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5월, ‘택시운전사’는 어떤 길을 달렸을까?노영기(현대사분과) 역사적 사실을 다룬 영화를 보며 늘 드는 생각은 ‘어떻게 사실을 그리는가?’이다. 거기다 영화에서 다루는 시대(사건)의 전공자에게는 ‘과연, 실제로 그랬냐?’는 질문이 응당 답해야 할 의무처럼 던져진다. 비슷한 질문을 ‘택시운전사’로 옮겨본다.영화는 5․18을 어떻게 그리며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이제 ‘택시운전사’가 운전했던 길을 따라 가보자. [사진1] 영화 '택시운전사' 포스터(네이버 영화) 37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역사’의 한 자리를 맡아도 될 법한데, 5․18은 아직이다. 최근 들어 부쩍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단독’과 ‘특종’을 내세운 언론의 속도전 같은 보도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5․18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5․18을 ‘북한의 사주를 폭동’ 쯤으로 여기는 세력의 끊임없는 도발까지 뒤섞였다. 전두환의 회고록 출간, ‘택시운전사’의 천 만 관객 돌파 등은 사슬처럼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평했듯이, ‘택시운전사’는 지금까지 5․18을 다룬 영화-꽃잎, 박하사탕, 26년, 화려한 휴가-와는 달리 외부인의 눈으로 1980년 5월 광주에 들어간다. 10년 전 개봉했던 ‘스카우트(2007)’와 비슷한 방식이다. ‘스카우트’가 물에 젖듯이 5․18에 다가섰다면, ‘택시운전사’는 뻥 뚫린 도로를 달리듯이 앞으로 나아간다. [사진2]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컷(네이버영화) 택시를 몰며 유행가를 읊조리던 택시운전사 김사복은 37년 전 광주를 다녀간다. 실제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먹고 살기 위한’ 지극히 정직한 이유에서이다. 독일인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 1937~2016)는 기자의 촉으로 광주에 간다. ‘택시운전사’는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길을 보여준다. 눈앞에서 벌어진 믿기 힘든 사건들을 겪으며, 김사복은 점점 광주 시민들의 편에 선다. 힌츠페터야 취재하려고 광주로 갔기에 그럴 수 있다지만, 영화 속 김사복의 변화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무엇이 그를 그토록 변하게 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도저히 믿기 힘든 사건들이 연속극처럼 일어났다. 그때 광주에서는 너무도 평범하게, 영화 속 김사복처럼 끈기 있게 하루하루를 견뎌가던 사람들의 삶이 철저히 부서졌다. 1979년 10․26과 12․12군사반란을 거치며, 신군부는 군대를 동원해 또 다시 권력을 잡으려고 ‘5․17쿠데타’를 일으켰다. 5․18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5월 18일 아침 전남대 학생들이 학교를 점거한 군인들에 대항하다 금남로로 나아갔다. 이날 오후 4시경 금남로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훤한 대낮에 광주 시내 한복판에서 국민들을 때리고 옷 벗기며 어디론가 끌고 갔다. 간혹 총검까지 휘두르고, 결국에는 군이 국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어 집단 발포했다. ‘오월의 노래’ 가사와 같은 일이 일어났기에 광주 시민들과 김사복은 분노했다. 영화 속 힌츠페터처럼 국내외 기자들은 막연함과 두려움을 안고서 광주로 향했다. 모두 ‘광주에서 사고가 터졌다, 계엄군과 학생들이 충돌했다’는 소식만 듣고 광주에 들어갔다. 하지만, 외국 기자들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내보낸 광주의 비극적인 소식이 국내 언론에는 한 줄도 없었다. 간신히 나간 소식은 ‘광주에서 폭동 발생’이었다. 국내 언론은 ‘침묵’과 ‘받아쓰기’를 선택했다. 계엄사령부의 검열 때문이다. [사진3]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의 사직서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2권)”는 사직서를 편집국 칠판에 붙여놓고 신문사를 떠났다. 5․18이 끝난 뒤 신문사로 복귀한 기자들은 6월 2일 복간호에 시인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十字架여!’를 검열에 삭제된 채 실었다. 그나마 ‘받아쓰기’는 하지 않았다 [사진4]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 검열 삭제되기 이전의 지면 영화를 보면 힌츠페터가 광주에서 만나는 기자가 있다. 당시 그는 「전남매일신문」 소속 사진기자로서 광주를 지키며 사진을 남겼다. 