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인물과 사건] 명군의 참전과 ‘그들만의’ 강화 회담

BoardLang.text_date 2008.04.15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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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의 참전과 ‘그들만의’ 강화 회담


신병주(중세사 2분과)


임진왜란 발발 직후 명나라 군대가 조선을 도와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을 띤 점은 향후 동북아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큰 변수가 되었다. 명나라가 참전한 원인과 명나라 원병이 조선에 미친 파장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명군의 참전과 평양성 탈환

조선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조선의 조정은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도성을 향해 진격을 하자 조선측은 명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는 일 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덕형을 원병을 청하는 특사로 결정하여 파병을 요청하였으나 명나라는 요동지방의 방비 문제와 조선과 일본이 합세하여 명을 침공한다는 유언비어 등을 이유로 파병을 미루었다. 그러나 일본이 전쟁 초기부터 노골적으로 정명가도(征明假道)를 표명한 만큼 명나라 측에서도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1592년 7월 명나라는 요동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의 지휘 하에 정병 3천을 파견하였다. 조명 연합군은 북진하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1차 평양 수복작전을 전개했으나 실패하였다. 패전 후에 상인 출신 심유경이 유격(遊擊)이라는 직함을 달고 강화 사절로 평양에 들어왔다. 심유경은 10월 초 고니시 유키나와와 회담을 가졌다. 심유경은 조선과 일본 간의 경계선을 대동강으로 긋고 50일 간의 휴전을 제의했고, 고니시가 동의하였다.

소강 상태에 있던 전선은 이 해 12월 이여송을 도독으로 하는 명나라 2차 원병군 5만 천 여명이 파견되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이여송은 선조의 마중을 받고 융숭한 대접을 받은 후 평양으로 출발하였다. 평양 수복 전투에는 도원수 김명원이 이끄는 8천명의 관군과, 휴정과 유정이 이끄는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의 승군 2,000여명도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다.

1593년 1월 혹한의 추위 속에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 공격에 나섰다. 성 안에는 일본군 1만 5천 여명과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 진을 치고 있었다. 불랑기포로 무장한 명군, 날렵하게 유격 전술을 전개한 승병들의 활약 속에 일본군은 토굴로 들어가 조총으로 저항하였다. 고니시는 후퇴하는 길을 막지 말아달라고 요구했고, 이여송은 이에 응하였다. 마침내 평양성을 탈환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1월 18일 피난지 의주를 떠나 남하를 시작했다.

 2.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일본군의 퇴각에 자신을 얻은 이여송 부대는 개성을 거쳐 바로 서울로 향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경기도 벽제 부근에는 매복중인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벽제관 부근 주막리 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명군은 일본군에 밀렸고 이여송은 적군에 포위된 후 죽음 직전에서 구출되었다. 명군은 숱한 사상자를 내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고, 일본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명나라 군대의 참전에 조선군의 사기가 커진 것은 사실이나 명군의 폐해 또한 적지 않았다. 민간에서 ‘명군은 참빗, 왜군은 얼레빗’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유행한 것이나, 『연려실기술』에서 ‘명군이 들어가는 마을에서는 소나 돼지, 가축, 개와 닭 같은 가축이 전부 없어진다. 명군은 닭을 가장 즐겨 먹어 피 한 방울이라도 버리는 것이 없다.’고 지적한 것도 이러한 상황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백성들에게 명나라 군대는 조선을 도와주는 구원병의 이미지 보다 점령군의 이미지가 컸던 것이다. 또한 명나라 상인들 중 일부는 명나라 군대가 발급한 노인(路引:일종의 통행증명서)을 가지고 상업 행위에 종사하고, 은을 채굴하는 등 자신의 영리 확대에 급급하기도 하였다.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명나라 군대의 모습도 실망스러웠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명군의 남병(중국 남쪽에서 차출된 군대) 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남병들이 성 위를 제일 먼저 점령했는데 약속된 은 5천 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이여송은 의주에서 남병 1,300여명을 살해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명군 내부 간의 호흡도 맞지 않았던 것이다.

