 공식적인 수요보다 많은 은어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처지이기에 고을 아전들은 어떻게 해서든 관어전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애썼다. 백성들이 그물을 쳐서 은어 잡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은 그러한 까닭이었다.

엄청난 이득을 안기는 은어 잡이에서 하기에 따라 아전들이 누릴 수 있는 이득도 적지 않았다. 이에 수령을 아전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다양한 술책이 마련되어 있었고, 지방의 사족들은 눈을 부라리며 이를 감시하였다. 그리고 수령의 처신을 살피며, 그 수령의 자질을 품평하였다. 김령의 일기에 나타난 여러 수령에 대한 평은 이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수령 역시 사사로이 어전을 설치하여 막대한 이익을 도모하곤 하였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은 이러한 부조리를 감시하려 했지만, 수령들은 온갖 핑계를 들이대서 감시의 눈길로부터 벗어나려 애썼다. 수령과 어전들의 공모로 이루어지는 치밀한 계략은 대부분 성공하였고, 지방 사족으로부터 이에 악평으로 대응하였다. 오천(외내)에 살던 김령은 지방에 거주하는 사족답게 이러한 임무에 충실하였다.

명암(鳴岩)의 어전과 비암(鼻巖)~지사촌에 설치된 어전이 이러한 경우였다. 김령에 따르면 명암의 어전은 “장엄하고 큰 것이 견줄 데가 없었다.” 막대한 이익이 걸린 어전을 수령을 따라온 일족에게 주는 것에 분개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지방의 사족과 일반 백성들은 골짜기에 흐르는 물에 소규모 어전을 설치하여 은어를 채포하였다. 인조 13년(1635) 8월 예안 일원에 큰 가뭄으로 낙동강에는 물이 줄고 따뜻해지면서 은어의 수가 급속히 불어났다. 당시 모습을 김령은 “은어가 삼대[麻]같이 많이 잡혔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낙동강에서 사라진 은어가 깊은 골짜기의 상류로 몰리자, 예안의 몇몇 사족, 서얼, 상인 등 모두가 하나같이 이곳에 어전을 설치하였고, 은어 잡이에 나섰다.

은어를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이해관계, 풍부하고 세밀한 서술 만큼 15세기 중엽 이래 새롭게 성장한 예안현의 신생촌에서 시냇가는 더욱 더 가깝고, 소중한 장소로 변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