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과거제도 속으로] 시험 전날

BoardLang.text_date 2014.06.17 작성자 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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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전날


박현순(중세2분과)

과거 응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평생에 걸친 사업이었다. 다행히 일찍이 문과에 급제한다면 수험생활도 일찍 끝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수십 년에 걸친 수험생활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수험 준비에 몰두하며 지낸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시험 준비에 보다 집중하였으나 어느 정도 실력과 경험이 쌓이면 틈틈이 대비를 하다가 시험 일정이 발표된 후에야 본격적으로 시험 준비에 돌입하였다. 따라서 실질적인 시험 준비는 시험 일정의 발표된 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에서는 유생들이 일정에 맞추어 준비하고 응시할 수 있도록 일찌감치 시험 날짜를 발표하였다. 3년마다 시행하는 식년시는 시험이 있는 해의 정월에 시험 일정을 발표하였다. 초시는 식년 전해 가을에, 회시와 전시는 식년 봄에 치렀는데, 정월에 일정이 발표되면 초시가 있는 가을까지 반년 정도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초시에 합격하면 이듬해 봄까지 또 반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시험 날짜는 관상감에서 길일을 가려 택일하였고, 국왕의 재가를 거쳐 시험을 주관하는 예조에서 각도 관찰사에게 시험 일정을 알리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관찰사는 이를 각 군현으로 통보하였고, 각 군현에서는 다시 향교, 서원, 경내의 면으로 시험 일정을 통지하였다. 초시 합격자가 응시하는 회시의 경우 본인에게 응시 일정을 통보하였다. 특별 시험은 그때그때 사유가 발생할 때 치르는 부정기적인 시험으로, 시험 시행이 결정되면 곧 식년시와 같은 방식으로 전국으로 통보되었다. 시험일정의 공지와 유생들의 상경, 행정적인 준비 등에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시험일정은 늦어도 두어 달 전에 공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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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경인년 12월 3일 경주부윤이 식년시 시행 일정을 알리며 용산서원에 보낸 첩문(경주 용산서원 고문서) 뒤에 진사시, 생원시, 문과ㆍ무과, 잡과의 일정이 기재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디지털아카이브 제공

   시험 일정이 발표되면 유생들은 시험 장소까지의 거리와 그 곳에서의 준비 등을 고려하여 여행 일정을 잡았다. 지방에서 시행하는 향시는 도별로 한 두 개 씩 과장(科場)을 설치하였는데, 시험 때마다 시소가 설치되는 지역은 달랐다. 응시자들은 자신의 거주지에 배정된 시소에서 응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시험장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답안을 작성할 시지(試紙)이다. 시지는 명지(名紙), 명저(名楮)라고도 불렀는데 응시자가 직접 준비하였다. 국왕이 친림하는 알성시나 정시의 경우 임진왜란 전에는 호조에서 시지를 지급하였으나 그 뒤로는 역시 응시자들이 직접 준비하였다.


   시지는 시험 종류에 따라 크게 두 종류가 있었는데, 식년시ㆍ증광시ㆍ별시는 우리가 흔히 보는 가로로 여러 장을 이어 붙인 시지를 사용하였다. 반면 알성시ㆍ정시ㆍ춘당대시는 한 장으로 된 세로로 긴 형태의 답안을 사용하였다. 알성시나 정시는 본래 국왕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보이던 시험에서 연원하여 다른 과거와는 시지의 형태가 달랐다.


   시지는 통용하는 재질과 규격이 정해져 있었다. 응시자들이 가급적 양질의 종이를 사용하고자 하여 시지의 재질이 지나치게 고급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어길 경우 응시를 불허하거나 합격을 취소하였다.


   식년시ㆍ증광시ㆍ별시 시지는 도련지(搗鍊紙)를 사용하였다. 도련지는 다듬이질을 하여 표면을 매끄럽게 만든 종이로 특별히 붓이 잘 미끄러지도록 만든 고급 종이다. 명종 6년(1548)의 규정에 따르면 세로의 길이는 포백척 1척 8촌, 약 83cm였고, 가로는 진사시는 3장, 생원시는 4장을 이어 쓰도록 되어 있었다. 시험에 따라 장수가 다른 것은 답안 내용의 길이에 따라 시지의 폭을 달리하였기 때문이다.


   숙종 43년(1717)에 새로 마련한 생원ㆍ진사시 시지 규정에는 세로는 포백척 1척 4촌, 가로는 장당 2척 2촌 5분으로 2장을 이어 4척 5촌이 되도록 하였다. 문과의 경우 시지의 재질과 규격에 대한 규정이 따로 없었다. 문과는 역서(易書)라고 하여 다른 종이에 답안을 옮겨 써서 채점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고급 종이를 사용하는 경향이 없었기 때문에 별도의 규정을 마련하지 않은 것이다. 알성시ㆍ정시 등 친림시 시지는 정초지(正草紙)라고 하였는데, 도련지보다는 지질이 떨어지는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하였다. 숙종 43년에 세로 2척 6촌 5분, 가로 1척 9촌으로 규격을 정한 바 있다.


