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1623년 3월 13일 밤, 인조반정이 일어나다!

BoardLang.text_date 2008.09.04 작성자 신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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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3월 13일 밤, 인조반정이 일어나다!


신병주(중세사 2분과)


1623년 3월 13일 밤 어둠이 짙게 깔릴 무렵 일군의 무리들이 긴장감이 역력한 채로 쏙쏙 홍제원 근처로 집결하였다. 반정군에 합류한 능양군(후의 인조) 또한 친위 부대를 거느리고 연서역 근처에 주둔하면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사를 앞둔 이 급박한 시간에 대장으로 추대되었던 김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술렁이던 무리들은 이괄을 임시로 대장으로 추대했지만 다급한 모습으로 김류가 도착하자 예정대로 김류를 총대장으로 하였다. 세검정에 다다른 무리들은 이 곳 우물에서 칼을 한 번 씻으며 함께 죽기를 맹약하면서 반정이 꼭 실현되도록 결의를 다졌다.

1. 창의문을 거쳐 창덕궁으로

3경 무렵 최명길, 김자점, 심기원 등이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彰義門 : 서울의 북소문)에 이르렀다. 빗장을 부수고 들어간 반정군은 그들을 체포하러 온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육조 앞길에서 베었다. 곧바로 창덕궁에 이른 반정군은 돈화문을 도끼로 찍었다. 이미 반정군과 내통하고 있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명에 의해 금호문은 쉽게 열렸다. 반정군은 창덕궁의 전각들에 불을 지르며 광해군의 침소를 급습하였다. 그들은 창덕궁 안 함춘원 나무 풀숲에 불을 지르며 반정 성공의 신호로 삼았는데, 만약 불길이 치솟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자결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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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정선의 그림 「창의문」; 반정군은 이 곳을 통해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반정의 주도세력은 서인인 이이와 이항복의 문인인 김류, 이귀, 김자점, 신경진, 이괄 등이었다. 광해군 시절, 정권은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를 모집단으로 하는 북인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서인과 남인들은 북인들에게 커다란 정치적 불만을 가지면서 점차 세력을 결집하였다. 특히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 ‘페모살제’는 이들에게 주요한 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반정의 주체세력에 의해 왕위에 오른 능양군(후의 인조)은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정원군의 장남으로, 동생 능창군이 역모혐의로 처형된 아픈 과거를 갖고 있어 쉽게 반정군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반정 주체세력은 신하 이윤이 중국 은(殷)나라 왕 태갑을 친 것을 거사의 명분으로 삼았다. 능양군이 선조의 친손으로서 총명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다는 점도 고려하였다.

갑작스런 반정군의 공격에 놀란 광해군은 잠을 자다가 황급하게 일어나 내시에게 업혀서 궁궐 담을 넘은 후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해 있었으나, 의관 정남신의 고변으로 곧 끌려나왔다. 그리고 폐주(廢主)를 폐하고 새로운 왕을 세운다는 반정군의 목소리를 들었다. 조선의 역사상 두 번째의 반정이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 광해군은 황급히 달아나면서 내시에게 종묘에 불이 난 것인지를 물었다. 종묘에 불이 났다면 반드시 역성혁명이고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폐위시키는 사건임을 직감한 것이다. 그런데 종묘와 가까운 함춘원 근처에 불이 일어나면서 내시는 종묘에 불이 난 것 같다고 보고했고, 광해군은 자포자기하면서 피신을 했으나 곧 체포되어 끌려왔던 것이다.

2. 광해군과 북인 세력의 최후

광해군은 폐위된 직후 부인 유씨, 폐세자된 아들 부부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겨우 목숨은 부지하였지만 강화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아들 부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폐세자는 연금된 집 안 마당에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발각된 후 인조의 자진(自盡)의 명을 받아 죽고, 폐세자빈 역시 이에 충격을 받고 자살하였다.

1623년 10월 왕비 유씨가 세상을 떠난 뒤 광해군은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타고 난 체력 덕분인지 1636년 강화도 교동, 1637년 제주도 등 유배지를 옮겨 다니면서 그 모진 세월을 잘도 견뎌 나가다가 1641년 7월 1일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젊은 시절 전장을 누빈 튼튼한 체력 때문에 유배 생활도 잘 견딘 것으로 여겨진다. 연산군이 중중 반정 후 강화도에 유배된 직후에 바로 죽은 것과 비교하면 광해군의 정신력과 체력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반정이 성공한 다음날부터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광해군을 보좌한 북인, 그 중에서도 대북 정권의 실세들은 대부분 자결하거나 처형되었다. 이위경, 한찬남 등 대북파들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시장 거리에서 처형되었고, 외척으로서 권세를 한껏 누렸던 박승종은 아들과 함께 도망하다가 스스로 목을 매 자결했다. 광해군 정권의 정신적 영수 정인홍도 고향인 합천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왔다. 그는 이미 89세의 고령의 몸이었지만 광해군 정권의 정신적 후원자였다는 점과 반정의 주역인 이귀 등 서인과의 오랜 악연 때문에 처형을 면할 수가 없었다.

