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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가짜뉴스] 조선인들은 안심하고 구호에 전념하라! : 1923년 관동대학살과 조선 BoardLang.text_date 2018.01.24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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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은 안심하고 구호에 전념하라!: 1923년 관동대학살과 조선김강산(근대사분과)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관동(関東)지역에 일대 지진이 발생했다. 진도가 7.9나 되는 강진(强震)이었다. 지진으로 인한 직접적 피해도 심각했지만, 곧이어 발생한 대화재는 인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안겨주었다.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3천 7백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고, 10만 9천여 채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9월 1일을 방재(防災)의 날로 삼고 재해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을 환기시키기고 있다. 하지만 지진 이후 학살당한 약 6천여 명의 조선인에 관한 이야기들은 철저하게 잊혀졌다. 즉 이 사건은 자연재해로서의 지진과 인간에 의한 범죄로서의 학살이라는 두 가지 성격이 중첩된 것이었다. 재해와 학살 중 무엇을 기억해야 할 것인가? 이는 1923년 9월의 식민지 조선에서도 중요한 이슈였다. 식민지 조선 사회에 관동대지진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9월 2일이었다. 이 소식을 최초로 전한 것은 조선 내에서 발간되고 있던 『경성일보』였다. 『경성일보』는 지진이 발생한 다음날인 9월 2일 특집 기사를 꾸며 발 빠르게 지진 피해 상황을 보도하였다. 『매일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도 하루 늦게 지진 소식을 싣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지면에서도 ‘조선인 학살’에 관한 소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인 학살에 관한 기사가 일체 실리지 않았던 것은 일본 내무성이 ‘기사취재 주의’, ‘유언비어 게재 금지’ 등의 검열조치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사진 1] 우측 상단에 「東海道各地の大地震被害」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가 보인다.(『경성일보』 9월 2일자 )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조선 내에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지진 피해지역에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조선인 폭동설’이었다. 이는 대지진과 화재로 인한 혼란 속에서 민중들의 분노를 조선인에게 전가하기 위해 조작, 유포된 유언비어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폭동설’에 대해 사실을 부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9월 4일, 마노 세이이치(馬野精一) 경찰부장은 피해지역의 조선인들은 지진에 대하여 동정의 뜻을 표하고 있다고 밝혔다. 초기에 조선총독부가 소문을 부인하는 입장을 보였던 까닭은 아마도 지진이 아닌 민족 간의 갈등이 이슈가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 폭동설’을 부인하는 조선총독부의 방침은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는 조선인 귀환자였다. 9월 6일에 피해지역에서 귀환한 유학생 한승인(韓昇寅)과 이주성(李周盛)이 대표적 보기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경성에 도착한 직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자신들의 ‘견문담’을 증언했다. ‘견문담’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조선인 학살에 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두 신문사가 이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조선인 학살의 내용을 담은 기사를 실었으나, 압수처분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사진 2] 조선헌병대사령부 기록, 더 이상 ‘조선인 폭동설’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사태를 방관한다면 조선인 학살의 ‘풍문’이 점차 ‘사실’로 판명될 터였다. 마루야마는 조선인 학살 소식이 조선에 퍼지게 된다면 4년 전 3.1운동과 같은 사태가 재현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조선총독부는 입장을 바꾸었다. 조선인 폭동설을 적극 인정하기 시작했다. 정무총감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는 피해지역 내 조선인들이 ‘불온한’ 행동을 벌였기 때문에 일본 민중의 감정이 격화되었으며, 그로인해 조선인들의 피해가 있었다고 호도했다. 조선인들은 당국의 변명을 신뢰하지 않았다. 사건의 주체로서 ‘조선인’이 부상한 현재의 상황은 조선총독부에게 전혀 득이 될 것이 없었다. 여론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사건이 단순한 ‘재난’임을 강조하면서, 현재 관(官)이 주도하고 있는 구호사업에 ‘일치단결’할 것을 주문했다. 말하자면 ‘재난과 구호’의 프레임이었다. 하지만 ‘조선인 폭동설’과 조선인 학살 소식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구호에 관한 논의의 지형도 바뀌었다. 