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역동,화려의 고려사]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

BoardLang.text_date 2007.05.04 작성자 한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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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


한정수(중세사 1분과)


  918년 6월 을묘일 밤, 왕건의 사저

  낮에는 매미 울음소리가 천지에 가득했다. 해가 기울고 밤이 되자 한여름의 열기는 점차 식어갔지만 모기들은 극성을 부렸다. 그 속에서도 귀뚜라미 소리와 간혹 소쩍새 울음소리는 가을을 재촉하였다. 태봉국의 서울 철원의 밤은 오늘따라 더 일찍 찾아오고 있었다.

  인적은 드물어지고 밤이 이슥해지고 있었다. 기골이 장대한 몇 명의 무장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주위를 살피면서 혹 미행이 없나 조심조심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장군 홍술ㆍ백옥ㆍ삼능산ㆍ복사귀 등 무장들이었다. 이들은 훗날 홍유(洪儒)ㆍ배현경(裴玄慶)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으로 불리우게 된다. 왕건의 집을 몰래 찾아 거사를 도모하려는 행보였다.

  912년 36세의 나이로 태봉국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올라 있던 왕건이었으나 그 이후 계속 불안하기만 했다. 선종(善宗) 즉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하였다.

  부인 강씨와 두 아들까지도 죽인 이후 궁예의 포악함은 정도를 더해갔다. 왕건 역시 당시 궁예의 부름을 받고 궁에 들어갔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 궁예는 궁궐로 들어오는 왕건을 보며 느닷없이 “어젯밤 사람들을 모아놓고 반역을 모의하니 무엇 때문인가?”라고 말하였다.

  왕건은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선(死線) 위에 놓여진 것임을 알았다. 이때 장주(掌奏) 최응(崔凝)의 도움이 없었다면 덧없이 죽었을지 몰랐다. 그 이래 왕건은 철원에 있기보다 나주 등 외방을 자원하여 나갔다. 궁예의 감시를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잠시 철원 궁밖에 있는 사저에 들어와 쉬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불편하고 불안했던 것이다.

  조야에서는 그러한 왕건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궁예를 제어할 수 있는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왕건 역시도 외방과 궁궐을 오가면서 그냥 세월만 보냈던 것은 아니었다. 전장을 누비면서는 휘하 장졸들의 마음을 끌어안았고, 철원으로 들어와서는 어진 시중의 모습을 보였다. 말하자면 자연스레 민심과 가까이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얻어갔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자신이 직접 어떤 움직임을 주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위는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무장들이 왕건을 찾은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들은 태조에게 간청을 하였다. 신명을 다하여 왕건을 모시겠노라 하며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것이었다. 『고려사』 태조 총서에서는 이러한 무장들의 청에 대하여 태조가 허락지 않았다가 부인 유씨의 간청에 따라 갑옷을 입고 나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비 열전 중 태조 후비인 신혜왕후 유씨 전의 기록을 보면 왕건이 부인 유씨에게 뜰에 심어져 있는 참외를 따오도록 시켰다 하였다. 유씨가 모의 내용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태조 총서의 기록과는 배치되는 면이 있다. 무장들이 온 것은 밤 중이었는데 유씨에게 참외를 따오록 하였다는 대목이 그러하다.

  어쨌든 매우 긴박한 순간이었고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이때 태조는 특유의 대의명분을 꺼내들었다.

“나는 충의(忠義)를 스스로 자처하였다. 왕이 비록 난폭하다 하여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 신하로서 임금을 치는 것을 혁명(革命)이라 하지만 내 진실로 부덕(不德)하니 감히 탕(湯)과 무(武)의 일을 본받겠는가. 후세에 이것으로 구실을 삼을까 두렵다.(이하 생략)”

  신하된 입장으로서 어찌 임금을 폐할 생각을 하겠냐는 것이었다. 오히려 어진 신하라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임금과 정치를 바로 잡을 수 있도록 신명을 다할 뿐이라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옳은 말이기는 하였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온 무장들에게는 답답한 일이었다. 그들은 태조에게 때를 놓치면 오히려 큰 화가 닥칠 것이라 설득하였고, 또한 왕창근이 바친 거울의 글을 들어 결심을 굳힐 것을 청하였다. 이때 부인 유씨가 태조의 갑옷을 내오면서 거의할 것을 재촉함으로써 역사적 순간의 막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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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개성의 고려박물관에 놓여져 있는 힘찬 용두상 -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에서 힘을 느낀다.(사진 정학수)


  천명의 상징인가, 집권 합리화를 위한 조작인가 - 왕창근의 고경

  태봉국 정개(政開) 5년, 이해는 태조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때였다. 중국 상인 왕창근(王昌瑾)은 철원 시전에 있다가 고경(古鏡)을 얻었다. 우연히 햇빛이 거울에 비치자 글씨가 나타났다. 이른바 예언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삼국사기』 궁예 전에 기록된 그 글보다 상세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려 보내니 먼저 계(鷄)를 잡고 뒤에 압(鴨)을 칠 것이다. 사년(巳年) 중에 두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몸을 청목(靑木) 중에 감추고 하나는 형상을 흑금(黑金) 동(東)에 나타낸다.”