국외기자들과 달리 시민과 군 양쪽으로부터 욕먹으면서도 금남로를 떠나지 않았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5월 광주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지금은 5․18민주화운동기록관(구 카톨릭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광주의 소식을 전하지 않거나 때로는 뒤틀어버린 국내 언론, 그 중 방송사에 대해 광주 시민들은 분노했다. 그리하여 5월 20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 사이에 광주 MBC와 KBS를 불태웠다. 마치 ‘땡전뉴스’를 일삼던 KBS의 수신료 납부를 거부하거나 ‘세월호 참사’와 ‘촛불시위’를 뒤튼 ‘공영방송들’에 보인 국민들의 반응과 비슷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진5] 힌츠페터가 송출한 화면을 방송하는 독일방송 이와는 반대로 광주 시민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닥친 비극을 그대로 전하는 외신 기자들을 따뜻하게 맞았다. 5월 22일 외신 기자(ABC, 로이터, 요미우리)들이 광주 시내를 취재할 때 시민들이 “당신들이 보도를 잘 해주어 우리를 대변해 달라”며 박수쳤다(505보안부대, 「광주사태시 상황일지」, 1980. 5. 22). ‘택시운전사’ 속 내용은 사실이었다. 5월 21일 새벽 광주역에서 피투성이로 발견된 두 구의 시신을 손수레에 실고 시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전남도청 앞으로 모여 들었다. 시민들은 정오까지 ‘공수부대는 철수하라’고 요구하면서도 기꺼이 공수부대원들에게 김밥과 음료수를 나눠줬다. 이내 되돌아온 것은 군의 집단발포와 조준사격이었다. 부처님의 자비가 온 세상을 비춘다는 ‘사월초파일’이었다.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었던 시민들은 광주 인근의 지역에서 총을 꺼내와 계엄군에 대항했다. 이날 오후 광주 외곽으로 후퇴한 계엄군은 광주로 통하는 모든 길을 틀어막았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광주 외곽에 장애물을 친 이유는 광주의 소식이, 시민들의 저항이 다른 지역으로 번져가는 것을 막으려는 ‘경계 짓기’였다. 영화에서처럼 광주로 통하는 외곽 지역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택시운전사’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차량 추격 장면은 없었지만, 이런저런 사연으로 광주에 드나들던 차량과 사람들을 향해 계엄군은 가리지 않고 발포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1980년 5월 광주를 누비며 힌츠페터는 많은 것을 보고 아파했다. 종합병원의 뒷마당에서 군의 총탄에 쓰러진 수많은 희생자들의 시신을 필름에 담으면서 분노를 느껴 카메라를 끄기도 했다. 그는 계엄군이 물러가고 ‘절대공동체(최정운,『오월의 사회과학』)’가 된 광주의 시장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계엄군이 물러간 광주가 그러했다. 주먹밥을 나누고 상처와 아픔을 보듬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헌혈량이 많아져서 헌혈을 중지할 정도(적십자병원)”였다. 힌츠페터는 살아있을 때 5․18이 “평화와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싸웠던 작은 도시 ‘광주’의 상징으로서 전 세계인에게 영원히 기억되기를(힌츠페터, ‘카메라에 담은 5․18광주 현장’ 중에서)” 바랬다. 그가 남긴 사진과 영상물은 독일과 미국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가 5․18의 진상을 널리 알렸다. 누구보다도 광주를 사랑한 ‘푸른 눈의 목격자’는 광주에 묻히기를 원했고, 작년에 사망한 그의 유해 일부는 망월묘역에 고이 묻혀 있다. [사진6] 광주 망월묘역에 있는 힌츠페터 (네이버 블로그 : http://blog.naver.com/choiys1989/220721266605) 영화에 나오는 5․18 당시의 장면은 그리 많지 않고, 그나마 사실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택시운전사’는 오늘날 5․18을 어찌 받아들일지 일깨워준다. ‘군이 정치하겠다고 나서면 국민들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공권력의 잘못이 국민들의 생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언론이 침묵하거나 잘못되면 국민들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되묻는다. 영화에는 이 모든 것들이 담겨 있으며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백남기 농민 사망, 세월호 참사의 오보 등등. 1980년 5월에 힌츠페터나 김사복이 말하려 했던, ‘택시운전사’에서 보여주려 한 ‘어제’이자 ‘오늘’이며 또 다른 ‘내일’이다. [사진7] 힌츠페터와 김사복(노컷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