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1591년, 운명을 가른 통신사의 보고

BoardLang.text_date 2007.12.27 작성자 신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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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년, 운명을 가른 통신사의 보고
-  잘못된 정세인식과 초기의 패전 -


신병주(중세사 2분과)



1. 엇갈린 보고


  16세기의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기였다.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자 각지의 호족들의 권력 쟁탈이 전개되었다. 전국시대 초기의 승리자는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는 포루투갈을 통해 수입한 총을 무기로 세력을 확장해 일본의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1582년 암살당함으로써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즉 풍신수길(豊臣秀吉)이었다.

  풍신수길은 오사카를 거점으로 하여 1587년 구주(九州) 정벌을 완료하여 전국시대를 통일한 후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대륙 침략의 발판을 위한 전초전으로 조선 출병을 계획하였다. 전국시대의 혼란을 통일한 풍신수길은 1587년 9월 일본 사신을 조선에 보내고 조선 국왕 선조의 입조(入朝)를 기다렸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일본을 야만국으로 멸시하고 있었던 조선에서는 일본의 오만함에 분개하면서 사신의 영접을 거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그러다가 외교적 타협 끝에 조선의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통신사 파견을 거부하면 전쟁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허성(許筬) 등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건국 이후 200년간 맞이한 평화기를 구가하면서, 국방에 대한 대비책이 부재하였다.

  1584년 이이가 제시한 국방 강화책은 기억 속에 묻혀 버렸고, 사림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분당까지 이루어지는 등 정치기강이 극도로 해이해졌다. 세제의 문란으로 민심도 이반된 상황이었지만 지배층 내부에서는 이러한 위기의식에 거의 무감각하였다.

  마침내 1589년 11월 통신사 일행의 명단이 작성되어 선조의 결재를 받았다. 정사(正使) 황윤길, 부사(副使), 김성일, 서장관(書狀官) 허성 등이 대표단으로 선발되었다. 이들은 1590년(선조 23) 3월 6일 서울을 출발, 4월 29일 부산포에 도착하고 대마도를 거쳐 9월에 교토에 도착했다.

  풍신수길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조선 사신의 접견을 미루는 오만함을 보였다. 전국시대의 혼란상을 무력으로 통일한 자신감이 충만했기 때문이리라. 풍신수길의 접견은 11월에 가서야 조선 사신이 국왕을 뵙는 의식으로 비로소 접견이 이루어졌다.

  통신사 일행은 ‘양국의 우호를 두텁게 하자’는 간단한 내용의 국서를 올리는 의식을 갖추었는데, 풍신수길은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통신사가 떠난 지 보름 만에 회답 국서를 보내왔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면서 명나라를 칠 것이니 조선이 먼저 항복해서 입조를 하라는 것이 주요 내용으로서 일본을 상국으로 섬기라는 모욕적인 내용이었다.

  1591년 3월 귀국한 통신사 일행은 곧바로 사행의 결과를 보고하였다. 이 자리에서 황윤길은 ‘풍신수길은 담력이 있고 안광이 빛나 보인다며’ 침략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고, 김성일은 ‘풍신수길은 서목(鼠目:쥐새끼의 눈)으로 두려워 할 존재가 아니다’고 보고하였다. 일부에서는 황윤길이 서인, 김성일이 동인이므로 이를 당쟁의 산물로 보고 있으나, 김성일의 경우 이황의 제자로서 이황은 이전부터 일본과의 교린정책을 적극 추진했던 인물로서 스승의 학문적 영향도 일부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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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김성일의 문집인 『학봉선생문집』

  2. 김성일을 위한 변명

  김성일은 ‘일찍부터 두려워할 것은 천명과 인심이요 섬 오랑캐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논리를 시종일관 견지하였다. 전쟁의 위협이 전파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진다는 점을 우려하여 왜적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하였지만 결국 임진왜란은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에 김성일은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김성일은 임진왜란을 당하자 초유사(招諭使)에 발탁되어 전장(戰場)을 직접 누비면서 왜적 격퇴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1592년 6월 28일(병진) 김성일이 올린 치계(馳啓)를 보자.

