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가짜뉴스] 1419년 조선의 대마도 정벌과 일본의 가짜 뉴스

BoardLang.text_date 2018.05.16 작성자 이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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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년 조선의 대마도 정벌과


일본의 가짜 뉴스


 

이규철(중세2분과)


 

많은 사람들이 몸 담았던 조직은 대부분 소문이 많다. 한 번의 결정에 따라 추진 방향이 크게 변하거나 오래 몸담을 수 없는 조직일수록 소문이 많아지게 된다. 학교나 군대가 대표적이다. 더욱이 소문은 조직의 구성원들이 궁금해 하거나 가고자 하는 방향의 내용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 사람들이 접했을 때, 허무맹랑하다고 판단되는 소문은 위력을 갖기 어렵다. 하지만 사람들이 접했을 때,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소문의 경우 진실 여부를 떠나 무서운 위력을 가지게 된다. 특히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 개연성 있는 소문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쉽다. 이 사례에 해당하는 대표적 상황이 바로 전쟁이다.

 

조선은 1419년 227척의 전선과 17,285명의 병력, 65일 분의 군량을 준비해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조선 건국 후 가장 큰 규모의 군대가 해외로 출병한 사례였다. 동시에 조선이 건국 후 대외정벌을 주요 정책으로 확립했다는 점을 보여준 행동이었다. 1419년의 대마도 정벌은 이후 조선의 대외정벌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392년 이후 일본 측의 다양한 세력들은 조선과 우호적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왜구 문제 등으로 악화되었던 자신들과 고려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새로운 국가의 집권 세력과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고려와 조선은 14세기 말 대마도 지역으로 두 차례 출병했다. 고려와 조선은 군사 활동을 통해 일본 세력을 강하게 압박했다.

 

고려는 공민왕의 재위기만 해도 명과 원이 충돌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탐라 정벌까지 진행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일본 세력들은 고려의 견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고 보다 적극적인 해상 활동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반면 조선은 탐라를 정벌할 필요가 없었고, 국제 정세는 명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비록 조선과 명의 관계가 불안하기는 했지만 조선은 일본 세력에 이전보다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자연스럽게 일본 세력의 실권자들은 왜구 활동을 통제했고, 이를 조선에 알려왔다. 아울러 왜구 활동 등을 통해 자신들에게 있었던 조선인 포로들을 적극적으로 송환했다. 이러한 상황의 반영으로 조선 건국 후 왜구 피해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더욱이 조선은 해안 지역의 경비 체제를 정비하면서 왜구 세력의 활동이 제한되었다.

 

조선과 일본 세력의 관계가 조금씩 개선되는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 조선은 대마․일기 지역에 대한 정벌을 단행했다. 따라서 1419년 조선의 대마도 정벌은 일본 측에서도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대마․일기도 일대 출병 이후 일본 측 태도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의 정벌 의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명의 일본 정벌 여부를 파악하고 싶어 했다. 조선의 정벌 시기에 일본 측에 들어갔던 소문들은 부정확 내용이 많았다. 당시 일본 지역에서 널리 퍼졌던 소문 중에 가장 많았던 내용은 당연히 조선의 공격에 관한 것이었다. 동시에 명과 조선의 합공(合攻)을 내용으로 한 소문들이 많이 유포되었다.

 

이외에도 명의 일본 정벌이 추진되고 있다는 내용과 외국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도 유포되었다. 여기에 더해 일본군이 명군과 교전했다는 소식과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대마도를 공격했다는 소식도 퍼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명군이 2만 5천척 규모의 대군으로 대마도의 세력과 싸우다 태풍에 큰 타격을 입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사실 조선의 대마도 정벌과 관련되어 남아있는 일본 측의 기록들은 거의 대부분 정확한 정보라고 하기 어려운 허황된 소문들이었다. 다만 정확하지 않은 소문이라 할지라도 당시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면 해당 사회의 분위기나 조선의 출병에 대한 일본의 반응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은 대마도 정벌을 시행하는 동안과 회군 직후 주변의 일본 세력들에게 조선군이 더 이상 사태를 확대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큐슈 등의 실력자들 역시 조선으로 사람을 보내 명의 출병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일본 세력들이 알고 싶어 했던 정보가 조선의 확전 의사보다는 명의 정벌 여부였음을 보여주는 움직이라 하겠다.

 

조선의 출병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15세기까지 여원 연합군의 공격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일본이 대마도 일대를 실제로 공격했던 조선보다 명의 출병 여부를 더 파악하고 싶어 했다는 점은 조명 연합군에 대한 우려가 가장 컸다는 점을 보여준다. 유포된 소문 중에 명의 대군이 태풍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 역시 여원 연합군의 경험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한다. 조명 연합군의 모델은 당연히 여원 연합군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게 여원 연합군의 트라우마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대마도 출병은 일본 측에 수많은 가짜 뉴스가 생성되고 유포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 보다 일정한 사실이 포함된 거짓말이 훨씬 더 위력이 큰 것처럼 조선의 출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가짜 뉴스는 조선-명-일본의 상황을 반영해 생성되고 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