  이 경문의 내용은 『고려사』 태조총서에도 실려 있는데 보다 상세하여 모두 147자가 쓰여져 있었다. 어쨌든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왕창근은 궁예에게 바쳤고, 궁예는 문인 송함홍(宋含弘)ㆍ백탁(白卓)ㆍ허원(許原) 등에게 그 뜻을 풀이하도록 명하였다.

  이를 본 함홍 등의 해석은 이러했다. 청목은 소나무를 가리키니 송악군을 말하고, 흑금은 철원을 말하며 두 용은 각각 왕건과 궁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삼한이 왕건에 의해 일통되며 압록강 유역도 되찾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석하였다. 그들은 그대로 고했다가는 자신들은 물론 왕건도 위험해질 것이라 보고 이를 궁예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 경문은 왕창근의 경문이라 하여 소문이 일약 조야에 삽시간에 퍼졌던 듯하다. 예언 비기의 것이었지만 왕건도 이를 들어 알고 있었던 정황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왕건은 조심할 따름이었다.

  과연 이것이 비기로서 우연히 발견된 것이었을까. 왜 『삼국사기』에서는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고 태조총서에서는 그 내용과 뜻풀이를 아주 상세하게 해놓았을까.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왕건측이 궁예와 민심을 떠보는 마지막 시도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들은 이 경문을 내놓음으로써 궁예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폈다. 이를 지켜본 뒤 자신들의 의지를 현실화할 기회를 찾았던 것이다. 아주 우연히 일어난 그래서 더욱 천명임을 보여주기 위한 인위성이 가미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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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태조 왕건 상으로 알려진 보살상, 혹 고려왕조에서 노래한 제불(帝佛)은 아닐까?(사진 정학수)


왕공이 의기를 드니, 수 만 명이 움직였다


  이제 다시 을묘일 밤, 왕건의 사저로 돌아가자. 『고려사』 복지겸 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왕건을 찾은 무장들을 대표하여 홍유는 말하길,

“때는 만나기 어렵고 잃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으면 도로 그 허물을 받습니다. 나라 안의 고통을 받는 백성들이 밤낮으로 평화가 회복되기를 바라며 또한 권위(權位)가 중한 사람은 모두 학살되어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덕망이 공의 위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으니 뭇 사람이 공에게 소망을 걸고 있습니다. 공이 만약에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죽을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왕창근의 경문(鏡文)이 저와 같으니 어찌 하늘을 어기며 독부(獨夫)의 손에 죽겠습니까.”

  라 하였다. 그리고는 여러 장수들이 왕건을 안고 나와 새벽에 노적가리[積穀] 위에 앉히고 군신(君臣)의 예(禮)를 행하였다. 다음 순간 여러 장수들을 호위했던 군졸들을 시켜 사방에 외치게 하였다.

  “왕공(王公)이 이미 의기(義旗)를 들었다.”

  그 순간 따르는 자가 얼마인지 모르고 궁성문에서 기다리는 자가 1만여 명이나 된다 하였다. 궁예는 이때 사복차림으로 도망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 같은 내용이 『고려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918년 6월 을묘일 밤 대역사의 모습이었다. 주지하듯 이들 내용은 고려왕조 특히 왕건을 권선징악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그의 행위를 합리화 정당화하는 방향에서 서술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왕건은 팔짱만 끼고 있다가 추대에 의해 갑자기 왕위에 오른 것일까?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천명이었을까? 이러한 설정에 대해 의심을 품을 만한 면이 있다. 첫째, 을묘일 밤에 몰래 이루어진 거사의 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거사를 시행하는데 수만 명이 동원되고 있다. 둘째, 여러 장수들과 왕건이 밤에 만났는데 왕건의 부인 유씨가 참외를 따러갔다 라는 기록이 있다. 셋째 왕창근이 왜 하필 거사 직전에 고경에 쓰여진 예언의 글을 발견하였을까?

  이러한 여러 가지의 의문점을 토대로 본다면 918년 6월 을묘일의 거사와 왕건의 추대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치밀한 각본과 준비에 의해 구성된 ‘역성혁명’의 전주곡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준비된 군주라 할 왕건은 추대라는 유교적 형식을 빌어 성대하게 즉위할 수 있었다. 이튿날 왕건은 포정전에서 즉위하고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여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알렸다. 그리고 즉위 조서를 내려 궁예의 폭정을 없앤다는 등극의 정당성과 애민과 검소, 겸손이라는 통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고려왕조를 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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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 전경 - 전란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옮겨지는 수난을 당하였다(사진 정학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