  「신은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한데 특별히 천지 같은 재생(再生)의 은혜를 입어 형벌을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초유(招諭)의 책임을 맡겨주시니, 신은 명을 받고 감격하여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리면서 이 왜적들과 함께 살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지난달 29일에 직산에서 남쪽으로 달려가 이달 5일에 공주에 도착하였는데, 대가가 서쪽으로 행행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비록 도보로라도 호종의 대열에 끼어 말굴레 밑에서 죽고자 하였으나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신은 의리로 보아 차마 물러나 앉아 있을 수 없어 빈주먹으로라도 김수(:경상감사)를 따라 싸움터에서 죽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초유의 명을 받았으니 마음대로 임무를 저버릴 수 없어 백성들을 혈성(血誠)으로 개유(開諭)하고 충의로써 격려하면 작은 힘이나마 얻어 나라를 위하는 신의 마음을 바칠 수 있겠기에, 잠시 죽음을 참고서 구차스럽게 모진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진주에 사는 유생 3백여 명이 또 서로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방어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비록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국가가 믿는 것은 인심이니 인심이 이와 같기를 하찮은 소신은 밤낮으로 하늘에 축원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병진) )

  김성일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초유사의 임무를 죽음을 각오하고 수행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어 정인홍, 김면, 곽재우 등 의병장들의 공적을 소개하였는데, 이후 김성일은 의병장들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김성일은 특히 호남으로 들어가는 요충인 진주 방어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실록의 기록을 다시 보자.

  「신이 보건대 진주는 남쪽 지방의 거진(巨鎭)으로 영남과 호남의 요충지에 위치하였으니,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일대에 보존된 여러 고을이 붕괴되고 와해되어 아침, 저녁을 보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이 반드시 호남을 침범할 것입니다. 호남은 지금 근왕으로 인하여 도내(道內)가 텅 비었으니 만약 또 적의 침입을 받는다면 더욱 한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곳은 바로 수양(○陽) 1 군이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 된 것 - 당나라 안록산의 난 때 수양성을 사수하여 남하를 저지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 - 과 같으니, 오늘날 꼭 지켜야 할 곳입니다. 그런데 진주의 정병(精兵)이 이미 감병사(監兵使)에게로 갔다가 모두 무너져 산속으로 들어갔고 그 나머지로 성을 지키는 군사는 겨우 천여 명이며 아병(牙兵)으로서 활을 잘 쏘는 자도 겨우 60∼70명뿐입니다. 신은 진주에 머물면서 독려 조치하여 이 고을을 견고하게 지키도록 하여 호남 및 내지를 방어하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합니다.」(『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병진) )

  실제 김성일은 김시민과 곽재우 등을 독려하여 진주성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다. 진주성의 승리가 초반 왜적과의 전투에서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음은 물론이다. 이후에도 김성일은 전장을 누비다가 1593년 전쟁 도중에 병사하였다. 이러한 김성일의 행적을 감안하면 1591년 그의 ‘잘못된 보고’는 사면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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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초유사 김성일이 도민에게 보낸 초유문

  3. 일본의 대침공과 초기의 패전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나고야에 결집시킨 총 20여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최초의 부대는 4월 14일 부산진을 침공한 소서행장(코니시 유키나가) 부대였다. 부산진 첨사 정발이 항전하다가 전사하고, 15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이 동래성을 사수하다가 전사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실록은 그 날의 혼란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왜구가 침범해 왔다. 이보다 먼저 일본 적추(賊酋) 평수길(平秀吉)이 관백(關白)이 되어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잔학하고 포악함이 날로 심했다. 그는 항상 중국이 조공(朝貢)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일찍이 중 현소(玄蘇) 등을 파견하여 요동을 침범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우리나라에서 대의(大義)로 매우 준엄하게 거절하자 적은 드디어 온 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현소·평행장(平行長)·평청정(平淸正)·평의지(平義智) 등을 장수로 삼아 대대적으로 침입해왔다. 적선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정발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 이튿날 동래부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이 죽었으며, 그의 첩도 죽었다. 적은 드디어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김해·밀양 등 부(府)를 함락하였는데 병사 이각은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2백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들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선조실록』, 선조 25년 4월 13일(임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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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을 알리는 실록의 기록