수해 구호와 같은 재난에 대한 구호가 아니라 ‘차별’, ‘박해’를 받고 있는 조선인에 대한 구호가 필요하다는 입장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조선인 사회는 구호문제를 둘러싸고 두 가지 입장으로 구분되었는데, 이러한 갈등의 초점은 구호의 대상으로 집중되었다. 구호에 참여하는 것은 같지만 그 대상을 누구로 할 것인지는 이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9월 8일, 조선인이 중심이 된 두 개의 구호단체가 결성되었다. 지진 피해자들을 민족에 관계없이 구호해야 한다는 ‘동경진재의연금모금조성회(東京震災義捐金募金助成會)’와 조선인에 대한 우선 구호와 안부조사를 내건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東京地方罹災朝鮮人救濟會)’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논리를 각각 ‘대리’한 것은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였다. [그림 3]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의 발기를 알리는 기사(『동아일보』 9월 10일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는 관(官) 주도의 구호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특집 연재가 지속적으로 게재되었다. 안심하고 구호에 전념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공통된 논지였다. 특히 친일적 조선인들이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대표적으로 총독부 사무관 장헌식(張憲植), 기독교 목사 류일선(柳一宣), 경기도 참여관 김윤정(金潤晶) 들 수 있다. 이들은 첫째, ‘인류애’를 앞장세웠다. ‘세계의 대세에 순응하여 정의인도를 이해하는 고등민족인 것을 표명’하자며, ‘민족적 감정을 초월’하여, ‘인류애 정신으로’ 구호에 나서자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둘째, 구미열강과 동양의 대립구도를 강조하였다. 일본 내의 재난은 비단 일본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양 전반의 위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인류애를 내세운 조선인 인사들에 대해 ‘평소부터 민중의 신용과 덕망이 결핍한 잡배(雜輩)’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또 인도(人道)라는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는 가면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했다. 이러한 반응의 배경에는 이 사건의 핵심이 재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 차별과 학살에 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수백만 생령(生靈)이 큰 재변을 당한 때에 소수의 제 동족의 구제만을 생각하는 우리의 심사를 협(狹)하다 말라, 비(鄙)하다 말라. 그네에게는 큰 힘이 있거니와, 우리에게는 힘이 없다. 우리 4~5천의 조난 동포를 구제하는 것도 우리 힘에는 비치는 일이다. 최후에 우리는 저 조난동포의 부모 친족에게 간곡한 위문의 인사를 드리고, 그네의 사랑하는 자녀가 건재한 보도를 일각(一刻)이라도 속히 그네에게 전할 수 있기를 빈다.(「조난동포를 회함」, 『동아일보』, 1923.9.6.) 위 글에서 보듯이 『동아일보』는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만을 위한 구호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나아가 생사를 확인하는 조사활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이러한 『동아일보』의 논조에 대해 조선헌병대사령부는 “당국의 엄계(嚴戒)가 있어도 오히려 노골적으로 조선인의 반발심을 유발하는 필치를 사용한다”고 보고했다. 나아가 경찰당국은 구제회의 주체를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좌경배(左傾輩)’로 보았고, 그 목적으로는 학살의 진상을 조사하고 민심을 선동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구제회를 결성한 것이라고 파악했다. 실제로 조선인 구호와 생사조사를 구제회의 활동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각 지방에서 구제회의 지방조직이 결성되었고, 구호금은 나날이 늘어갔다.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의 대리전은 구호를 둘러싸고 전개되었지만, 실상은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였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각각의 입장에 맞추어 사건에 개입하였다. 그 통로가 된 조성회와 구제회는 공통적으로 ‘구호’를 앞세웠지만, 그들의 활동 방식, 구호에 대한 입장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조성회는 자신들의 활동을 구호금 모집과 그 금액을 경성부에 보내는 ‘간접 구호’ 방식을 채택한 반면, 구제회는 구호금 모집뿐만 아니라 구호인력을 파견하고, 진상을 조사하고자 하는 ‘직접 구호’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 결과 조성회는 발기회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을 보이지 않았으며, 종국에는 조선총독부 중심의 구호활동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 복고적 태도로 일관하다가 별다른 활동 없이 관 주도 사업에 흡수되었다. 반면 구제회는 지속적으로 조선인에 대한 구호만을 선언하고, 조선인 학살문제에 개입하고자 했다. 조선총독부에게 눈엣가시였던 것은 분명하다. 결국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해산’ 명령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