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념총서] 3·1운동과 비식민지화(decolonization)

BoardLang.text_date 2018.05.31 작성자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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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 총서를 발간할 예정입니다. 총서는 그간의 연구성과들을 총망라하면서, 3.1운동에 대한 새로운 역사상과 의미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에 총서로 기획된 글 중에서 일부를 소개합니다. 3.1운동 100주년 및 기념총서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념총서


3·1운동과 비식민지화(decolonization)


 

홍종욱(근대사분과)


 

1차 세계대전과 비식민지화


 

제1차 세계대전은 노동자, 농민은 물론 식민지 인민까지를 동원한 총력전이었다. 전쟁으로 각성된 민족의식은 민족운동의 분출로 이어졌다. 아울러 효율적인 지배와 수탈을 위해 여러 식민지에서 개발 정책이 실시되었다. 산업의 발달과 교육의 보급은 다시 민족의식의 자각으로 이어져, 식민지제국의 변용 즉 비식민지화(decolonization)의 조류를 가속화시켰다. 영국의 식민지인 아일랜드는 1919년 이후 계속된 독립전쟁의 결과 1922년 영국의 자치령인 아일랜드자유국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100만 명 이상이 영국군으로 징병된 인도에서는 간디, 네루가 지도하는 국민회의파가 중심이 되어 ‘스와라지’(자치)를 얻기 위한 투쟁이 이어졌다.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은 1916년에 자치를 인정받았고, 1934년에는 10년 후 독립을 약속 받았다.

 

3·1운동 역시 한국병합 및 식민통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였다.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일어난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조선의 지식인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가 전해지면서 19세기적 식민지 통치의 종언과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에 대한 기대 속에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를 준비하는 등의 움직임이 일었다. 때마침 1919년 1월 고종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기대와 맞물리면서 조선 사회를 혁명적 분위기로 몰아갔다. 3월 1일을 시작으로 수개월에 걸쳐 전국적으로 벌어진 3·1운동은 그 규모와 성격에 있어서 한국 근현대사를 그 이전과 이후의 둘로 나눌 대사건이었다.

 

19세기적인 식민통치가 부정된다고 할 때 ‘민족자결’의 기운이 향할 양 극단은 독립과 동화였다. 동화를 자결의 방향에 포함시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피식민자 스스로 제국 본국과의 통합을 결정하는 것은 논리상은 물론 현실적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훨씬 뒤의 일이지만 1960년 유엔은 총회결의 1514(ⅩⅤ)호 ‘식민 국가와 인민에 독립을 부여하는 선언’에 뒤이은 총회결의 1541(ⅩⅤ)호에서, 비식민지화(decolonization)의 선택지로서 ‘독립국가와의 자유로운 연합’, ‘독립국가로의 통합’, 그리고 ‘독립’의 세 가지를 들었다. 독립과 동화는 영제국의 예를 들자면 각각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걸은 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독립과 동화의 사이에는 자치가 존재했다. 19세기적 식민통치를 넘어서고자 하는 비식민지화의 도정에는 독립, 동화, 그리고 자치라는 세 가지 방향성이 존재한 셈이다.

 

 

독립, 동화, 자치


 

먼저 독립의 방향성을 살펴보자. 무엇보다 3·1운동 자체가 거대한 독립운동이었다. 자결(自決) 즉 조선 사람들이 스스로의 결정을 모아내고 드러낼 통로를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수개월에 걸쳐 전국적으로 벌어진 독립 만세 시위 이상의 의사 표현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총독부 권력은 무너지지 않았고 독립의 열망은 망명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드러났다. 식민지 조선의 담론 공간에서 공공연하게 독립을 내거는 것은 물론 불가능했지만, 독립 지향은 동화정책과 자치운동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라는 형태로 명백히 존재감을 과시했다.

 

다음은 동화이다. 1918년 최초의 정당내각인 하라 다카시(原敬) 내각이 성립되면서 일본 정부 내에서도 식민통치 방식의 변화가 검토되었는데, 3·1운동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구체적인 정책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 방향성은 3·1운동 직후 나온 천황의 칙어에서 사용된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그 때까지의 식민지 특수주의를 비판하고 내지연장주의를 펴는 데 있었다. 특히 조선에서는 한국병합 이래의 ‘무단정치’를 비판하고 ‘문화정치’가 펼쳐졌다. 문화정치의 기만성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총독부의 통치 방식에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자치는 총독부의 자치공작의 형태로 등장했다. 총독부 관리와 그 주변 인물에 의해 몇 차례 사안(私案)이 작성되어 검토되었고, 일부 조선인에 대한 회유와 포섭도 시도되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도 이러한 과정과 밀접히 관련된 것이었다. 자치론을 품은 조선인들은 1926년 자치운동 단체인 연정회(硏政會) 결성을 시도했지만 심한 비판에 부딪혀 좌절된다. 다만 문화정치는 무단정치에 대한 반성이라는 점에서, 조선의 전통과 문화를 배려하는 조치도 포함되었다. 자치는 독립이나 동화와 달리 식민통치의 연착륙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며, 때문에 묘한 흡인력을 가지고 형태를 바꾸어 가며 등장하게 된다.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을 지배한 것은 개발, 즉 교육 보급과 산업 발전에 대한 열망이었다. 식민지는 농촌/농업, 제국 본국은 도시/공업이라는 도식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식민지제국의 재편성이 운위되었다. 한편 개발과 자본 침투의 결과 구래의 사회관계가 변형되면서 식민지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계속되는 동원과 이산은 식민지 민중을 정치적 주체로 각성시켰고, 이는 민족운동, 사회운동의 고양을 낳았다. ‘식민지 근대’라는 개념은 개발은 물론 그에 대한 저항까지를 포함하여 더욱 풍부해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