  중앙 정부에서 정인홍의 대리자 역할을 하면서 공안정국을 주도했던 이이첨은 이천까지 도주했다가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이외에도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적극 받들어 실천했던 평안도 관찰사 박엽과 의주 부윤 정준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실리외교의 일선에서 활약했던 인물들도 반정의 주요 명분인 ‘친명배금’의 논리에선 역적일 수 밖에 없었다. 북인세력으로서 겨우 처형을 면한 사람들은 대부분 투옥되거나 유배되면서 대북파는 거의 전멸되었다.

이제 역사 속에서 북인의 이름은 거의 지워졌다. 광해군 정권을 타도하고 반정을 성공시킨 서인들은 인목대비의 교서를 통해 반정의 정당성을 다시금 공표하였다.

“적신(賊臣)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악행을 부추켜 임해군을 해치고 영창대군을 죽이며 조카(능창군)를 죽이는 등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을 해쳤다. 또 대비를 서궁에 유폐하는가 하면 의리로는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은 명에 대해 배은망덕하여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이에 인조가 윤리와 기강이 무너지고 종묘와 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볼 수가 없어 반정을 일으켰다”
(『인조실록』 인조 1년 3월 14일)

위에서 보듯이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은 ‘폐모살제’와 광해군대의 중립외교에 대한 비판이 주된 원인이었다. 이후 광해군대의 잘못된 정책을 만회하기 위하여 재성청(裁省廳) 등의 기구가 만들어졌지만 개혁은 지지부진하였고, 권세가들에게 뺏은 토지는 반정공신에게 다시 불하되는 등 공신들의 배를 불리는 문제점을 초래하였다. 특히 공신 내부에서도 갈등이 일어나 반정 이듬해인 1624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시대를 한탄하는 아래의 상시가(傷時歌)도 민간에서 유행했다고 하는데, 반정주체 세력의 선전과는 달리 인조반정이 백성들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아 훈신들이여/잘난 척 하지 말아라/그들의 집에 살고/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그들의  말을 타며/또 다시 그들의 일을 행하니/당신들과 그들이/돌아보건대 무엇이 다른가/
  (『인조실록』 인조 3년 6월 19일)

 3. 현대사와 유사한 인조반정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일까? 인조반정은 1623년 조선시대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현대사의 군사 쿠테타와 비견되는 장면이 많다. 먼저 김류와 함께 반정의 최고 주역인 이귀의 경우이다. 1622년 이귀는 우여곡절 끝에 평산부사로 부임하였다. 이귀는 특히 집권세력인 북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북인의 핵심인 정인홍과는 구원(舊怨)까지 있었다.

이귀는 관직에서 밀려날 뻔한 위기가 몇 차례 있었으나 이를 벗어났고, 반정 직전까지 외곽의 군사 동원에 유력한 평산부사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당시 지방에서 서울로 군사 동원을 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으나 이귀는 호환(虎患:호랑이의 공격)을 구실로 자체의 군사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평산은 반정군의 모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이귀의 군사적 움직임은 북인 정권에서도 포착되기도 했으나, 파직에 그쳤고 이귀는 이후에도 반정의 핵심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이는 마치 5.16 쿠테타의 주역인 박정희가 여순반란 사건 때 좌익에 연루되어 군복을 벗을 뻔한 경우를 극복하고 쿠테타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을 연상하게 한다.

훈련대장 이흥립은 배신한 인물의 전형으로 꼽힌다. 광해군 정권의 훈련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으나, 쉽게 반란군에 내응해 광해군 정권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역시 1979년의 12. 12 군사쿠테타 당시 직속상관의 명령을 배신하고 하나회의 명령을 따랐던 일부 정치군인들과 오버랩되는 측면이 크다. 훈련대장 이흥립의 전향은 반정군에게 큰 힘이 되었지만, 광해군 정권에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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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1979년 12. 12쿠테타를 보도한 신문 기사.

반정의 또다른 주역 김자점은 미리 술과 안주를 준비해 광해군과 가까웠던 김상궁(일명 김개똥)에게 보냈다. 반정의 기미를 광해군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미리 단속한 것이다. 이부분은 1979년 12.12 군사쿠테타를 성공시킨 전두환 세력이 준장 진급 모임에 자신들의 반대파를 대거 참여시켜 반대 진영을 약화시킨 것과도 유사한 방법이다.


조직적으로 임무를 부여받은 반정군은 거사 날짜를 3월 13일로 정했다. 반정의 주역 최명길이 점을 쳐서 정한 날짜였다.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이 동원한 군사는 대략 1천 명 정도로, 조선군의 최정예 군사인 훈련도감 군대에 비한다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집중적으로 권력의 중심부를 강타함으로써 반정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1961년 해병대 병력을 중심으로 5.16군사 쿠테타를 성공시킨 박정희나, 1979년 12월 12일 하나회 출신 부대를 중심으로 군사쿠테타를 성공시킨 전두환을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이다. 서인들이 주도한 쿠테타군도 진압군에 비해 수적으로는 훨씬 열세였으나 권력의 포스트를 장악함으로써 쿠테타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반정 성공 후 영의정을 핵심 서인이 아닌, 남인 출신 이원익을 삼은 것 역시 쿠테타에 따른 정치권이나 백성들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로 풀이된다. 이처럼 인조반정의 성공방정식은 현대사의 군사 쿠테타와 유사한 부분이 매우 많다. 역사를 단지 과거 속의 옛 이야기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