   향시에 응시하는 경우 시험장 근처에서 시지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출발 전에 미리 규격에 맞게 시지를 장만하고 다듬이질까지 마쳐야 제대로 된 답안지를 갖출 수 있었다. 서울에서 응시하는 경우 시전에서 구입할 수도 있었는데, 숙종 43년 당시 시지의 가격은 생원ㆍ진사시 시지가 1냥, 친림시 시지는 5전으로 크게 차이가 났다. 지질과 규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험 때는 전국에서 응시자들이 모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시지의 수요가 폭발하여 종이 값이 폭등하거나 그나마도 구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영조대 이후에는 응시자가 많은 정시 등에는 초주지 대신 대호지(大好紙)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시험 전에 제대로 된 시지를 준비하는 것은 응시자들이 첫 번째로 유념해야 하는 일이었다.


[사진 2]  숙종 18년 이수담(李壽聃)의 진사시 시권(여주이씨 독락당 문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디지털아카이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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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정조 11년 김유기(金裕己)의 정시 시권(안동김씨 삼당 후손가 문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디지털아카이브 제공

   일단 시지를 마련하면 시지의 한쪽에 인적 사항을 기록하였다. 가로형 시지를 쓰는 식년시ㆍ증광시ㆍ별시 시지에는 오른쪽 끝을 서너 번 접어 세로선을 만든 후 칸에 맞추어 응시자의 인적 사항을 적었다. 오른쪽 끝에서부터 첫 칸에는 본인의 직역과 성명, 나이, 본관, 거주지를 적고 이어서 칸을 바꿔가며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록하였다.


   세로형 시권을 쓰는 정시ㆍ알성시ㆍ춘당대시 시지는 가로로 여섯 번을 접어 전체를 7칸으로 나누고 오른쪽 하단의 구석에 인적 사항을 기재하였는데, 가로형 시지와 달리 사조 대신 부친의 인적 사항만 기재하였다.


   인적 사항을 기재한 부분은 ‘피봉(皮封)’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풀로 봉하여 누구의 답안인지 알아 볼 수 없도록 하였다. 피봉의 작성 방식은 격식이 정해져 있어서 써야 할 사항을 누락시키거나 격식 외의 사항을 쓴 경우 위격(違格)이라고 하여 합격이 취소되었다. 또 피봉을 봉할 때는 안쪽의 글씨가 보이지 않도록 좁게 접는 것이 정식이었다. 지나치게 넓은 경우 역시 합격이 취소되었다. 만일에 있을지도 모를 부정행위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였다.


   효종 2년 김익진(金益振)은 정시 문과에 응시하여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4명을 뽑은 시험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하지만 답안지의 피봉을 넓게 접었다는 이유로 급제가 취소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꿈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시지를 작성할 때 격식을 어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김익진은 다행스럽게도 얼마 후에 시행된 별시에서 급제할 수 있었지만 그 때까지는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시험날짜가 다가오면 응시자들은 각자의 시지를 들고 삼삼오오 시험장으로 향했다. 긴장과 기대 속에 집을 나서 시험을 보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시험 장소가 서울인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같은 도내라도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경우라면 4~5일씩 소요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필요한 행정적인 절차를 밟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17세기 전반 경상도 예안에 살았던 김영(金坽)이 향시에 응시한 사례를 보면 대개 사흘 전에 과장이 설치된 고을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이틀 전에 응시자로 등록하는 녹명(錄名)의 절차를 밟았다.


   숙소를 구하고 녹명을 하는 절차는 그 자체로서는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면 숙소는 동이 나기 마련이고 녹명을 할 때도 부지하세월로 기다려야 했다. 김영은 이를 피하기 위하여 비교적 일찍 과장으로 향했고, 때로는 조카들을 먼저 보내 숙소를 미리 잡아 두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시험장 근처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하여 한밤중에 먼 길을 걸어 시험장으로 향해야만 했다. 긴장 속에서 걸어가는 밤길은 더 멀게 느껴졌다.


   녹명은 응시자로 등록하는 절차였다. 응시자가 미리 준비한 시지와 사조(四祖)의 신원을 기록한 녹명단자를 함께 제출하면 녹명을 담당한 관원은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녹명책에 이름을 올린 후 시지의 봉함부분에 확인 도장을 찍어 주었다. 이 시지를 들고 시험장에 들어가야 했다. 녹명책은 응시자의 명부로 여기에 이름을 올려야만 정식 응시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녹명은 과거에 응시하는 자라면 누구나 꼭 거쳐야하는 과정이었다.


   조정에서는 시험 전의 혼잡을 피하기 위하여 한 달 전부터 녹명을 독려하였다. 하지만 지방 유생들은 시험 일정에 맞추어 상경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오다가 큰 비라도 만나면 강물이 불어 길이 지체되는 일도 허다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날에 걸친 고된 여행에도 불구하고 시험 일정에 늦는 경우들이 종종 발생하였다. 조정에서는 딱한 처지를 생각하여 시험 시작 후에도 녹명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이를 금하였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이런 온정도 사라져 갔다.


   시험 전에 준비해야 하는 일은 그 외에도 많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사수(寫手)라고 하여 전문적으로 글씨를 대신 써 주는 사람을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시험장에 들어가서 사용할 자리와 일산도 미리 준비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함께 시험을 치르는 동료인 동접(同接)도 정해 두어야 했다.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혹시 시험을 보는 데 유용할지도 모를 정보를 알아두는 것도 빠뜨릴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 시험장에 모인 사람들은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런 저런 일로 바쁘게 움직였다. 시험을 앞둔 시험장 근처에는 바삐 오가는 유생들 사이로는 긴장감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