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기획된 유토피아(드라마 '왕이 된 남자') 이명제(중세 2분과) 드라마 '왕이 된 남자'의 포스터 (출처: tvN 공식 홈페이지)
들어가며 영화 “광해(2012년)”에서 막판부에 허균은 가짜 광해에게 제안을 한다.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 진정 그것이 그대가 꿈꾸는 왕이라면 그 꿈 내가 이뤄드리리다.” 하지만 가짜 광해는 “나 살자고 누군가 죽여야 하고, 그로 인해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난 싫소.”라며 거절한다. 이 장면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상상을 한다. 그 때 가짜 광해가 허균의 제안을 받아들여 백성의 편에 선 정치를 펼쳤다면 과연 어떠한 세상이 펼쳐졌을까? 드라마 “왕이 된 남자”는 상상을 현실로 이끌어낸다.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허균이고, 주요 내용은 유토피아를 향한 그의 도전이다. 허균은 약물에 취해버린 진짜 광해를 독살하고, 광대 하선을 대역으로 삼아 자신의 이상을 펼쳐나간다. 허균이 꿈꾸었던 세상은 모든 사람이 신분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 사회였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신분은 그가 부수어야 하는 대상이었고, 그 꼭대기에 위치한 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발칙한 상상에는 크게 세 가지의 역사적 재료가 혼합되어 있다. 정여립의 대동계와 허균의 홍길동전, 그리고 대동법이 바로 그것이다. 본 글에서는 이 세 가지 요소들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간략한 평가를 남겨보도록 하겠다. 1. 대동계가 남겨놓은 씨앗 극중에서 허균의 스승은 길삼봉으로 묘사된다. 길삼봉은 본래 노비 출신이지만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지고 정여립의 대동계에 참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대동계는 정여립이 중앙 정계에서 낙향한 이후 전라도 지역에서 조직한 모임이다. 대동(大同)이라는 명칭은 <예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남녀노소나 귀천에 상관없이 함께 누리는 세상을 가리킨다. 실제로 정여립은 문관임에도 불구하고 이웃 마을의 여러 무사들과 공·사 노비와 함께 대동계를 조직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대동계는 모반을 위한 군대 조직으로 의심을 사게 되었고, 정여립은 역모의 주동자로 몰려 자결하고 만다. 정여립 사건으로 많은 인물들이 공초를 받고 길삼봉으로 의심받는다. 하지만 길삼봉은 끝까지 붙잡히지 않았다. 즉 역사에서 길삼봉은 대동계의 남겨진 씨앗이 되었다. 드라마는 길삼봉을 제거하였다. 길삼봉이 사라지면서 아래에서부터의 혁명의 길은 사라지게 되었고, 살아남은 대동계의 인물들은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허균은 정치권력을 통해 이상사회 건설을 꿈꾸게 되었고,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로 적합한 임금을 선택한다. 정여립이 주장하였던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何事非君]”를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대동계의 이상이 허균이라는 인물을 통해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허균으로 추정되는 가상의 인물 길삼봉의 제자 이규 (출처: tvN 공식 홈페이지)
2. <홍길동전>과 입현무방(立賢無方)의 실현 양반 홍문과 비첩 사이에서 태어난 홍길동은 서얼 출신이기 때문에 호부호형을 할 수 없으며, 벼슬길에도 오르지 못한다. 낙심한 홍길동은 도적이 되어 못된 벼슬아치의 재물을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활빈당의 무리가 된다. 계속되는 국가의 회유와 협박에 홍길동은 바다 건너 율도국으로 건너가 국왕이 되어 이상사회를 건설한다. 이상의 이야기는 허균이 지었다고 알려진 <홍길동전>의 주요 내용이다. 드라마는 <홍길동전>을 넘어 조선을 율도국으로 재현하고자 하였다. 대동계의 일원이었던 주호걸(이규한 분)은 예조판서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노비였기 때문에 관노의 신분에 머물렀다. 허균은 광대 출신 임금을 내세워 서얼 출신 주호걸을 호조정랑으로 전격 발탁하고 과거제 응시 자격을 철폐시킨다. <맹자>에서 내세운 인재등용의 원칙, “입현무방(立賢無方 : 인재를 등용하되 그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의 이상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극중 광대패. 후에 왕이 되는 하선이 보인다. (출처: tvN 공식 홈페이지)
3. 마침내 대동의 세계로 잘 알려져 있듯이 대동법은 기존의 공물제도를 폐지하고 실시한 재정제도이다. 1608년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어 1708년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시행 과정에서 폐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잡다한 공물 대신 토지를 중심으로 세금이 부과되면서 보다 공평한 조세체계로 이행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드라마에서 대동법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되지 않는다. 대신 기존에 알고 있던 대동법보다 확장된 상징을 부여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광대 출신의 임금과 이상향을 꿈꾸는 도승지, 그리고 서얼출신의 실무자가 한양 저자거리에서 직접 백성들의 의견을 듣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백미이다(12화). 대동법은 땅을 가진 자들에게 세를 걷는 “제도”에 불과하지만 백성들의 삶을 치유하고 대동 세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대동계가 남겨놓은 씨앗이 대동법으로 발아하게 된 것이다. 나가며 - 아쉬움을 남겨두며 영화 “광해”와 드라마 “왕이 된 남자”는 한 가지 공통적인 설정 위에서 시작한다. 광해의 부정적인 면모는 진짜 광해군에게 전가시키고, 광해의 긍정적인 면모는 가짜 광해군에게 몰아준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서 대중들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광해군에 대한 양면적 평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할 것은 실제 역사에서 광해는 한 명의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광해에 대한 어떠한 평가라도 그것은 광해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궤적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역사상의 인물을 둘로 나누어 양 극단의 평가를 각기 한쪽에 부여하였다. 그 과정에서 실존 인물 광해의 삶은 관심의 영역에서 벗어나고, 부정적 광해와 긍정적 광해의 대립만이 남을 뿐이다. 주인공 이헌과 유소운 (출처: tvN 공식 홈페이지)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주인공, 허균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왕이 된 남자는 조선시대에 기획되었던 이상사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허균의 비중을 보다 강화하였다. 하지만 허균은 문학적 능력만큼 정치적인 자질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홍길동전>을 통해 서얼의 이야기를 그려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서얼 출신 서양갑과 심우영 대신 이이첨을 선택해 화를 면하기도 하였다. 대동계에서 홍길동전, 그리고 대동법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재료들을 통해 조선시대에 기획된 유토피아를 구현해낸 상상력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그 상상력이 역사적 진실을 가리지 않을까 조금은 걱정스런 우려를 남겨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