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당”이 보여주고 싶은 것과 보고 싶은 것(영화 '명당')

BoardLang.text_date 2018.10.04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영화 “명당”이 보여주고 싶은 것과 보고 싶은 것


(영화 '명당')


 

김충현(중세2분과)


 


  1. 들어가며


    추석을 앞두고 극장에는 신작이 걸린다. 놀거리가 예전보다 많아졌지만 그래도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여럿 개봉했다. 그 중 영화 “명당”이 있다.

    명당(明堂)은 풍수지리설에서 이상적인 공간을 일컫는 말이다.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좋은 땅은 산 사람을 위한 공간과 죽은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나누게 된다. 산 사람을 위한 공간을 가려 뽑는 것을 양택(陽宅), 죽은 사람을 위해 가려 뽑는 것을 음택(陰宅)이라 한다. 신라 말기 풍수설에 정통한 승려였던 도선(道詵, 827~898)대사가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인 왕융이 집을 지을 때 집자리에 대한 조언을 해준 이야기, 조선 건국 후 무학(無學, 1327~1405)대사가 새 도읍을 선정하는 내용인 ‘왕십리 전설’ 등은 대표적으로 양택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음택과 관련한 이야기가 더욱 세인들의 관심을 모은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후보 아버지나 조상의 묘를 명당으로 옮겨 그 효험을 봤다거나, 전임 대통령을 장사지낼 땅을 파니 “봉황의 알”이 나왔다는 내용이 신문 지면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아직도 우리 문화 안에서 명당에 투영되는 욕망과 관심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학자의 나라였던 조선에서도 명당을 차지하기 위한 노력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지위가 높을수록 명당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조선의 최고 권력자였던 국왕의 무덤인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풍수지리설에 능통한 사람을 보내 땅을 고르게 했다. 이를 위해 관상감에 소속된 관원인 상지관(相地官)도 동원되었지만, 이름난 술사가 있으면 불러들여 임시로 관직을 주어 좋은 땅을 고르는 일에 동참시켰다. 심지어 사대부들 중에서도 풍수에 능통한 사람이 있으면 동원되었는데, 효종 영릉(孝宗 寧陵)의 초장지를 선정하는데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가 참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좋은 땅을 골라 선조를 편안히 모시고 묘역을 꾸미는 것은 외부인들에게 집안의 위세와 더불어 효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방편이었다. 거기에 후손에 대한 발복을 기원하는 마음이 더해지게 된다. 즉 선조가 편안하면 그 좋은 기운이 후손에게 미쳐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생각, 혹은 믿음이 덧붙여졌던 것이다. 흥선군(興宣君)이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무덤을 지금의 위치에 모신 것 역시 이러한 생각과 닿아있었다.

  2.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타나는 남연군(南延君) 묘 이야기


     

    황현(黃玹)의 『매천야록』에는 남연군 묘의 터를 잡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몇몇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지사(地師)가 충청 덕산(德山)의 대덕사(大德寺)를 길지로 흥선군에게 알렸고 흥선군은 재산을 처분한 뒤 그 절반을 주지에게 뇌물로 써 절을 태워버렸다. 불타 없어진 절터에 남연군의 아들들이 상여를 모시고 와 쉬는데 흰 옷을 입은 노인이 탑신이라 주장하며 꿈에 나왔다. 탑신은 남연군 아들들에게 탑이 있는 자리에 묘를 쓰면 폭사할 것이라 경고했다. 같은 꿈을 꾼 아들들은 탑을 무너뜨리고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조성하는데 주저했다. 이에 흥선군은 장동김씨 아래에서 구차하게 사느니 죽더라도 통쾌하게 살아보려 한다며 탑을 허물어뜨리고 바위로 뒤덮인 땅을 도끼로 찍어 열어 남연군의 묘를 꾸몄다. 흥선군은 이후 외부의 침입이 있을까 염려하여 쇠를 수 만근 녹여 봉하기까지 했다.

    남연군 묘의 조성이 끝난 뒤 절에 있던 승려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오던 중 수원의 대포나루를 건널 때 승려 하나가 배에서 갑자기 불이 붙는 시늉을 하며 물어 뛰어들어 죽었다. 이후 14년 뒤 고종이 태어났다.