  당시 일본군 선발대는 ‘싸우려면 싸우되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비키라’는 나무 팻말을 세웠는데, 이것을 본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켜 지는 어렵다’는 글귀를 팻말에 적어 일본군 진영에 보내면서 결사 항전의 의지를 보였으나, 신식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2만명의 일본군을 2천명의 군사와 도성민으로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발과 송상현의 충절은 후대에도 귀감이 되어 조선후기까지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라는 그림으로 길이 기억되었다. 4월 18일 가등청정(가토오 기요마사) 부대가 부산에 도착하고, 흑전장정(구로다 기요마사) 부대는 김해에 도착하였다. 3개 부대로 편성된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각각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를 목표로 진격하였다.

  일본군의 침공에 조정은 우왕좌왕하였다. 우선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고,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삼아 북상중인 일본군을 문경새재에서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4월 24일 이일이 상주에서 패배하고, 신립은 천혜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 넓은 들판에 진을 치면서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적과 맞섰다. 기병 중심의 아군이 탄금대 들판에서 싸우는 것이 효과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탄금대는 논과 저습지로 기병이 활동하기에 매우 불편하였고, 들판이어서 아군이 쉽게 노출됨으로써 조총으로 무장한 적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또한 전의를 불태우기 위해 남한강을 뒤로 한 배수진(背水陣) 작전은 후방의 탈출구를 봉쇄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조선군의 전멸을 가져와 훗날 병력을 가다듬을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질 수 없게 하였다. 믿었던 장군 신립의 패배로 조정의 사기는 완전히 꺾이게 되었다.

  죽령, 조령 등 천연적 요새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조총이라는 신무기에 대한 정보에 어두웠기 때문에 빚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신립의 패전 소식이 들려오자 더 이상 서울을 사수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서둘러 서울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선조는 4월 30일 서울을 떠나 평양 천도를 결정하면서 명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분노했다. 공노비, 사노비의 문서가 보관된 장례원과 형조의 방화가 이어지고,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에 대한 방화도 이어졌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과 같은 사람은 도성을 지키고자 군사를 일으켰다가 국왕의 피난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군대를 해산시켰다.

  국왕의 피난길도 시련의 연속이었다.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전황이 계속 불리해지자자 선조는 6월 13일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하였다. 조금 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명나라로 망명하려는 뜻에서였다. 1950년 6.25 전쟁 시기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고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는 최적지인 부산까지 피난 간 상황이 1592년의 임진왜란 때도 연출되었던 것이다.

  선조는 6월 23일 의주목사의 거처를 행궁(行宮)으로 삼고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분조(分朝:2개의 정부)를 만들었다. 혹시라도 있을 변고에 대비하여 조정을 둘러 나누었던 것이다. 선조가 의주에서 안전하게(?)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광해군은 근왕병 모집을 위해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 전국을 누볐다. 광해군의 이러한 참전 경험은 이후 그가 왕으로 즉위했을 때 국제정세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관군의 거듭되는 패전 속에서 국왕이 국경선 지역까지 피난을 가는 치욕을 맛보는 수모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조선을 지키려는 움직임들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으니, 바로 지방 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의병과 왜군의 보급로 차단에 성공한 수군의 활약이 그것이다. 의병과 수군은 조선의 새로운 희망이자 돌파구였다.