 3. 행주산성 전투의 승리와 강화회담

한편, 이 시기 권율과, 승려 처영 등은 행주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웅거하여 명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탈환하려고 했으나, 이여송 부대의 패전으로 고립문원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행주산성 전투에는 적은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변이중이 만든 화차와 비격진천뢰, 총통(銃筒) 등의 화약무기를 동원하여 화력으로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행주치마에 돌을 담아 나른 부녀자들까지 협력하면서 조선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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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행주산성/ 출처 :

 행주산성 전투에서 사기를 잃은 일본군은 서울 철수를 서둘렀고, 휴전을 제의하였다. 전투에 자신가을 잃은 명나라도 이에 동의하여 다시 강화회담과 휴전이 이루어졌다. 1593년 3월 용산 회담의 결과 왜적은 서울에서 남해안으로 철수하고 포로가 된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를 돌려보냈다.

  조선측은 끝까지 강화 회담에 반대했으나 전쟁 비용에 부담을 느낀 명나라의 입장과 조선 의병과 수군의 압박으로 승전을 기대할 수 없었던 일본의 입장이 맞아 떨어져 강화회담은 성립되었다.

  명나라는 도요토미를 일본 왕으로 봉하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것을 조선으로 삼았고, 일본은 명의 황후를 일본의 후비(后妃)로 삼을 것과 조선 영토를 일본에 할양할 것, 조선의 왕자의 대신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명에 제의하였다. 전재의 당사국인 조선은 완전히 배제한 ‘그들만의’ 강화 협상이었다.

일본군이 철수한 서울은 거대한 폐허로 변해 있었다. 관아 건물은 대부분 불타버렸고, 주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까봐 집안에서 숨어 지냈다. 명나라 군대가 포악하다는 소문이 쫙 퍼져 나갔고, 시체 썩는 냄새로 악취가 진동하는 것이 당시의 서울 모습이었다.

  일본군의 철수 소식을 듣고 선조는 의주를 떠나 평양으로 내려왔다. 벽제관의 패전 소식 때문에 잠시 발길을 주춤한 선조 일행은 해주의 행재소에서 오랜 기간을 머물렀다. 선조는 끝까지 강화회담을 반대했다. 일본군이 종묘를 불태운 것, 왕릉을 파헤친 것, 진주성 농민을 학살한 것 등이 주요 이유였다.

  선조의 강경한 입장은 1593년 8월말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것에도 드러난다. 선조는 명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군 천적 이순신을 다시 전면에 내세워 해안에 은거한 일본군의 퇴각을 지시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휴전회담을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의 모습과 닮아 있다. 1593년 10월 1일 선조는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4년 가까이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경상도 연해 지방에 성을 쌓고 방어시설을 갖추면서 끝가지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토 부대는 장생포(울산)에 진을 쳤고, 고니시 부대는 웅천성(김해)에 병력을 이끌고 주둔했다. 그리고 마침내 1597년 다시 15만의 병력으로 도발을 하게 되니,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정유재란 때도 명나라 조정에서는 구원병을 보내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아래 명나라 병부의 자문(咨文)은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하는 기본적인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조선의 형편을 헤아리건대 존망을 점치지 못할 만큼 위곤(危困)함이 극도에 이르렀다. 따라서 오늘날의 조선에 대한 원조는 마치 물불 속의 사람을 구원하여 주는 것과 같아서 서두른다면 그래도 만에 하나 요행을 바랄 수 있겠으나 늦춘다면 이는 겉으로는 구원하는 것이 되지만 속으로는 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처럼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방어에 손을 쓰는 일을 다시 완만히 이야기하고 범연히 대응한다면 성산(成算)도 결정되지 않을 터인데 조도(調度)를 어디에다 시행하겠는가?

... 대개 왕경은 삼면이 한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또 본국이 건국한 곳이어서 병마와 은량(銀粮)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형편상 가벼이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히 왕경을 보존할 수 없어서 어쩔 수가 없게 된다면 다시 물러나 평양(平壤)을 지켜야 한다. 평양의 성은 여느 곳보다도 조금 낫고 또 남문 밖은 곧 큰 강이 있어서 이곳은 방어할 수가 있다. 그러나 왜노의 창궐이 심하여 평양도 지탱하지 못한다면 조선은 전몰되는 것으로 오직 물러나 압록강을 지키며 별도의 회복책을 마련할 따름이다. 이렇게 된다면 요좌(遼左)엔 절박한 재난이 빚어지고 국가는 무궁한 비용이 불어나서 병화(兵禍)가 그칠 줄 모르게 될 것이다.