    위 내용에서 가야사(伽倻寺)는 대덕사로 바뀌고 몇몇 시점이 잘못 기록되어있으나 절터에 남연군의 묘를 조성하였고 그 덕택으로 태어난 아들이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라는 내용은 남연군 묘와 관련한 다른 설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명당”의 큰 줄거리는 이 이야기에 근거하고 있다. 지금도 남연군의 묘는 황제를 배출한 천하 제일 명당으로 알려져 풍수를 공부하는 이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사진1] 남연군 묘역 전경(필자 소장)

     

  3. 영화에서 섭섭했던 몇 장면


    사극의 가장 큰 스포일러는 역사이다. 이를 극복하고 재미를 위해 이미 정해진 내용에 극적인 부분을 첨가해야 한다. 따라서 역사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나 드라마는 “왜곡”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 “명당” 역시 곳곳에서 기존에 제기되었던 문제가 노출되었다. 그 중 몇몇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에서는 무덤의 지하구조를 매우 견고하게 만들었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피장자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조선초기 이후 왕릉을 비롯하여 무덤의 지하구조를 전통적인 석실(石室)에서 벗어나 석회·모래·황토를 섞어 회격(灰隔)으로 조성하였고 시신을 안치했다. 회격 밖에 방충과 방습을 위해 다량의 숯을 함께 묻었다. 이러한 방식은 시신과 외부의 공기접촉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고 종종 조선시대 분묘의 이장에서 미라가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회격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강도가 높아진다. 따라서 오래된 무덤일수록 지하구조를 해체하기 어렵다. 영화에서 지관 박재상은 헌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효명세자를 모신 곳이 흉지이니 파보자고 한다. 그 길로 헌종은 몇몇 군사를 이끌고 밤중에 수릉(綏陵)을 파내려가 시신의 상태를 확인한다. 단 몇몇 군사로.

    2006년 명종(明宗)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모신 순창원(順昌園)의 도굴 미수사건이 있었다. 지표에서 3미터 가까이 파 내려갔으나 회격에 막혀 도굴에 실패한 것이다. 지금도 조선시대 회격묘를 이장할 때는 중장비가 동원된다. 몇몇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내부를 확인 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남연군의 시신을 인질삼아 통상 협상을 해보려 했던 오페르트 역시 시신 탈취에 실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2] 순창원 도굴 미수 현장(문화재청 보도자료)


    또한 왕릉은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각 왕릉은 방화선의 일종인 화소(火巢)가 있었는데, 대개 왕릉의 영역과 일치했다. 왕릉은 화소 밖으로부터의 침입을 철저히 금지했다. 화소 안에서 방목을 하거나 나무를 벌채하는 행위, 투장(偸葬)하는 행위 등이 금지되었고 적발될 경우 무겁게 처벌하였다. 예를 들어 나무를 벌채한 것이 적발될 경우 태형(笞刑)을 받거나 심하면 유형(流刑)에 처해지기도 했다.

    영화에서 장동김씨의 기운이 흥성하게 된 까닭을 왕릉의 정혈(正穴)에 투장했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왕릉의 정혈에 투장을 했다는 것은 영화적 상상력에 기인한 것일 뿐 실재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왕릉을 조성할 때는 수많은 인원이 투입되었고 조영이 끝난 뒤에도 능관을 비롯해 수릉군이 배속되어 지속적인 관리를 했다. 더군다나 투장이나 벌목을 제때 적간하지 못한 경우 그 처벌은 능관과 수릉군에게도 가해졌다.

    이 밖에도 김좌근이 국왕인 헌종에게 하대를 하거나 상석에 앉는 등의 장면, 효명세자와 헌종이 연이어 독살 당하는 장면은 영화적 장치를 넘어서는 것이다.

  4. 나가며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영상 매체와 역사는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상 매체는 전공자들 사이에서 논문의 형식으로 유통되는 내용을 비전공자들이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다만 지금까지 역사를 배경으로한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 정통 사극을 표방한 경우가 아니라면 작가의 상상력이 지나치게 개입하는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에는 퓨전 사극이라는 이름으로 그 경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마르텡 게르의 귀향과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다. 연구자인 데이비스는 영화 제작에도 참여하여 연구를 영상으로 구현하는데 성공했다. 책과 영화를 통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한 것을 충분히 표현해 낸 것이다. 우리도 전공자와 영상물 제작가 간에 좀 더 긴밀한 협업이 이루어진다면 학계에서 이룩한 성과를 일반 대중에게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는 영화로, 드라마는 드라마로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영상 매체가 가지는 파급력을 생각한다면, <영원한 제국> 이후 정조의 독살설이 대중에게 널리 퍼졌던 것을 상기한다면 방법을 고민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