대저 천하의 일이란 이름은 절약한다 하면서도 도리어 허비가 많고 이름은 허비한다 하면서도 절약이 갑절일 수도 있으니, 곧 오늘날 구원병을 보내는 것의 지속(遲速)이 그러하다. 구원하는 것의 급속함은 싸움에 급해서가 아니라, 조선의 힘을 병합하여 지켜서 은연히 호표(虎豹)가 산속에 있는 형세를 만들자는 것이다. 다시 그들의 죄를 성토하여 꾸짖는다면 왜노가 반드시 마음에 가책을 받고 떠나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군병이 일찍 출발하면 행량(行粮)은 좀 허비되겠지만, 조선을 보전하게 된다면 절약되는 바가 실로 많을 것이다.

군병이 늦게 출발하면 비록 행량은 좀 절약되겠지만 만에 하나 왜노가 우리가 방비하지 못한 틈을 타고서 장구히 몰아쳐 조선을 탈취한다면 이는 왜구에게 병기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싸다가 주는 결과가 되어 조선 땅이 또 한번 일본에게 보태어질 것이니, 옛것을 다시 회복하려면 힘이 다시 갑절이나 들게 되어 그 비용이 적지 않고 화 또한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옛사람은 큰일을 거행함에 있어 작은 비용을 아끼지 않으므로 작은 것으로 말미암아 큰 것을 해치는 예는 별로 없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4월 21일(신사) )

4. 병부 상서 석성과 홍순언의 인연

명나라의 지원병을 이끌어내는데 크게 공헌한 명의 병부상서 석성은 조선과 일찍부터 인연을 맺은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사역원과 역관에 관한 기록인 『통문관지』에는 석성과 역관 홍순언의 인연이 기록되어 있다. 홍순언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연려실기술』과 같은 야사에도 일부 전해지고 있지만 그의 행적이 가장 자세히 기록된 책은 『통문관지』이다. 『통문관지』에 기록된 홍순언의 행적을 잠깐 살펴보자.

「홍순언은 중국의 통주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하룻밤 인연을 맺고자 했다. 그런데 여인이 소복 차림인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여인은 부모님의 장례를 치를 돈을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팔고 있다고 했고, 여인의 말을 들은 홍순언은 선뜻 300금을 내주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여인이 이름을 묻자 순언은 성만 알려주고 나왔다. 훗날 명나라 예부시랑 석성의 첩이 된 이 여인은 홍순언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통문관지』 권7)

이어 『통문관지』에는 중국 여인과 맺은 이 인연은 홍순언이 조선 최고의 외교 현안인 종계변무를 성공시키거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참전을 이끌어내는데 큰 힘이 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여인과의 인연도 일부 작용했겠지만 그 보다는 홍순언이라는 통역관의 뛰어난 역량이 명나라와의 외교 협상을 성공으로 이끈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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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통문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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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통문관지』의 홍순언 관련 기록

 5. 명군의 참전 어떻게 볼 것인가?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에서 명나라 참전을 이끌어 낸 부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기본적으로 명나라가 참전을 한 것은 일본이 조선만을 목표로 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명나라 영토까지 침범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이는 마치 6.25전쟁 때 미국과 중국이 참전하는 국제전의 양상을 띤 것과도 유사한 경험이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국제전의 양상을 띠는 것은 지정학적인 조건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조선은 명나라의 참전을 끌어냄으로서 초반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반격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무리 자국의 위협이 된다 해도 명의 출병 또한 간단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조속히 명이 파병을 결정한 것에는 조선과 명의 우호적인 외교 관계도 주요한 몫을 하였다.

현재적 관점에서 일부 비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조선의 명에 대한 사대외교는 실리적은 측면도 분명 지니고 있었다. 참전 이후 명나라 군대의 오만함과 장기주둔에 따른 민폐 등 문제점도 많이 드러났지만, 명의 참전을 이끌어 일단 패전의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전기를 마련한 점은 외교적 노력의 성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